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수상 신작 개인전
공포영화 같은 레슬링 '스터디(Studies)전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환상은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제20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수상한 김희천 신작 개인전 '스터디(Studies)'영상이 존재론적 차원의 물음을 제기한다.
서울 도산대로 아뜰리에 에르메스 26일 개막하는 전시는 현실과 가상, 희망과 불확실성, 쾌락과 위험 사이를 무수히 오가는 우리의 존재를 드러낸다.
김희천은 동시대의 기술환경과 문화를 통찰하는 비범한 작업으로 평단의 지속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2015년부터 디지털 매체와 재현 장치들에 포섭된 동시대의 삶의 조건을 탐구해오고 있다.
작품의 특이점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생성한 휘발성 강한 이미지들을 다루면서도 그로부터 죽음과 같은 실존의 무게를 가늠한다는 점이다. 테크놀로지를 다루는 예술에 심도를 더했다는 평가다.
"‘데이터로 백업된 세계’에서 무한해 보이는 공간은 과거나 미래와 단절된 채 영원한 현재 속에 갇혀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은 김희천의 작업 전반에 ‘파국’의 정서가 드리우게 되는 이유가 된다. 기술 환경에 포획된 ‘매끈한 삶의 윤곽선’ 또한 작가에게는 무기력의 원천이다. "데이터 값에 의해 결과가 확정되는 미디어 환경에서 세계는 물론 작가 자신에 대한 서사의 발명은 점점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수상 후, 재단에서 지원해 준 파리 답사에서 '스터디'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습니다. 로댕미술관에서 안토니 곰리특별전과 로댕 미술관 상설전을 보게 되었고, 거기엔 로댕이 작품 제작 과정에서 연구하며 만든 스터디 모델과 곰리의 스터디 모델들이 완성된 작업들과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본 작품들보다 스터디 모델들에 더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스터디 모델 제작 과정에서 작가의 의도와 주요한 연구들이 더 강조되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전시를 보면서, 지금까지 제가 작업해 온 과정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번에 선보이는 신작 '스터디(2024)'는 공포 장르를 차용한 일종의 극영화로 작가가 제안하는 새로운 영상적 시도를 선보인다.
내용은 전국 대회를 앞 둔 고교 레슬링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모티브로 행방불명과 신체 변형, 기억과 데이터의 오류 등 인간 실존의 불안정함을 야기하는 공포를 다룬다.
상대 선수가 실종된 가운데 허공과 셰도우 레슬링에 몰두하는 선수들의 기이한 행동이나 죄책감 때문에 끔찍한 환상과 환청에 시달리는 코치의 심리상태는 암전이나 효과음 등 공포의 클리셰에 힘입어 장르적으로 완성된다.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찬종’은 고등학교 레슬링 부의 코치로 사흘 앞으로 다가온 KBS배 전국 레슬링 대회가 끝나면 자살하기로 결심한다. 당장 자신의 삶에서 사라질 것들에 대해 생각하던 중, 실제로 선수들 몇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한다. 부모 한 사람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선수를 기억할 수 없고, 훈련 녹화 비디오에는 그와 스파링 했다는 선수들이 상대 없이 허공에 셰도우 레슬링을 하는 기이한 모습만 찍혀 있다. 지금은 이들마저도 사라진 상태. 대회날을 밝아오고 일상은 지속되지만 공포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다가오고 찬종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겁에 질린 채로 그대로 맞이할 수밖에 없다…'
김희천은 이번 신작을 영화문법에 입각한 극영화의 형태로 완성해 공포의 전면화를 시도했다. 작가는 공포영화를 시도하는 것을 일종의 ‘스터디’로 규정했다. '스터디'란 완성 이전의 단계, 매끄러운 외피 아래 놓인 거칠거나 흐물거리는 단면의 단계를 은유한다.
안소연 아티스틱 디렉터는 "정의하거나 명명할 수 없어 좌절이나 불안과 맞닿아 있는 이 감정의 단계를 주목하는 것은 이성적 판단이나 완결성으로부터의 퇴행을 의미하기도 한다"면서 "김희천의 작업에서 자주 등장하는 마우스를 조작하는 손은 실재 감각의 최후의 보루로 지켜지곤 하는데, 이번 작품에서 상대 선수의 실종은 데이터 환경에 매몰되어 실재에 대한 감각을 최종적으로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이번 작품은 일련의 실종 사건들, 선수들의 행방불명이나 남아있는 선수들의 쉐도우 레슬링과 신체의 소멸 등을 주요 모티브로 삼아 구성됐다. 경쟁할 상대 선수가 사라진 경기가 실제 있었던 경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2020년 KBS배 전국 육상에서 한 선수가 너무도 뛰어나서 상대 선수들이 경기를 포기한 기사를 읽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찾아보니 2020년 KBS배 전국 유상대회의 여자고등부 1600m계주 결승전에 출전한 네 팀중, 3관왕에 도전하던 양예빈 선수가속한 용남고와 인일여고 두 팀만 출발대에 섰으며, 출발 4초 만에 인일여고 선수들도 속도를 줄여 기권해 용남고등학교 선수 홀로 뛴 것입니다. 2022년 여자대학부에서도 박다윤 선수가 속한 서울대팀 한 팀만 경기를 펼치는 일도 생겼습니다. 육상 관계자들은 육상은 기록을 재는 경기인데, 이를 너무 경쟁하는 경기로 생각해서 벌어진 안타까운 일이라고 분석하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레슬링은 상대가 없으면 혼자서 레슬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상대가 사라졌는데, 혼자 레슬링을 해야하는 상황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어떤 것일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현실과 환상 사이에는 틈새 공간인 ‘점근축(Paraxis)’이 존재한다. 때문에 일상과 허구, 현실과 가상, 또는 삶과 죽음, 선과 악의 경계는 언제나 전복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김희천이 발명한 '공포의 환상성'은 그 경계의 취약함에서 서사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는 창조의 시공간이 된다. 전시는 10월6일까지.
작가 김희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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