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과 달리 서양인 컬렉터 줄어
차분함 속 수십억 작품 판매 쏟아져
중국·싱가포르·필리핀·한국 ‘큰손' 부상
[홍콩=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미술은 마술이다. 환각과 중독의 세계에서 주머니를 털어간다. 기괴하고 못 알아볼수록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물론 브랜드가 확실해야 한다. 유명 갤러리와 유명 작가의 협업은 '큰손'들을 쉽게 유혹한다. '나중에 돈 된다'는 귓속말이 최대 자극제다.
'아트바젤 홍콩'이 여실히 증명했다. 지난 21~25일 4년 만에 대면으로 열린 행사는 묘하고 알 수 없는 이상한 작품들이 수십억 가격을 알리며 순식간에 거래가 이뤄졌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처음 정식 개최된 아시아 최대 미술 장터로, '미술시장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불안정한 국제적인 경기 침체 전망도 이곳에선 통하지 않았다.
아트바젤 홍콩 차분한 반면 판매는 강력
실제로 VIP 개막 첫날 부터 수십억 대 작품이 턱턱 팔려나갔다는 소리가 터졌다. 100만 달러 이상의 대표작들을 내놓은 메가 화랑들은 화려한 '홍콩의 밤'을 만끽했다. VIP 개막 이틑 날인 22일 전시장이 한산한 이유라고도 했다. (코로나로 억제된 중국 본토 큰손들이 스트레스를 '돈질'로 풀고 갔다는 뒷얘기도 나왔다.)
최고의 세일즈를 기록한 화랑 중 하나는 뉴욕 런던 홍콩 등에 진출한 LGDR이다. ‘NFT의 제왕’인 비플의 NFT 영상 설치 작품인 ‘S.2122’가 900만 달러(117억 원)에 판매됐는데, 중국 난징의 데지 미술관(Deji Art Museum)이 구매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갤러리는 파블로 피카소의 ‘Fillette au bére’는 550만달러(71억 원), 니콜라스 파티의 ‘Birds Fighting for Worms’는 280만달러(36억 원)에 팔았다.
화이트큐브는 안젤름 키퍼의 ‘Rapunzel’을 100만유로(14억 원)에 팔았다. 글래드스톤은 알렉스 카츠의 회화 2점을 각각 130만달러(17억원), 120만달러(15억6000만원)에 판매했다.
쿠사마 야요이, 마크 브래드포드, 앨리스 닐, 조지 콘도, 카즈오 시라가, 등 인기 작가들의 작품들은 줄줄이 팔려나갔다.
하우저앤워스는 조지 콘도의 ‘Purple Compression’을 475만달러(62억 원), 마크 브래드포드의 ‘A Straight Line’을 350만달러(45억 원), 로니 혼의 조각 ‘무제’를 175만달러(23억 원)에 팔아치웠다.
야요이 쿠사마는 동시대 미술시장 대세의 저력을 보였다. '노란 호박' 조각이 350만 달러(45억5000만원·오타 파인아츠 갤러리)에 팔린 데 이어 그 다음날 초록 호박이 600만 달러(78억 원·빅토리아 미로 갤러리)에 판매됐다. 현재 92세의 일본의 살아있는 전설인 쿠사마는 현재 홍콩을 대표하는 문화 명소 M+뮤지엄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루이비통과의 협업으로 명품부터 전시까지 '땡땡이 세상'을 만들고 있다. 쿠사마에 이어 이번 행사에서는 일본 1세대 행위예술가 카즈오 시라가(1924~2008)의 회화도 주목 받았는데, 1991년에 제작한 추상화가 500만 달러(65억 원)에 판매됐다. 캔버스에 붓이 아닌 몸을 뒹굴어 만든 붉은 피같은 그림이다.
전 세계 블루칩 작가의 수작이 쏟아져 나온 가운데 K아트도 선전했다. 특히 국제갤러리는 월등한 판매 실적을 보였다. 하종현의 대표작 ‘Conjunction 22-38’ 7억 원대, 이승조의 ‘Nucleus’ 4억 원대, 박서보의 신작 세라믹 묘법도 점당 2억5000만원, 최욱경의 ‘God Damn’을 1억 원대에 판매했다. 우고 론디노네와 제니 홀저도 2억 원대에 각각 팔았다.
이우환 작품은 외국화랑에서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파리 메누르 부스에 나온 이우환의 ‘대화’(2014)는 100만 유로(14억 원), 페이스에서는 100만 달러(13억 원)에 팔렸다. 조현화랑은 이배 대형 숯 회화 8점이 첫날 완판됐고, 학고재도 문을 열자마자 정영주의 판잣집 풍경화 4점을 모두 판매했다.
서구에서 아시아로 시장 재편 확연...중국 본토~한국 필리핀 등 아시아 큰손 부상
아트바젤 홍콩 마이크 호머 데이비드 코단스키 시니어 디렉터도 인정했다. 세계 32개국 177개 화랑이 참여, 지난해보다 47곳이 늘었지만 서구 쪽 중견 화랑들이 상당수 불참하면서 아트바젤 홍콩 위상이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VIP개막에도 여유롭게 진행되는 행사에서 참가 화랑들은 '홍콩의 중국화' 현상이 작용하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금융권의 '홍콩 엑소더스' 여파로 서양 컬렉터들이 보이지가 않는다"는 한 갤러리 관계자는 "이전 활기찼던 홍콩 경제가 예전 같지 않다고 느꼈다"고 했다.
이에 "홍콩은 정치적 불안과 코로나19라는 두 개의 병을 앓고 이제 나아졌다”고 에둘러 말했지만 파비오 로씨 홍콩 화랑협회장은 "정치적 불안감이 시장에 영향을 미친다고 직결할 순 없으나 여전히 불안감은 상존한다"고 전했다.
실제로 전시장엔 백인 등 서양인 보다는 중화권, 한국인 컬렉터들과 관계자들로 붐볐다. 갤러리 부스는 활기보다는 넓고 쾌적함이 돋보였다. 참가 화랑들은 "홍콩과 중국 본토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태국, 싱가포르, 방글라데시에서 온 새로운 고객과 만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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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바젤 홍콩 위상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분위기를 반전시킨 건 주변 박물관과 갤러리, 경매사들이다. 가고시안, 펠렘 갤러리등이 있는 패더빌딩과 하우저앤워스, 페이스, 데이비드 즈워너, 화이트스톤 갤러리 등이 몰려있는 'H Queen’s' 빌딩은 마크 브래드포드, 마이클 보레만스, 장샤오강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개인전을 열어 '아트바젤 홍콩 특수'를 누렸다.
특히 ‘M+뮤지엄’은 홍콩 문화의 체면을 살렸다. 런던 테이트모던을 설계한 건축가 헤르조그&드 뫼롱이 설계한 이 뮤지엄은 2021년 서구룡문화지구에 문을 열었지만 아트페어 기간인 지난 20일 ‘뮤지엄 나이트’를 통해 세계 미술계에 개관 신고를 했다. "홍콩을 중국의 문화중심 허브로 육성하겠다"는 홍콩 정책 기조로, 이 행사에 미술계 관계자만 2000여 명, 갈라 디너 참석자가 300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야요이 쿠사마 회고전이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다. 텀블러, 컵 등을 판매한 굿즈는 벌써 동이 났고 양말과 수첩도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새계적인 3대 옥션사도 대목을 누렸다. 중국 본토 등 슈퍼 컬렉터들의 방문에 맞춰 소더비, 크리스티, 필립스 등 3대 글로벌 옥션회사는 앞다퉈 명작들의 프리뷰를 펼쳤다.
크리스티는 5월 뉴욕 메이저 경매의 프리뷰를 홍콩 알렉산드라 하우스에서 열었다. 미국의 근현대미술 최고봉인 S.I.뉴하우스의 컬렉션과 지난해 단일 컬렉션 경매로는 사상 최대규모(1조 4000억원)를 기록한 폴 앨런 컬렉션을 동시에 선보였다. 뉴하우스는 지난 2019년 제프쿤스의 1996년 조각 ‘토끼(Rabbit)’를 크리스티 경매에 내 놓아 9017만 5000달러(1158억원)에 낙찰시켜 제프쿤스를 생존작가 중 가장 비싼 경매기록 보유 작가로 등극시킨 이력이 있다.
필립스도 서구룡지구 M+뮤지엄 바로 앞에 신사옥을 개관하고 세계 각국에서 온 컬렉터들을 맞았다. 나라 요시토모의 황금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시작가 130억 원)등을 비롯해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한화 57억~84억 원)등 오는 31일 여는 3월 메이저 경매에 나온 작품들을 선보여 북새통을 이뤘다.
홍콩, 예전같지 않다...'한국, 잠자는 거인' 아트바젤홍콩 위협
한 해외 갤러리의 지적처럼 홍콩은 이전과 달라졌다. 수십미터 줄을 서며 입장만 30분 넘게 걸리고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북적였던 4년 전과는 달라진 아트바젤 홍콩은 '한국이 덤벼 볼만 하다'는 자신감을 키우게 한다. '한국(키아프)과 싱가포르(아트 에스지)등이 아시아 최대 미술 시장인 홍콩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는 CNN의 보도도 나왔다. 중국의 홍콩 민주화 탄압 움직임과 함께 아트바젤 홍콩과 관련 위상이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시각과 함께 '잠자는 거인(sleeping giant)'으로 표현한 한국을 깨우고 있는 모양새다.
그럼에도 "아시아 미술시장의 중심지로 홍콩의 위상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높지만 프리즈와 함께 손잡은 키아프(KIAF)는 아트바젤 홍콩에 위협 요인이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속에서도 지난해 프리즈 키아프는 매출 1조 원을 돌파하며 깜짝 기록을 세웠다.
특히 아시아 시장 큰 손으로 부상한 한국의 MZ 컬렉터들의 위상은 증명됐다. 올해 아트바젤 홍콩도 곳곳에서 한국어가 들리며 한국 방문객이 넘쳐났다. ‘홍콩시 서울구’로 불렸던 이전처럼 '프리즈에 눈뜬' 한국인들은 "와서 보니 홍콩이 별거 아니다"라는 반응이다. 일상에서 문화를 향유하는 미술 애호가들이 탄탄하게 자리매김했다는 증거다.
홍콩이 아시아 미술시장의 거점으로 떠오른 건 '면세의 힘'이다. 미술품 수출입에 세금을 매기지 않고 미국 달러와 홍콩 달러 가치를 연동하는 달러 페그제를 채택하고 있는 덕분이다. 우리나라도 미술품 관세만 풀린다면, "아시아에서 다른 경쟁지는 없다'는 세계적인 옥션사들의 단언도 흔들릴 전망이다.
"이대로라면 승산 있다." 오는 9월 열릴 프리즈서울+키아프가 더욱 기대감을 낳고 있다. 아트페어는 국가 전략산업이다. '홍콩을 중국의 문화중심 허브로 육성하겠다'는 홍콩 정부 정책 기조처럼, 우리 정부의 적극 지원이 필요하다. 단 5일간 세계에서 온 10만 여명이 1조원을 쏟아낼 수 있다. 교통과 언어의 문제가 있지만, K팝 K관광 K먹방 K뷰티 등 K콘텐츠 대세가 뒷심이다. 아트바젤이 홍콩의 토종 아트페어를 먹어치우고 자랐다면, 키아프는 독자적으로 승승장구세다. 프리즈 서울에 안방을 내줬다는 비판도 있지만, 키아프는 자생력을 갖춰 올해 첫 인도네시아로 진출한다. 아시아 미술시장의 판도와 주도권을 두고 한국이 아트바젤 홍콩을 넘볼 줄은 4년 전만 해도 예정에 없던 일이다. 물론 그 사이 아트바젤은 47년 역사의 '피악'도 파리에서 퇴출시켰다. 세상에 독주는 없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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