[구인회이야기⑦]'최초 최초 최초' 금성사의 대약진

기사등록 2013/08/17 05:30:00

최종수정 2016/12/28 07:55:16

【서울=뉴시스】정리/우은식 기자 = 구인회 회장의 기대와 달리, 최초의 국산 라디오에 대한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일단 전파상들을 통해 라디오를 팔아야 할 텐데 이들이 금성사의 라디오를 외면했다.

 사실 전파상들이 금성사의 라디오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미군 부대를 통해 들어오는 밀수품을 팔았고 또 자신들이 직접 수리하거나 조립까지 하여 팔기도 했기 때문에 그 틈 사이로 금성사의 라디오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좋지 않은 일이 한꺼번에 터졌다. 역대 최고의 태풍으로 불리는 ‘사라호’가 대한민국에 몰아닥쳤다. 이로 인해 락희화학 건물도 부서지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인회 회장의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구인회 회장은 마음의 중심을 잃을 만큼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인회 회장은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라디오 판매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라디오 판매는 계속해서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금성사는 몇 년 동안이나 손해를 보았다.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들이 터져나왔다.

 “거 봐, 괜히 라디오에 손을 대서 손해만 봤잖아!”
 “이러다가 락희화학까지 큰일 나는 거 아냐?”

 구인회 회장 역시 이런 회사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무모한 일을 벌이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든 10년은 해봐야 한다.”  

 구인회 회장은 이렇게 다시 마음을 잡았으나 회사 분위기는 점점 금성사의 문을 언제 닫느냐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 사이 사회적으로는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이 연달아 터져 더욱 혼란을 부추겼다.

 5·16군사정변 때는 락희화학이 부당이득 기업으로 찍혀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이러한 때에 구인회 회장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실장에서 상무가 된 윤욱현이었다. 그는 구 회장과 함께 전자공업 사업을 계획한 사람으로 언젠가는 이 사업이 반드시 성공할 거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마지막 반대에 부딪힐 때까지 금성사를 지키고자 애썼다. 그렇게 암흑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있을 무렵, 구인회 회장에게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5·16군사정변을 일으킨 혁명정부에서 시작됐다.

 “정부에서 하는 일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습니다.”

 당시 혁명정부의 공보부(국가의 이념과 정책을 국민에게 알리는 등의 사무를 했던 중앙행정기관) 장관으로 있던 이원우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는 마침 구인회 회장과 잘 아는 사이였기에 가끔씩 서로 만나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곤 했다.

 이원우 장관의 말을 듣고 있던 구인회 회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왜 안돼요? 방송으로 하면 됩니다.”
 “어허,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에 라디오 있는 집이 드물어요.”

 라디오 이야기가 나오자 구인회 회장의 눈이 번쩍 뜨였다. 또 한 번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구인회 회장은 이원우 장관과 함께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금성사가 적극 지원해 정부에 라디오 5000대를 기증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당시 국가 최고지도자였던 박정희 의장이 금성사를 위해 라디오 밀수품까지 단속해 금성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실제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 이후 금성사의 라디오는 불티나게 팔렸고 금성사 문을 닫자는 말도 쏙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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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금성사는 초고속으로 발전을 거듭해 1962년 말에는 사원 수가 1000여 명에 달할 정도의 큰 회사로 우뚝 섰다.

 <최초, 최초, 최초>

 “여보! 큰일 났어요. 냉장고가 고장이 났나 봐요!”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소리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인회 회장의 동생 구정회의 아내였다. 당시 구정회는 금성사의 사장으로 있었다.

 “이거 냉장고도 고장이 나나, 허허. 어떡하지?”  

 그대로 두다가는 음식이 다 상할 판이었다. 당시에는 미제 냉장고밖에 없던 시절이라 마땅한 수리점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구정회는 회사 기술자인 임종염 과장을 불렀다. 임종염 과장은 회사에서 이미 냉각 장치를 만들어 낸 대단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구정회의 집에 있던 냉장고를 회사로 가져가 말끔히 수리한 후 다시 갖다 주었다.

 “역시 실력이 대단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냉장고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겠더라고요.”

 임종염은 냉장고를 수리하면서 작동 원리는 물론 제작 원리까지 파악한 모양이었다. 이 사실은 곧 구인회 회장의 귀에도 들어갔고 구인회는 당장 임종염에게 냉장고를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최초의 국산 냉장고가 탄생하였다. 그 이름은 ‘GR-120’이었다.

 마침 최초의 냉장고가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름이 닥치면서 냉장고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대성공이었다. 지금은 냉장고가 없는 집이 없고 가게나 식당에도 다 있지만, 부잣집에서나 냉장고를 볼 수 있었던 당시에 ‘냉장고의 대중화’는 대사건이었다.

 <최초의 텔레비전, 최초의 세탁기>

 사실, 라디오가 나오면 뒤따라 나와야 하는 것이 텔레비전이다. 그런데 최초의 국산 텔레비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때는 몇 년이 더 지난 후였다. 여기에는 딱한 사정이 있다.

 당시는 군사정부 시절로 사업을 하려고 해도 국가의 허가가 나야 할 수 있었다. 텔레비전을 만드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국가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이를 미루고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국산 텔레비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을 외국에서 빌려 와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 경제 사정이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는 데 있었다.

 이에 가장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회사는 당연히 금성사였다. 금성사는 이미 라디오, 냉장고 등을 만든 경험이 있으므로 다음에 만들 가전제품은 당연히 텔레비전이어야 했다.

 게다가 당시 KBS, TBC(동양방송) 등이 개국을 하면서 텔레비전을 원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을 때이기도 했다. 금성사는 이미 일본의 회사 ‘히타치’와 기술제휴(기술을 서로 나누기로 약속함)를 한 상태였기에 기술적으로도 자신이 있었다.

 “이러다가 영원히 허가가 나지 않으면 어떡하죠?”

 직원들이 이런 걱정을 하자, 구인회 회장은 다음과 같은 말로 직원들을 격려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림)이라고 했습니다. 어쨌든 사람은 자기 할 일을 다해놓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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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도 구인회 회장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드디어 정부에서 허가가 난 것이다. 금성사는 이미 많은 준비를 했기 때문에 허가가 난 날로부터 불과 8개월 만인 1966년 8월에 최초의 국산 텔레비전을 세상에 선보였다. 최초의 국산 텔레비전의 모델 이름은 ‘VD-191’이었다.

 이후 금성사는 계속해서 1968년에는 최초의 국산 에어컨을, 1969년에는 최초의 국산 세탁기까지 만들어 국내 가전업계에서 최초의 신기록을 모두 세웠다.

 <최초의 합성세제, 하이타이>

 방콕 출장을 다녀온 락희화학의 허신구 상무가 합성세제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합성세제가 뭡니까?”
 “일종의 가루비누인데, 물에 타면 거품이 나면서 때를 말끔히 빠지게 합니다.”

 “신기하군요. 하지만 합성세제는 전기세탁기가 있어야 쓸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지금 우리나라 가정에는 아직 전기세탁기가 보급되지 않았다는 게 문제지요.”
 “지금 금성사에서 세탁기를 개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세탁기 개발과 함께 합성세제 개발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허 상무의 의견은 반대가 너무 심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당시 락희화학에서는 세탁비누를 개발해 높은 수익을 내고 있었는데 합성세제 때문에 세탁비누 판매가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확신을 가지고 있던 허 상무가 여러 차례 설득하자, 구인회 회장은 그를 한번 믿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합성세제 이야기가 나온 지 1년여가 지난 뒤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경쟁 회사였던 ‘애경유지’에서 합성세제를 개발하고 있다는 소문이 흘러들었다. 락희화학이 한발 늦은 셈이었다. 어차피 먼저 합성세제를 만들어서 내놓는 회사가 유리할 것은 뻔한 이치였기 때문에 구인회 회장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한발 늦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합니까?”
 “걱정 마세요.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허 상무는 제품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광고부터 하기 시작했다. 이때 만들어진 상표 이름이 ‘하이타이’다. 이후 하이타이를 구경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람들이 입으로 하이타이를 중얼거리며 다니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게다가 락희화학이 이후에 하이타이를 세상에 내놓았을 때 애경유지는 미처 합성세제 개발을 마치지 못했다. 지금도 유명한 하이타이는 이렇게 세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하이타이는 생각보다 시원하게 팔려 나가지 않았다. 역시 전기세탁기가 아직 많이 보급되지 않은 것이 문제였고 사람들이 세탁비누에 더 익숙한 것도 이유였다. 하지만 허 상무는 이에 굴하지 않고 대대적으로 하이타이를 선전했다.

 하이타이가 처음 나온 날이 1966년 4월이었는데 그해 겨울이 올 때까지도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잘못하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의 비웃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구인회 회장만은 끝까지 허 상무를 믿고 지원했다.

 마침내 그해 연말부터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그동안 길거리 구석구석까지 다니며 하이타이를 선전했던 결과가 그제야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하이타이는 대한민국 합성세제를 대표하는 상표로 굳게 자리잡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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