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명 : 1만명의 결투'…64년만에 명예회복 '내평지서 전투'

기사등록 2014/06/26 07:00:00

최종수정 2016/12/28 12:58:02

【춘천=뉴시스】박혜미 기자 = 1950년 6·25전쟁 당시 북한군 1개 사단 1만여명에 맞서 경찰관 및 대한청년단 단원 15명이 1시간이 넘게 교전을 벌이다 9명이 희생된 춘천 내평리 춘천경찰서 내평지서의 모습. 2014.06.25. (사진=강원지방경찰청 제공)   photo@newsis.com
【춘천=뉴시스】박혜미 기자 = 1950년 6·25전쟁 당시 북한군 1개 사단 1만여명에 맞서 경찰관 및 대한청년단 단원 15명이 1시간이 넘게 교전을 벌이다 9명이 희생된 춘천 내평리 춘천경찰서 내평지서의 모습. 2014.06.25. (사진=강원지방경찰청 제공)  [email protected]
【춘천=뉴시스】박혜미 기자 = 지난달 30일 국가보훈처가 6월의 전쟁영웅으로 군인 신분이 아닌 경찰로는 처음으로 노종해 경감을 선정하면서 6·25 춘천 내평지서 전투가 뒤늦게 주목을 받고 있다.

 춘천내평지서 전투는 6·25 전쟁 당시 우리 국군의 소양강 방어선 구축에 크게 기여한 경찰관 및 청년단원들의 결사 항전이다.

 1950년 6월25일 북한군 2군단이 춘천으로 진격하며 점령에 나서자 국군 제6사단이 춘천 옥산포에서 북한군 제2군단 제2사단을 격퇴하자 북한군은 인제로 투입됐던 7사단을 양구와 춘천으로 투입했다.

 당시 양구에서 춘천으로 가는 46번 도로 내평리 마을은 북한군이 춘천시내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내평리 마을 한복판에 위치한 내평지서에는 당시 지서장인 노종해 경위(전사 후 경감 추서)를 비롯해 설창길·김석진 경사(전사후 각각 경위 추서), 김삼봉·배영섭·심윤흠·이봉춘·최성환·최인철 순경(전사 후 각각 경사 추서)등 12명의 경찰관과 대한청년단 단원 3명이 있었다.

 전투 당일 내평지서는 통신이 끊겨 고립된 상태였으며 이들 15명은 내평지서로 몰려오는 1만여명이 넘는 북한군 7사단에 맞서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약 1시간이 넘게 이어진 전투에 북한군은 82㎜ 박격포까지 동원했고 결국 내평지서는 완전 폐허가 됐다. 결국 노종해 경위를 비롯한 경찰관 9명과 대한청년단 단원 3명이 전사했다.

 하지만 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 북한군의 춘천 진격을 늦춘 덕에 국군 제6사단은 소양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고 북한군을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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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뉴시스】박혜미 기자 = 6·25 춘천 내평지서 전투 영웅인 내평지서 지서장 노종해 경위(전사 후 경감 추서) 2014.06.25. (사진=강원지방경찰청 제공)  [email protected]
 후에 당시 참전했던 참전용사는 "당시 경찰들이 시간을 벌어준 덕에 군이 저항선을 확보할 수 있어 북한군을 막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춘천전투는 6·25 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 대구 다부동 전투와 함께 3대 대첩으로 꼽히는 전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종전 후 매년 6·25 춘천대첩 전승기념 행사를 열면서도 춘천전투의 승리를 이끌어낸 춘천경찰서 내평지서전투는 잊혀져갔고 내평리 교전지역이 소양강댐 건설로 수몰돼 사라지면서 내평지서 전투 전사자들도 함께 잊혀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 2011년 '강원 6․25참전경찰 국가유공자회'가 각종 문헌에 남아있는 전투기록과 증언 등을 모아 경찰청, 국가보훈처에 내평지서 전사자 추모사업을 꾸준히 건의해 지난 2012년부터 경찰청은 전사·순직경찰관을 '이달의 추모경찰'로 선정해 추모하기 시작했다.

 강원경찰 관계자는 "올해 6월의 전쟁영웅으로 군인이 아닌 경찰이 선정된 것은 처음인데 이는 정부가 내평지서 전투의 가치를 인정하고 재조명했다는 것"이라며 "무엇보다 큰 의미가 있으며 자랑스럽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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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명 : 1만명의 결투'…64년만에 명예회복 '내평지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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