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회이야기⑥]'금성사' 설립…최초의 국산 라디오 탄생

기사등록 2013/08/11 05:30:00

최종수정 2016/12/28 07:53:30

【서울=뉴시스】정리/우은식 기자 = <치즈에는 미제 치약, 김치에는 국산 치약>

 "칫솔이 있는데 왜 치약은 없습니까?”

 구인회 회장은 어느 날 한 고객이 던진 질문에 정신이 번쩍 뜨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바늘 가는 데 실이 없으면 이상하지 않은가. 당시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치약 중에는 쓸만한 게 없었다.

 단지 ‘콜게이트’라는 상표의 미제 치약만이 독보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건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걸고 꼭 만들어야 한다.”

 구인회 회장은 결심을 굳혔다. 그는 콜게이트에 버금가는 품질의 치약을 만들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아무런 지식도 없으면서 어떻게 미제와 맞먹는 치약을 만든단 말인가. 락희화학의 연구진들은 치약 개발에 돌입했다.

 그러나 도무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구인회의 장남 구자경만이 겨우 치약을 담을 튜브 제조 기술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구인회 회장은 어쩔 수 없이 당시 지배인 역할을 맡고 있던 동생 구평회에게 직접 미국의 콜게이트 치약의 제조 기술을 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구평회는 즉시 미국으로 날아갔으나 미국에서 쉽사리 치약 제조 기술을 내놓을 리 만무했다.

 결국 구평회는 콜게이트 사의 주변 회사를 통해 콜게이트 치약의 제조 기술을 알아내는 데 극적으로 성공하였다.

 구평회가 보낸 제조법을 보고 그대로 만들어 보기를 수차례! 여러 번의 실패 끝에 드디어 콜게이트 치약과 거의 같은 품질의 치약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구인회는 어렵게 만든 치약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미제를 베낀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래 갖고는 경쟁력이 없습니다. 우리 입맛에 맞는 치약! 김치 먹는 한국 사람 입맛에 맞는 치약을 만들어야지요.”

 단순하지만 깊은 통찰이 담긴 말이었다. 미제 치약이 아무리 좋다지만 치즈를 먹는 서양인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져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치즈가 아니라 김치를 먹는다. 따라서 치약도 김치를 먹는 우리나라 사람 입맛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향료가 중요한 요소였다. 우리나라 사람 입맛에 맞는 향은 어떤 것일까? 너무 강하지도 너무 연하지도 않은 향! 그것을 찾아내야 했다. 연구진은 여러 가지 연구를 거듭한 끝에 우리나라 사람의 입맛에 가장 맞는 향은 ‘스피아민트(박하향의 한 종류)’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최초의 ‘럭키치약’이 탄생하였다.

 <미제 치약을 넘어라>

 “국산 치약은 사람들이 싫어해서 안됩니다.”

 어렵게 개발한 럭키치약을 들고 판매에 나섰으나 치약 판매 상인들이 오히려 반대하며 나섰다. 그동안 국산 치약의 품질이 워낙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괜히 가게에 잘못 놨다가는 자기 가게의 이미지만 나빠질 것이라고 했다.

 “이것 참, 사람들 인식이 이래 갖고서는 팔기가 쉽지 않겠는데….”

 이에 구인회 회장은 구멍가게에 외상으로 물건을 대주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영업을 하였다. 그래도 판매가 잘되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미 미제 치약을 친근하게 여겼다. 이제 뭔가 돌파구를 마련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몰렸다.

 그러던 중 장남 구자경이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며 구인회 회장을 찾아왔다.

 “이번에 창경원(창경궁의 옛날 이름)에서 광복 10주년 기념행사를 크게 연다고 합니다. 아마 10만 명 정도는 올 것 같은데…. 거기서 우리 럭키치약을 무료로 뿌리는 게 어떨까요? 한번 써보라고들 말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 같아요.”

 구인회 회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럭키치약의 품질에는 자신이 있었고 따라서 사람들이 한번 써보기만 한다면 모두가 럭키치약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라고요? 라디오?>

 “이제 돈 찍어내는 기계도 소용이 없어졌겠는걸.”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구인회 회장이 외국에서 들여온 사출성형기를 사람들은 ‘돈 찍어내는 기계’라고 불렀다. 그만큼 마진(Margin, 물건을 판돈에서 들어간 돈을 뺀 차액)을 많이 남길 수 있는 기계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0원어치의 원료를 넣어 플라스틱 제품을 찍어내면 400∼500원에 팔릴 정도였으니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소문이 나면서 여기저기 경쟁 업체들이 많이 생겼다. 당연히 서로 가격 경쟁이 붙었고 제품 가격은 상당 수준까지 낮아졌다. 더 이상 플라스틱 사업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새로운 대책이 필요했다. 구인회 회장의 고민은 다시 시작됐다.

 ‘아! 앞으로 뭐 가지고 먹고 살아야 하나?’

 구인회 회장의 머릿속에는 늘 이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이제 락희화학은 공채 사원을 뽑을 만큼 큰 기업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팔리는 플라스틱 제품의 절반 이상을 락희화학에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장한 기업의 사장인 구인회 회장은 언제나 직원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까 걱정하며 대책을 세워야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더 이상 발전이 없다.’

 구인회 회장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반도호텔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섰다. 사무실에서는 은은하고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악에 매료된 듯 윤욱현 기획실장이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구인회 회장의 눈에 음악이 흘러나오는 기계가 들어왔다. 무척이나 신기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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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리 좋습니까?”

 그제야 사장이 들어온 사실을 안 윤 실장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괜히 뒷머리만 긁어댔다.

 “하하, 이게 물건입니다. 하이파이 전축이라는 건데, 마치 눈앞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것 같지 뭡니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언제나처럼 구인회 회장의 마음에 강렬한 느낌이 지나갔다. 그것은 럭키크림 사업을 결정할 때와 럭키치약 사업을 결정할 때, 또 플라스틱 제품 사업을 결정할 때 지나갔던 느낌과 매우 비슷했다.

 “그래! 우리가 저걸 한번 만들어 보자!”

 갑작스러운 구인회 회장의 말에 윤욱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표정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말했다.

 “꼭 이 사업을 하고 싶으시다면, 먼저 라디오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뭐라고요? 라디오요?”

 <반대를 무릅쓰고 탄생한 국내 최초의 라디오>

 구인회 회장은 결정도 빨랐지만 한번 결정하고 나면 불도저 같이 추진했다. 당장 라디오 사업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라디오나 전축을 만드는 일은 전자공업에 속합니다.”

 윤욱현의 말에 구인회의 머리는 바람개비처럼 빠르게 돌아갔다. 언젠가 일본 정부에서 발행한 책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면 유망한 사업이 아닙니까?”

 “네, 그렇긴 합니다만….”  

 “하지만 뭐가 문제인가요?”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전자공업에 손을 댄 기업이 없어서…. 워낙 어려운 기술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구인회 회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다면 더더욱 잘됐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해야지요. 우리가 개척자가 돼야지요!”

 하지만 구인회 회장의 계획은 곧 커다란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락희화학의 임원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었다. 너무 많은 돈이 필요하고 설사 만든다고 해도 최신형 미제 라디오와 도저히 경쟁할 수도 없다는 게 이유였다.

 “화학이나 잘합시다!”  

 임원들이 한결같이 이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구인회 회장이 무모한 일을 벌이려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구인회 회장은 전자공업 사업이야말로 미래의 희망이라는 확신을 지울 수 없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발전하면 어떤 집이든지 라디오 한 대씩은 다 있게 될 거야!”

 이렇게 굳은 구인회 회장의 의지 앞에 반대하던 임원들도 마침내 마음을 돌렸다. 이후 모두가 마음을 합하여 전자공업 사업 계획을 척척 추진해갔다. 그렇게 하여 ‘금성사’가 탄생했다.

 구인회 회장은 당장 선진국의 전자공업 산업을 알아보기 위해 홍콩과 유럽, 미국, 일본 등의 나라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약 100일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였어!”

 선진국을 다 돌아보고 온 구인회 회장의 진심 어린 소감이었다. 구인회 회장의 가슴은 더욱 크게 뛰고 있었다.

 이후 금성사는 최초의 국산 라디오 생산에 박차를 가하였고 1959년 11월, 드디어 제1호 국산 라디오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제1호 국산 라디오의 이름은 ‘A-501’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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