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리 전투의 프랑스 대대·한국군 중대 집중조명 국제심포지엄
중장에서 대령 자진 강등 참전한 몽클라르 대대장의 아들 증언
한국군 이끈 중대장 구필 대위, 단장의 능선 전투서 30세로 전사
![[서울=뉴시스] 지난해 6월 25일 경기도 양평군 양평도서관 물빛극장에서 개최된 6‧25 전쟁 75주년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참석한 전문가들이 종합토론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미군 제2사단 제8군 역사담당관 윌리엄 마이클 알렉산더 예비역 대령, 중국 화둥사범대학 션즈화 교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박동찬 선임연구원, 국가전략연구원 양영조 연구원.(사진제공 양평군청) 2026.10.26.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1.newsis.com/2025/06/27/NISI20250627_0001878564_web.jpg?rnd=20250627124721)
[서울=뉴시스] 지난해 6월 25일 경기도 양평군 양평도서관 물빛극장에서 개최된 6‧25 전쟁 75주년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참석한 전문가들이 종합토론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미군 제2사단 제8군 역사담당관 윌리엄 마이클 알렉산더 예비역 대령, 중국 화둥사범대학 션즈화 교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박동찬 선임연구원, 국가전략연구원 양영조 연구원.(사진제공 양평군청) 2026.10.26.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구자룡 기자 = ‘북한인민군을 밀어낸 것이 더글러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었다면, 중공군 4개 사단의 공세를 꺾은 것은 프랑스군 랄프 몽클라르 중령이 활약한 양평 지평리전투였다.’
6·25 전쟁 3년여 동안 공산군측 공세를 막아내고 전세를 뒤집은 대표적인 전투 중 인천상륙작전은 북한인민군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 전투에 막힌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보급로와 퇴로가 차단되자 일패도지(一敗塗地) 밀려 올라갔다.
중공군 기세 뒤집고 휴전협정 전환 계기된 지평리 전투
인해전술을 앞세우고 밤에는 피리를 불며 밀물처럼 내려오는 중공군의 기세에 눌린 가운데 전황을 뒤집는 서막을 연 전투가 1951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에서 치러진 ‘지평리 전투’였다.
미군에서는 성공적인 ‘고립 방어(적에 포위된 상황에서도 버티며 방어)’ 전투의 사례로 연구될 만큼 전술사적 의미도 크다.
북한인민군 보다 '강적'이었던 중공군을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격퇴한 전과와 의미 비하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경기 양평군이 올해 한-프랑스 수교 140주년을 맞아 29일 갖는 제2회 양평국제학술심포지엄은 지평리 전투에 참가한 프랑스 대대와 프랑스 대대에 배속된 한국군 중대를 집중 조명한다.
지난해 6월 첫 심포지엄이 6·25에서 지평리 전투가 갖는 의미를 분석했다면 올해는 프랑스 대대의 역할과 지휘관 등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지평리 전투에서 유엔군측에서는 미군 2사단 23연대가 투입됐다. 이 연대에는 프랑스 1개 대대가 배속됐고, 한국군은 1개 중대 규모가 프랑스 대대에 참여해 지평리 전투는 한국·프랑스·미국의 3개국 혼성 부대가 싸웠다.
중공군은 115사단, 119사단, 120사단, 126사단 등이 사방을 에워싸고 인해전술을 펼쳤다.
지난해 행사에서는 지평리 전투가 6·25 전쟁이 휴전협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 한국·미국·중국·프랑스 전문가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특히 중국측 전문가인 화둥사범대학 역사학과 션즈화(沈志華) 종신교수는 지평리 전투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 이래 엄중한 타격을 입었던 첫 번째 전투로 기록된다고 평가했다.
선 교수는 지평리 전투에서 중국은 전술적인 면에서 적군을 얕잡아보는 과오를 범했다고 말했다.
![[서울=뉴시스] 프랑스 대대에 배속된 한국군 중대의 병사들이 1952년 10월 철원 화살머리 고지에서 촬영한 것. 수집가 장 미셸 베송의 컬렉션에 있는 것으로 유엔 프랑스 한국전쟁 참전협회가 소장하고 있다. 앳된 10대 소년같은 이들이 지평리 전투에도 투입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사진제공: 국민대 몽클라르 한국전쟁 연구센터) 2026.10.26.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1.newsis.com/2026/10/24/NISI20261024_0002272772_web.jpg?rnd=20261024125830)
[서울=뉴시스] 프랑스 대대에 배속된 한국군 중대의 병사들이 1952년 10월 철원 화살머리 고지에서 촬영한 것. 수집가 장 미셸 베송의 컬렉션에 있는 것으로 유엔 프랑스 한국전쟁 참전협회가 소장하고 있다. 앳된 10대 소년같은 이들이 지평리 전투에도 투입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사진제공: 국민대 몽클라르 한국전쟁 연구센터) 202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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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임시정부도 프랑스 조계에 자리한 한불 수교 140년
근대 이후 한국으로의 서구 문화 유입의 상당 부분은 프랑스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서구 한국학 형성의 출발은 프랑스 학계라는 평가가 있다고 심포지엄 주최측은 양국 관계의 오랜 인연을 설명했다.
특히 일제시대 상해임시정부는 프랑스 조계지(租界地·외국이 자국민의 거주·통상 등을 위해 일정한 지역을 확보하고, 행정·경찰 등에서 특별한 권한을 행사하던 구역)에 자리를 잡아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이어 프랑스의 한국전쟁 참전을 통해 양국은 혈맹이 됐다.
한국전쟁을 통해 맺어진 우정의 역사는 최근 양국 정상 차원에서도 깊이 기억됐다.
4월 국빈 방한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평리 전투에 참전한 프랑스대대 출신 이병선 용사를 가장 먼저 접견하며 예우를 표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9월 프랑스 국빈 방문시 개선문에서 지평리 전투 참전용사들을 만나 깊은 감사를 전했다.
‘양평에서 세계로: 지평리 전투와 한·불 140년의 우정’을 주제로 한 올해 심포지엄은 양평군과 국민대 몽클라르 한국전쟁 연구센터가 행사를 주관하고 국가보훈부, 주한프랑스대사관, 유엔 프랑스 한국전쟁 참전협회가 후원한다.
![[양평=뉴시스] 지난해 11월 29일 경기 양평군 지평면에서 제막한 UN프랑스부대 소속 한국군 참전기념비. 한반도 모양이 프랑스 파리 퐁마리 프랑스대대 참전기념비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2025.11.30.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1.newsis.com/2025/11/30/NISI20251130_0002006078_web.jpg?rnd=20251130083001)
[양평=뉴시스] 지난해 11월 29일 경기 양평군 지평면에서 제막한 UN프랑스부대 소속 한국군 참전기념비. 한반도 모양이 프랑스 파리 퐁마리 프랑스대대 참전기념비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2025.11.30. *재판매 및 DB 금지
중장에서 대령으로 자진 강등해 참전한 몽클라르
프랑스대대는 지평리 전투에서 가장 평탄하고 중공군에 노출된 구역에 배치됐다.
퀴피세트는 악조건 속에서도 프랑스군의 투지, 중공군을 두려워하지 않은 태도, 항공 지원등과 함께 몽클라르 장군의 지휘력이 전투 승리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분석했다.
몽클라르는 대령이 지휘하는 대대장이었으나 한국에 올 당시 이미 1차 대전에도 참전한 별 셋의 중장이었다. 한국전 참전을 위해 스스로 계급을 강등했다.
1차 대전에서 알자스 전선과 고다 전투 등에 참여한 경험, 전쟁 중 부상 회복기마다 읽은 아르당 뒤 피크의 저서 ‘전투 연구’ 등이 그가 리더십을 발휘하는 바탕이 됐다고 퀴피세트는 소개한다.
몽클라르 장군의 아들 롤랑 몽클라르도 이번 심포지엄에서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주제로 한국군을 진정한 전우로 대했던 부친의 모습을 증언한다.
![[서울=뉴시스] 유엔군의 지평리 전투를 이끈 미군 2사단 23연대 소속 프랑스 대대의 한국군 중대 중대장 로베르 구필 대위.(출처: 국가보훈부) 20226.10.26.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1.newsis.com/2026/10/24/NISI20261024_0002272774_web.jpg?rnd=20261024130207)
[서울=뉴시스] 유엔군의 지평리 전투를 이끈 미군 2사단 23연대 소속 프랑스 대대의 한국군 중대 중대장 로베르 구필 대위.(출처: 국가보훈부) 2022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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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부대 중대장였던 프랑스 장교 구필 대위
로자노 교수는 “작전상 필요로 한데 묶였던 프랑스군과 한국군이 쌍굴 터널과 지평리 전투 등을 거치며 어떻게 서로를 전우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분석했다.
특히 한국군 중대를 이끌다 전사한 로베르 구필 대위의 미공개 편지를 통해 그 과정을 실증적으로 추적했다.
구필 대위는 인도차이나에서 식민지 병사를 지휘한 경험이 있었지만 한반도에서는 주권국가의 병사를 지휘했다는 점에서 경험의 성격이 달랐다고 강조한다.
지평리 전투 승리 후 구필 대위는 “우리 중대가 프랑스 대대에서 가장 강력한 부대다”라고 평가했다.
구필 대위는 지평리 전투가 있었던 그해 9월 26일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전사해 30세로 짧은 생을 마쳤다. 같은 날 한국군 병사 상당수도 함께 숨을 거뒀다.
프랑스 생시르 사관학교는 209기 졸업생을 ‘구필대위 기수’로 부르며 피로 이어지는 6·25의 인연을 전하고 있다.
한국군 신원을 확인하고 공헌을 온전히 밝혀내는 일이 남은 숙제
양평군과 유엔프랑스 한국전쟁 참전협회, 국민대 몽클라르 한국전쟁 연구센터는 프랑스 대대 소속 한국군 병사 170여 명 가운데 130여 명의 명단을 발굴해 냈다.
이제 남은 분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공헌을 온전히 밝혀내는 일이 남은 숙제다.
지난해 11월에는 지평면 6·25 전쟁 프랑스대대 참전기념비 부지에 ‘UN 프랑스대대 소속 한국군 참전기념비’가 세워졌다.
양평군은 한국군이 프랑스대대의 일원으로 참전했음을 공식적으로 기록한 최초의 기념비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한국전쟁 당시 프랑스대대 소속 한국군의 역사’를 발표하는 알랭 나스 전 주한프랑스대사관 부국방무관은 “지평리·단장의 능선 전투 등 전적지의 위치를 되찾는 데 한국군 참전 병사들이 결정적인 증언을 남겼다”는 내용을 발표한다.
나스 전 무관은 한국군은 1951년 1월 3일(78명)과 지평리 전투 직전인 2월 11일(100명) 두 차례 배속됐으며 통역, 일선 전투, 들것 운반·의무보조, 지휘부 경계 임무 등의 임무를 맡았다고 밝혔다.
국민대 이근세 교수(몽클라르 한국전쟁 연구센터 센터장)는 발표문에서 “군번 없는 병사, 봉급을 받지 못한 병사, 어느 명부에도 오르지 않은 10대 소년들이 섞여 있던 이 소수 부대는 프랑스 병사들과 함께 조국을 지키려 싸웠다”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