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흙더미 잇는 지지 '와이어'도 없이 철거
경찰, 불법 하청 시공사 대표·굴착기 기사 진술 확보
공법·공정·안전대책 미흡 등 붕괴요인 정밀 분석 중
[광주=뉴시스] 변재훈 기자 = 사상자 17명을 낸 광주 재개발 붕괴 참사와 관련, 흙더미 위에 올라 건물로 진입해 철거 작업을 하려던 굴착기가 앞으로 무게 중심이 쏠린 직후 무너졌다는 진술이 나왔다.
또 붕괴 당일 앞편 구조물만 남은 건물을 지탱하는 장치인 '와이어'가 설치되지 않은 상황에서 철거를 강행했다는 정황도 드러나 경찰이 붕괴 원인 규명에 속도를 낸다.
광주경찰청 수사본부는 지난 9일 동구 학동 재개발 정비 4구역 5층 건물 해체 작업에 참여한 굴착기 기사 A(철거업체 백솔 대표)씨로부터 이 같은 진술을 확보했다고 14일 밝혔다.
A씨는 경찰에 '3층 높이로 쌓은 흙더미 위에 올라 건물을 철거하려는데 굴착기 팔이 5층까지 닿지 않아 천장을 허물 수 없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흙더미가 흘러내리며 굴착기도 앞으로 쏠렸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붕괴 당일 2배 가량 많은 먼지 발생 방지용 살수 조치로 물을 머금은 흙더미가 약해진 상태에서 굴착기 무게(약 30t)가 가중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흙더미가 흘러내리면서 위에 놓인 굴착기도 함께 앞으로 쏠렸고, 건물 앞면·측면 벽체·층별 일부 천장에 외력으로 작용했
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또 철거 과정서 골조가 약해진 건물을 지탱하고자 건물·흙더미를 결박하는 와이어(강철 철사 여러 가닥을 합쳐 꼬아 만든 줄)도 참사 당일 작업 중엔 없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참고인 조사를 통해 붕괴 당일 이러한 정황을 포착했다.
일각에서는 와이어가 참사 전날인 8일까지만 하더라도 설치됐다가 끊어졌으나, 보강 조처 없이 철거를 강행했다는 의혹도 제기한다.
현재 제기된 붕괴 요인은 ▲수직·수평 하중을 고려하지 않은 공법(흙더미 활용 하향식 압쇄 방식) ▲작업 절차를 무시한 철거 방식(후면·저층부터 압쇄) ▲와이어 미설치 등 건물 지탱 부실 ▲과도한 살수 ▲굴착기 무게 ▲흙더미 유실 등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붕괴로 이어졌을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다만 경찰은 붕괴 원인을 단정하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요인 간 인과관계를 면밀히 따지고 있다.
특히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내용과 국토교통부 중앙건축물사고조사위원회 조사 결과 등을 충분히 검토해 사고 원인을 규명한다는 방침이다.
경찰은 불법 재하도급에 대한 수사도 이어가고 있다.
불법 다단계 재하도급을 통해 철거(해체) 허가를 받은 한솔기업㈜이 아닌 지역 신생업체 백솔이 계획서상 작업 절차를 무시, 철거를 무리하게 강행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석면(지정 폐기물) 철거 공사는 다원이앤씨가 수주해 백솔에 재하청을 맡겼고, 신생업체 백솔은 석면 해체 면허를 타 업체에서 빌려 무자격 철거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불법 하청 구조가 업체 간 지분 쪼개기, 이면 계약 등을 통해 이뤄졌다는 점도 수사 중이다. 또 다른 업체가 깊이 연루됐다는 의혹도 살펴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관계자 진술·압수수색 확보 자료·현장 감식 결과 등을 두루 살펴보고 있다"며 "정확한 붕괴 경위는 단정 지을 수 없고, 전문가 감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 9일 오후 광주 동구 학동 4구역 재개발사업 철거 현장에서 무너진 5층 건물이 승강장에 정차 중인 시내버스를 덮치면서 9명이 숨지고, 8명이 크게 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