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생들 받았다가 지금은 직원화…새로 회사 만들려
문하생 시절 성취 향한 갈증 심해 이기적이었던 기억
연습해야 하는데 자꾸 심부름 시켜 화투판 엎은 일도
보증금 200만원 빼 오토바이 사…진짜 미쳤었나 싶다
아이 태어나며 창작 동력이던 '분노' 일순간에 사라져
<야후> 연재 때였는데 주인공이 싫어질 정도 슬럼프
<이끼>에 가장 애착…대사가 신들린 듯 나오는 경험
제일 애착 가는 캐릭터는 장그래…최초의 긍정적 이름
대사를 쓸 때 가장 염두에 두는 점은 쉽게 쓰자는 것
종이에 몇 번씩 쓰면서 최대한 쉬운 일상 용어로 바꿔
허영만 선생님 떠올리면 '나는 아직 시원찮은데' 긴장
조운학 선생님에겐 데생 습득…만화가 근력 만들어줘
후배 작가 중엔 <닥터 프로스트> 이종범 작가 좋아해
= 지 – 문하생으로 계시다가 지금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마지막 세대로 볼 수 있지 않나요?
윤 – 그렇죠. 제가 끝물이죠.
지 – 지금도 작가님은 문하생 시스템인가요? 많은 작가들이 어시스트와 같이 일하는데, 조금 다르잖아요.
윤 – 처음에는 문하생으로 받았다가 지금은 직원화했죠. 지금 새로 회사를 만들려고 하고 있는데요. 그 회사로 문하생들을 아예 정식 직원으로 다 포함시킬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지 – 배워서 자기 작품을 하고 싶은 분도 있고, 평생 조력자로 있고 싶어하는 분도 있을 수 있잖아요.
윤 – 그건 그 분의 판단이니까요.
지 - 그럴 경우에는 대하는 방식이 다를 수 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윤 - 방식은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지 – 문하생으로 계실 때, 나중에는 다 친해지셨지만, 처음에는 데뷔하고 싶은 욕망이 강하셔서 트러블도 좀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화투판을 엎기도 하셨고.(웃음)
윤 – 그 분들이 모욕스러워하실 것 같아서 말하기는 좀 그런데요. 문하생 때는 정말 정말 이기적이었죠. 성취에 대한 갈증이 너무 심해가지고, 정말 이기적이었죠.
지 – 만화를 같이 하시는 분들은 동료의식도 있고 그래서 지나고 나서는 친해지셨잖아요.
윤 – 그렇죠. 그 뒤에는 다들 친하게 지내긴 했는데, 그래도 역시 저는 이기적이었어요. 문하생 때. 굉장히 이기적이었죠. 그래서 미안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죠.
지 – 예술가는 대체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부분이 있는데요. 지금 윤태호 작가 이미지를 생각하면 상상이 안 되는 부분이 있거든요. 젊었을 때 에피소드 중 하나가 어머니가 집을 넓히라고 돈을 줬는데, 그걸로 오토바이를 사셨다면서요.(웃음)
윤 - 보증금 200만원을 빼가지고 오토바이를 샀었죠.(웃음)
지 - 그때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너 진짜 나쁜 놈이다"라고 가셨다면서요.(웃음)
윤 – 어머니가 올라오시자마자, 그 사실을 아시자마자 바로 내려가셨죠. 진짜 죄송했어요. 가정 형편이 좋지도 않았을땐데, 진짜 미쳤던 것 같아요.(웃음)
지 – 만화 <아키라>에 꽂혀서 오토바이를 사신 건가요?(웃음)
윤 – 그런 건 아니구요. 그때는 쓸데없이 오토바이 잡지를 사서 맨날 보고 그랬어요. 괜히. 지금 생각하면 진짜 미쳤었죠.(웃음)
지 - 오늘 얘기가 너무 재밌네요.(웃음)
윤 - 그것도 있었고, 일단 화실 일을 거의 안 했죠. 문하생 때. 허 선생님 화실을 그만 두고 조운학 선생님 화실로 옮겨가서는 화실 일을 해서 한 달 제 생활비 필요한만큼만 벌고 나머지는 제 원고 연습하는 시간으로 보냈죠. 화실 선생님이 진짜 심하게 화를 내신 적도 있어요. 화실이 너를 위해서 있는 거냐, 하기도 했구요. 화투판 엎은 일도 그래서 생겨난 거죠. 화실에서 저녁에 제 책상에서 연습하고 싶은데, 자꾸 심부름 시키시니까요.
지 – 어쨌든 그런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윤태호 작가가 있는 거잖아요.
윤 – 좋게 이야기를 하면 그런 거지만, 그래도 조금 무리한 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화실 선배님들하고도 부딪히고, 제 이기심 때문에.
지 – 지금의 태도나 그런 것을 보면 그런 것이 본성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어릴 때의 가난과 결핍에 대한 분노도 있으셨던 것 같구요. 빨리 뭔가 해보고 싶다는 욕망도 있으셨을 것 같구요.
윤 – 솔직히 지금도 그런 게 완전히 없지는 않은데요. 제가 하고 싶거나 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드라이브를 심하게 거는 편이에요. 그래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힘들어해요.
지 – 스티브 잡스처럼.(웃음)
윤 – 옆에 계신 분들이 민망하지 말라고 배려를 많이 해주시는데요. 저는 그걸 좀 당연히 여긴다거나, 아니면 뒤늦게 눈치 챈다거나 그런 일들이 많죠. 그래서 지나고 나서 항상 죄송한 기억이 많이 생겨요. 그럴 땐 되게 민망하죠.(웃음) 나이가 어리지 않다 보니까, 어렸을때는 '젊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이제는.... '제 아이도 열아홉살인데, 아직도 그러고 있다니' 라는 생각을 하면 아찔한 지점들이 많이 있죠.
지 – 아이들이 어릴 때 너무 귀여워서 아이들하고 지내느라 작품을 하기 힘들었다고 하셨는데요. 그 시기는 좀 지났다고도 하셨잖아요.(웃음)
윤 – 아이가 예뻐서라기보다는, 저는 육체적으로나 피부나 이런 부분들에서 좋은 것을 갖고 태어나지 못했거든요. 그런 스트레스가 보완되지 않고 계속 자라왔는데요. 결혼하고서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제 피부도 안 닮고 깨끗하게 태어나서요. 뭔가 그 전에 창작의 동력이라고 생각했던 분노나 이런 것들이 일순간에 그냥 사라져버린 거예요. 그래서 갑자기 매가리가 빠져버렸다고 해야 되나, 그게 <야후>를 연재할 때였는데요. 주인공이 굉장히 센 테러리스트가 되어야 하는데, 주인공이 싫어질 정도였죠. 그러면서 그때 슬럼프가 왔어요. 그리고 5년 넘게 연재한 주인공을 죽이면서 끝냈더니 아이를 키우는 사람 입장에서 또 대미지가 온거예요. 설명하기가 참 뭐한데요. 주인공 캐릭터에게 대사를 부여하고, 그 대사를 머리 속에서는 계속, 실제로 제가 상상을 하는 거잖아요. 그 대사에 대해서. 그리고 눈을 그리고 얼굴을 계속 그리다 보면, 5년쯤 지나면 왠지 실존하는 사람 같거든요. 그 정도로 마음을 주고 했었기 때문에 주인공을 죽이면서 끝냈더니 대미지가 오더라구요.
지 – 아무래도 작가님의 자식이기도 하니까요.
윤 – 네. 네. 그리고 실제 내 아이보다 더 잘 아는, 제가 가장 잘 아는 피조물이죠. 제 캐릭터가.(웃음) 제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아직 정확히 모르는데요. 얘는 5년 동안 저하고 같이 있었잖아요. 기획단계부터 생각해보면 더 길기도 하구요.
지 – 캐릭터 속에 들어가서 생각해보기도 해야 하구요.
윤 - 그렇죠.
지 - 그게 작가님 작품이 달라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겠네요. 따뜻해진 부분이 있다든가.
윤 – 그것보다는 이렇게 흔들릴 정도의 동력을 내 동력으로 삼으면 안 되겠구나, 분노랄지, 이런 것. 이렇게 쉽게 대체가 되어 버리는 것을 동력으로 삼으면 안 되겠구나, 그건 그냥 감정인 거구나. 창작을 하려면 보다 근본적인 곳에서 내 동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생각을 했죠. 진짜.
지 – 굉장히 심오한 얘긴데요. 작가님은 한국 만화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어서 고민을 많이 하시는 분인데요. 어떤 역할을 하고 싶으신가요?
윤 – 일단은 작가로 계속 작품을 한다는 것은 어쨌거나 누가 됐든간에 역할을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만화의 히스토리에 남는 거니까요. 두번째로는 그렇게 재밌지 않은 일들, 그러니까 제도나 이런 부분들을 지금 당장은 눈에 잘 안 뜨이고 실효가 없어보이지만, 분명히 지금 바뀌어야 몇 년 후에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제도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역할을 하고 싶죠. 필요하다면 말석이라도 자리해서 발언해야 되고요.
지 – 지금까지 해오신 작품 중에서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작품은 어떤 작품인가요?
윤 – 맨날 <로망스>라고 이야기했는데요. 알고 계신 분들은 거의 없을테니까요. 굿데이 신문에 연재를 했었죠. 많은 분들이 아시는 작품으로는 <이끼>가 제일 좋죠. 그때는 뭐 얻어걸려도 이렇게 잘 얻어걸리지, 싶을 정도로 대사나 이런 것이 신들린 것처럼 나왔어요. 슬럼프 기간에 성경을 꽤 많이 읽었었거든요. 주인공 아버지 에피소드를 그렇게 많이 할 것이 아니었는데, 기도원 에피소드가 많이 나오면서 성경에서 인용한 글귀도 많구요. 그런데 그 글귀가 제가 느낄 때 너무 적재적소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잘 떠올랐어요. 그래서 만족도랄까, 이런 게 정말 크죠. 그리고 스토리의 인과 관계는 굉장히 많이 무너졌는데, 그 진행하는 어떤 힘을 독자들이 정말 같이 즐겨주셨던 것 같은, 그런 독자와 함께 간다는 느낌을 받은 첫번째 작품입니다.
지 – 운동 선수로 치자면 '내가 계속 주전으로 뛸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주는 작품이 아니었나요?
윤 – 아니요. '아. 이제 들어왔구나. 남들이 보는 곳에 내가 들어왔구나', 그 전에는 너무너무 마이너적이었거든요.
지 – 어느 인터뷰에서 영화 옥의 티 중에 아버지 집에 책이 많이 있는 것을 지적하셨잖아요.
윤 - 옥의 티라기보다 원작자 입장에서 아쉬웠던 부분인 건데요. 주인공 아버지는 성경을 몇십 번 정독한 사람으로 나오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있어서 글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사람일 것이다, 신을 탐한 사람이니까. 그게 글로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지 –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이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라고 하잖아요.(웃음)
윤 – 하하하. 그 집에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순간, 지식인이 그 결말을 갖게 되는 것 같아서요. 제가 생각하는 것은 그건 아니었거든요. 그런 부분은 좀 아쉬웠다는 거죠. 영화 자체는 너무 좋았지만요.
지 – 제일 애착이 가는 캐릭터는?
윤 – 장그래.(웃음) 제가 처음으로 만든 긍정적인 이름에, 그 다음에 아까 이야기한대로 성인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페이소스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죠. 그래서 음과 양을 함께 다 가지고 있는 인물인 것 같아서 장그래가 제일 애착이 갑니다.
지 – 장그래 캐릭터에 작가님이 어느 정도 투영이 된 건가요?
윤 – 모든 캐릭터에는 제가 들어가 있겠죠. 조연까지도.
지 – 캐릭터를 만들때 제일 염두에 두는 부분은 어떤 부분인가요?
윤 – 작품에 안 보이는 부분에 대해서 제가 잘 알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대사가 나오는 거죠. 예를 들어 오과장의 집안 사정 같은 것은 만화에는 잘 안 나오지만, 이 사람의 어떤 발언이나 회사에서 어떤 판단을 할 때 제가 대사를 쓰면서 이 사람은 어떤 환경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대사를 한다는 느낌을 꼭 가지고서 쓰려고 하죠. 그래야 추상적인 일관성이 이어진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실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개인적인 삶을 모르지만, '어 저 사람은 일관성이 있어' 할 때 그 사람은 어째서 그 일관성을 갖게 되었느냐 하는 것을 보면 논리적인 것 때문이 아니라 체험 때문에 그 일관성을 가지게 되잖아요. 작가로서는 이 사람이 어떤 체험을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각각의 캐릭터들의 대사의 톤이 섞이지 않거든요.
지 – 작품들을 보면 캐릭터들도 강렬하지만, 명대사의 향연이잖아요. 대사를 쓸 때 어떤 점을 제일 염두에 두시나요?
윤 – 쉽게 쓰자, 쉬운 용어를 쓰자, 실제 우리가 친구들 만나서 쓰는 말, 많은 사람들이 쓰는 말을 쓰자, 대부분 대사는 많이 그렇게들 말씀을 하시는데, 그냥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대사가 나오기 때문에 좋게 생각해주시는 것 같아요. 대사 자체가 소설 등에서처럼 빛난다기보다는 타이밍과 상황이 잘 맞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토리 쓸 때 대사를 콘티 옆에 종이 하나를 꼭 놓고 쓰거든요. 그래서 그 종이에서 몇 번의 검수를 거치고, 최대한 쉬운 일상 용어로 바꾼 다음에 쓰려고 하죠.
지 – 초기에는 개그 만화도 많이 하셨는데요. 다시 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요즘 독자들의 개그 코드에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씀도 하셨던 것 같은데요.
윤 – 제가 생각하는 유머러스함이 유효기간이 끝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히 탐내지 않습니다.(웃음) 그냥 <미생> 같은 거 할 때 살짝 살짝 보이는 정도. 예전에는 개그 코드를 탐냈다면 지금은 아이러니를 탐내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할까요.
지 - 작품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이 달라진 부분도 있는 거네요.
윤 - 네.
지 – 요즘 잠은 좀 주무세요? 연재할 때는 일주일에 세 번밖에 안 주무시곤 하셨는데요.
윤 – 연재하지 않으니까 어쨌건 하루에 한 번씩은 잡니다. 매일 매일 자죠.
지 – 손석희의 뉴스룸 나가셔서 일주일에 네 번 여섯시간씩 잔다고 하셨는데요.
윤 – <미생>1을 할 때는 그렇게 생활을 했죠. 그때는 진짜 뇌가 녹는 느낌이 있었어요. 머리 속이 항상 뜨끈뜨끈하고, 뭔가 달떠있는데, 마감하고 나면 지쳐 쓰러지고, 그랬죠.
지 – 무한도전 같은 예능에도 두 번 출연하셨는데요. 윤태호라는 이름은 알지만 막상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적을 수 있는데, 예능 출연하고 나면 달라지잖아요.
윤 – 무한도전에서 처음 연락이 왔을 때가 나쁜 기억 지우개, 특집이었는데요. 무한도전 멤버를 상담하는 거였습니다. 무한도전에 제 조력자 분 중에 한 분이 막내 피디로 들어가 계셔서요. 광희씨에 대해서 얘기를 듣게 됐어요. 임시완씨와 같은 그룹 멤버잖아요.
지 - 제국의 아이들이죠.
윤 – 그래서 나름 애착이 있던 차에 제안이 와서 제가 뭐라고 가서 상담을 할 수 있겠나, 했는데요. 그냥 임시완이라는 코드로도 만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갔죠. '어떤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이런 것 없이 갔었는데요. 재미라든지 이런 것보다는 의미 있게 방송이 된 것에 대해서 저도 역시 좋았던 기억이 있죠.
지 – 예능에서 섭외 요청이 많이 오죠?
윤 – 요청이 많이 오는데요. 대개 안 하죠.
지 – 아무래도 뭔가 불편해지고, 시간을 많이 빼앗길 것 같아서 그런 건가요?
윤 – 그러기도 하고, 아이들한테 은근히 피해를 주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좀 들더라구요. '니네 아빠 누구지?' 이런 거.
지 – 대체로 알지 않나요?
윤 – 대체로 알죠. 그런데 방송에 나가서 상기 시키는 것과 적당히 잊혀지게 만드는 것과는 좀 달라서요. 조심하는 편입니다.
지 – 허영만 선생님으로부터 제일 많이 배운 점은 어떤 건가요?
윤 – 흔히 나는 뭐 해봤다, 라고 할 때 허 선생님은 남이 생각했던 것보다 반 보 더 하세요. 그러니까 여기까지 하면 꽤 즐긴 사람이야, 라고 했을 때 거기서 좀 더 가세요. 그러니까 세미 전문가 정도까지는 되시는거죠. 예를 들어 히말라야를 가시거나, 자전거를 타시거나, 바둑을 두거나, 당구를 치거나, 야구를 하거나, 모든 취미에서 반발짝 더 하세요. 그런 지점이 자꾸 저를 긴장하게 만들죠. 제가 '지금 꽤 했구나' 싶을 때 선생님을 떠올려보면 '아직 시원찮은데' 하는 판단이 들게 만드시니까 힘들기도 하구요.
지 – 그 이후에 조운학 선생님 화실에 계셨는데요. "내 피와 테마를 만든 것은 허영만 선생님이며, 근육을 만든 것은 조운학 선생님이다"라고 하셨잖아요.
윤 – 허영만 선생님 화실은 들어가고 싶은 화실을 들어간 거니까요. 두 번 거절 당하고 세 번째 된 건데요. 원래 되고 싶었던 롤모델이었으니까 피와 테마 같은 느낌이라면 조운학 선생님 화실에 가서는 데생이라는 것을 그 화실에서 배웠으니까요. 실질적인 근력을 만들어 주신 분이라고 생각을 해요. 저에게 굉장히 어린 나이에 데생이라고 하는, 화실 조직에서는 최고의 경험을 하게 만들어주신 분이 조운학 선생님이신 거죠.
지 – 두 분의 장점을 흡수한 거네요.
윤 – 그 선생님들의 장점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신 거죠. 제가 장점을 캐치했다기보다는, 그 분들이 경험할 수 있게 해주신 건데요. 제가 책을 좋아하는 것도 선생님 문하생 중에 갖가지 문하생들이 있을 거잖아요. 누구는 운동을 좋아하고, 누구는 영화를 좋아하고, 이런 저런 사람들이 있을텐데요. 한번은 제가 책을 읽는 것을 보시고 '태호는 항상 책 보고 있는 것이 보기 좋더라' 라고 말씀 하신 것이 제가 책을 읽게 만드는 동기 부여를 해주셨거든요. 그런 것들을 경험하게 해주신 것이 좋았죠. 한마디로 내가 존경하는 분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목표를 갖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런데 지금은 협회장하면서 혼나고 있죠.(웃음)
지 –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 학과 교수는 그만두신 거죠?
윤 – 3년 전에 그만뒀죠.
지 - 그만두신 이유는 있으신가요?
윤 - 제가 무식해서 안 되겠더라구요.(웃음) 자기 경험을 가지고 특강을 한 번 하거나 하는 것은 할 수가 있겠는데요. 어거지건 뭐건. 직업적으로 남에게 교육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하는 것은 성의의 문제가 아닌 것 같더라구요. 실제로 디테일이 있어야 되고, 거기에 대한 교육자로서의 플랜이 있어야 되고, 그 플랜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지적 디테일이 있어야 되는데요. 저는 무식해서 안 되겠더라구요.
지 – 너무 겸손하신 것 아닌가요?
윤 – 아니요. 실제로요.
지 - 완벽주의적인 것 아닌가요? 원작자로서도 그렇구요. 완벽하게 책임을 지려고 하는.
윤 - 아니요. 그런 것 같지는 않구요. 제 성향이 그런 것 같은데요. 이런 것도 있어요. 학년이 바뀌면, 이 사람들은 제 강의를 처음 듣는 사람들이니까 같은 말을 반복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걸 못 견뎌요. 그게 재미가 없고. 굉장히 초보적인 이야기를 반복하는 건데요. 그 이야기를 나는 넘어서야 되는데, 지금 실제 연재하는 작가이면서 그 이야기 안에 갇히게 될까봐 걱정도 되구요.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지 – 강연을 안 나가시는 부분도 그런 이유도 있겠네요. 나가다 보면 계속 비슷한 얘기를 해야 되니까요.
윤 – 강연을 하는 이유 중에는 '내가 뭐라고 이걸 거부하지?' 하는 마음이 컸어요. 좋아해주셨는데, 가서 이야기를 해야 되지 않나, 하면서 강연을 수락해서 하다가 어느 순간엔가 제가 용어를 정리하고 있더라구요. 말을 흥미롭게 하기 위해서. 그러면 살짝 살짝 왜곡이 일어나요. 강연을 하다가 보니까. 그건 약간 못 견디겠더라구요. 그래서 안 하게 됐죠.
지 – 같은 말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살을 붙이다보면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건가요?
윤 – 예를 들어서 처음 강연을 할 때는 십분 정도 뭔가를 설명을 했다면 몇 번의 강연을 통해서 그때 그 말이 너무 길었구나, 좀 줄여야 되겠네, 하면서 설명의 편리를 위해서 얘기를 줄이다 보면 왜곡이 좀 일어나는 거죠. 그런데 그게 굳어지다보니까 처음에 얘기했을 때의 사실 관계와 뒤에 축약이 됐을 때의 사실 관계가 살짝 살짝 어긋나는 거예요. 거짓말은 아니지만, 사실은 또 아니어서요. 그 간극이 두렵더라구요.
지 – 그거하고 비슷할 수 있겠네요. 연예인들이 예능 프로그램 나가서 재밌게 하려고 'MSG'를 치다보면 나중에는 뭐가 진짜인지 모르게 되잖아요. '그게 그거였나' 하고.
윤 – 맞아요. 심지어는 자기 생각도 바꿀 수가 있잖아요. 자기 기억 자체도 왜곡시킬 수가 있기 때문에 진짜 위험할 수 있다고 느꼈죠.
지 – 어떤 작가로 기억에 남고 싶으세요?
윤 – 그런 거 없어요. 진짜 그런 것을 물어보시더라구요.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작업을 하는 작가가 있나 싶을 정도거든요.
지 –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여쭤보면 자기 묘비명 같은 것도 답해주시죠.(웃음)
윤 – 몇 번은 굳이 생각해서 얘기를 했었던 것 같은데요. 지금은 그런 생각이 없어요.
지 – 후배 작가 분 중에 좋아하시는 작가 분이 있으신가요?
윤 – 이종범 작가요. <닥터 프로스트>, 네이버에서 연재한 작품인데요. 왜냐하면 이 친구는 옛날에 내가 고민했던 것이랑 비슷한 것을 고민하고 있는데요. 내가 이걸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규명하고 싶어해요.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던 것이 있으면 그걸 잘 분석해 봐야 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그건 우연적인 성과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직업으로 삼기엔 위험한거죠. 프로 작가는 이걸 왜 성취했는지에 대해서는 규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늘 그런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지금 작품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런 고민을 통해 앞으로 나가는 그런 작가들이 잘됐으면 하는 기대가 있어요.
지 –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도 늘 분석해야 된다는 거군요.
윤 – 성공한 작품은 그 작가랑 가장 닮은 작품이 성공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구요. 작가의 만족도가 높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려면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되겠죠. 작가 지망하는 사람들은 남이 뭘 좋아할지를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 같은데요. 사실은 남보다는 자기 자신을 먼저 분석해보는 시간을 꼭 가져야 되지 않을까, 그래야 거기서부터,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남으로 가는 것이지, 남을 통해서 자기한테 오는 것 같지는 않거든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계속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이 창작자로서의 가장 첫 발걸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 – 점성술, 별자리, 사주, 풍수, 손금, 도, 관상을 공부하신 것이 내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 였다고 하셨는데요. 도움이 됐나요?
윤 – 자존감이 낮았으니까요. 완벽하게 도움이 됐다기보다는 저를 읽어내는, 저를 읽어내는 여러가지 툴을 통해서 저에 대해서 스스로 좀 더 많이 이해하게 됐다는 거죠.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런 면에 있어서는 나름 만족해요. 그런 과정을 경험했다는 것에 대해서.
지 –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도 좀 도움이 됐나요? 관상이나, 손금을 보면.
윤 – 그렇지는 않아요. 옛날에 배울 때는 그런 짓도 많이 하고 했는데요. 재미로는 하죠.
지 – 마지막으로 해주실 말씀은 있으신가요?
윤 – 요즘 만화계가 많이 시끄럽거든요. 회장으로서 여러가지 질문들과 저의 생각에 반하는 의견들에 많이 노출이 되어 있는데요. 빨리 작품을 하는 원래의 저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고, 동시에 만화계가 좀 더 나아지는 쪽으로 어떤 부분들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매듭을 짓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핵심은 잘하고 싶어요.
지 – 그동안 잘해오셨지만, 과중한 프레스들이 있긴 했죠. 알게 모르게 내상을 입으셨을 것 같구요.
윤 – 엄청나게 입었죠.
지 - 그 부분도 우선 치유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윤 - 나는 괜찮다고 서있는데, 누더기 옷을 입고 있는 느낌입니다.(웃음)
지 – 건강 잘 챙기시구요. 좋은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지승호 인터뷰 전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