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벽계수야'…황진이 시조에 매혹된 칠레 화가

기사등록 2026/06/04 09:09:20

세바스티안 에스페호, 선화랑서 한국 첫 개인전

황진이 시조에 영감을 받은 작품 'The moon and the river'. 사진=선화랑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황진이 시조에 영감을 받은 작품 'The moon and the river'. 사진=선화랑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16세기 조선의 시인 황진이의 시조 한 편이 지구 반대편 화가의 작업 세계를 바꿔놓았다.

칠레 출신의 런던 기반 화가 세바스티안 에스페호(Sebastián Espejo)가 선화랑에서 한국 첫 개인전 'Bright Moon'을 열고 황진이의 시조에서 영감을 얻은 신작 회화 18점을 선보인다.

흐르는 물에 빗대어 덧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노래한 시의 의미와 황진이의 기명인 '명월(明月)'에서 착안해 전시 제목도 직접 'Bright Moon'으로 지었다.

칠레에서 태어나 현재 런던에서 활동하는 에스페호는 문학에서 작업의 영감을 얻는 작가다. 문학 팟캐스트를 통해 우연히 접한 황진이의 시조에서 시간의 유한성과 반복, 그리고 달의 상징성을 발견했고 이를 자신의 회화 언어로 풀어냈다.

전시 대표작인 'The Moon and the River'(2024~2026)는 황진이의 시조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 작품이다. 작가는 한국 백자 달항아리와 분청의 질감, 중국 시인 이백(李白)의 달을 향한 시선까지 자신의 정물화 어휘 안으로 끌어들였다.

세바스티안 에스페호 *재판매 및 DB 금지
세바스티안 에스페호 *재판매 및 DB 금지


에스페호는 현재 국제 미술계가 주목하는 이머징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영국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지 2년 만에 주요 전시마다 완판을 기록했으며, 올해 5월 세계적 아트페어 프리즈 뉴욕(Frieze New York)에서도 출품작 전량이 판매됐다. 작품은 와일든스타인(Wildenstein), 중국 베이징의 X미술관(X Museum) 등 국제 컬렉션에 소장돼 있다.

에스페호의 회화는 캘리코 천과 나무, 캔버스 위에 유화와 왁스, 대리석 가루, 연필을 수년에 걸쳐 켜켜이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천천히 축적된 화면은 샤르댕(Chardin), 보나르(Bonnard), 모란디(Morandi)로 이어지는 유럽 정물화의 명상적 전통을 동시대 감각으로 계승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선화랑 에스페호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선화랑 에스페호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전시장 연출도 눈길을 끈다. 작가의 요청에 따라 작품 사이 조도를 낮추고 그림 위에만 빛이 떨어지도록 구성해 관람객이 마치 달빛 아래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경험을 하도록 했다. 1층에는 황진이의 시조에서 출발한 작품들이, 2층에는 영국과 프랑스, 일본 풍경에서 영감을 얻은 작업들이 전시된다.

선화랑은 "한국의 고전 문학이 칠레 출신 작가의 붓끝에서 새로운 그림으로 피어났다는 점이 이번 전시의 가장 큰 의미"라며 "한국 문화가 세계 미술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는 특별한 만남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 미술사학자 이안 로버트슨(Iain Robertson)은 전시 도록 서문에서 에스페호를 "순간들의 도둑(a burglar of moments)"이라고 표현했다. 덧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아 회화로 남기는 작가라는 의미다. 전시는 30일까지 열린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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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벽계수야'…황진이 시조에 매혹된 칠레 화가

기사등록 2026/06/04 09:09:20 최초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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