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랏말싸미’ 감독, 치명적 왜곡에는 침묵

기사등록 2019/07/29 14:57:45

신미가 천장의 서까래를 보고 영감을 얻는 장면. ‘창문틀’을 본떠 만든 것이 훈민정음이라는 일제의 궤변과 상통한다.
신미가 천장의 서까래를 보고 영감을 얻는 장면. ‘창문틀’을 본떠 만든 것이 훈민정음이라는 일제의 궤변과 상통한다.
【서울=뉴시스】신동립 기자 = 역사날조 영화 ‘나랏말싸미’를 연출한 조철현 감독이 개봉 6일 만인 29일 입장문을 내놨다. 결코 세종대왕을 폄훼하고자 한 것이 아니고 백성을 위해 처절하게 고민한 세종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리고자 했다는 요지다.

“진심을 전달하고자 하는 소통과 노력의 부족으로 이런 점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던 점을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라면서도 역사왜곡을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상영 시작일인 7월24일 뉴시스 보도 <세종대왕과 훈민정음을 모욕한 영화 ‘나랏말싸미’>로 처음 밝혀진 역사조작의 결정적 증거인 다음 사실에는 입을 다물었다.

‘조선왕조실록’ 문종 즉위년 경오(1450) 4월6일(기묘) 

임금이 영의정 하연, 좌의정 황보인, 우의정 남지, 좌찬성 박종우, 우찬성 김종서, 좌참찬 정분, 우참찬 정갑손을 불러 도승지 이사철에게 명령해 의논케 하기를, “대행왕(大行王; 세종대왕)께서 병인년(1446; 훈민정음 반포년도)부터 비로소 신미의 이름을 들으셨는데, 금년(1450)에는 효령대군의 사제(私第)로 옮겨 거처해 정근(精勤)할 때 불러 보시고 우대하신 것은 경들이 아는 바이다.”

‘훈민정음’이 계해년(1443)에 창제된 것은 역사의 팩트다. 세종의 아들인 문종의 위 증언에 따르면, 세종이 신미라는 이름을 들은 해는 1446년, 접견한 해는 1450년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왜곡하지 않고 훈민정음 창제에 신미가 끼어들기란 불가능하다. ‘나랏말싸미’가 역사왜곡 영화인 이유다.

신미대사 훈민정음 창제설의 근거라는 ‘원각선종석보’가 허위임을 2016년 논증한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은 “조철현 감독은 6월25일 제작보고회에서 이송원 작가하고 1개월 이상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봤다고 했다. 오늘 입장문에서도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말을 수차례 언급했다. 자신이 강조하는 ‘우국이세’라는 말 또한 문종실록 1450년 7월6일에 나오는 말이다. 이로 보아 ‘세종이 신미라는 이름을 1446년에 처음으로 들었다’는 문종실록 1450년 4월6일의 기록 또한 분명 봤을 것이다. 신미가 훈민정음을 만들었고 극중에서 ‘사냥이 끝난 사냥개의 처지가 이런 것이로군’하며, 신미의 저작권을 세종이 탈취한 것으로 묘사해 세종을 두 번 억울케 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그 사실을 고의적으로 뺐다. 이에 대해 조 감독은 진심으로 사죄해야 하며, 일제 때의 ‘창문틀’설과 유사한 ‘서까래’를 보여주며 훈민정음 창제과정 또한 왜곡시킨 영화를 해외에 상영해 국격을 훼손시키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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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2019/07/29 14:57:45 최초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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