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김정환 기자 = 2019년은 기해(己亥)년, 그러니까 '돼지띠 해'다. 금년이 돼지띠 해인 것은 돼지가 '해(亥)'라는 이름으로 당당히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의 십이지(十二支)에서 한 자리를 장식하는 덕이다.
돼지가 십이지 중 맨 마지막에 자리한 것은 왜였을까. 십이지가 탄생한 중국의 전설에 따르면, 부처는 이 세상을 만들 때 도움울 준 열두 동물에게 우주의 시간과 방향을 맡겼다. 극락에 도착한 순서를 따랐는데, 소 등에 올라 타고 오다가 극락 문 앞에서 낼름 뛰어내려 가장 먼저 문 안으로 들어선 쥐가 1등, 간발의 차이로 소가 2등이 됐다. 다른 동물들이 속속 도착하고, 가장 늦게 도착한 돼지가 꼴등이 됐다. 십이지 순서에 따라 돼지의 시간은 하루가 마감하는 '오후 9~11시', 방향은 '북북서'를 의미한다.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노아의 방주'에 몸을 실은 동물이 적게는 3500종, 많게는 7000종으로 추정된다. 그처럼 수많은 동물 가운데 열두 동물에 포함됐다면 비록 꼴찌라도 '가문의 영광'일 것이다.
이런 돼지인 데다가 무엇이든지 잘 먹고, 새끼도 많이 낳으니 예로부터 우리 조상이 돼지에 가진 기대와 공경심은 남달랐다. 이는 돼지를 재물과 복의 상징으로 여기는 계기가 됐다.
돼지가 십이지 중 맨 마지막에 자리한 것은 왜였을까. 십이지가 탄생한 중국의 전설에 따르면, 부처는 이 세상을 만들 때 도움울 준 열두 동물에게 우주의 시간과 방향을 맡겼다. 극락에 도착한 순서를 따랐는데, 소 등에 올라 타고 오다가 극락 문 앞에서 낼름 뛰어내려 가장 먼저 문 안으로 들어선 쥐가 1등, 간발의 차이로 소가 2등이 됐다. 다른 동물들이 속속 도착하고, 가장 늦게 도착한 돼지가 꼴등이 됐다. 십이지 순서에 따라 돼지의 시간은 하루가 마감하는 '오후 9~11시', 방향은 '북북서'를 의미한다.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노아의 방주'에 몸을 실은 동물이 적게는 3500종, 많게는 7000종으로 추정된다. 그처럼 수많은 동물 가운데 열두 동물에 포함됐다면 비록 꼴찌라도 '가문의 영광'일 것이다.
이런 돼지인 데다가 무엇이든지 잘 먹고, 새끼도 많이 낳으니 예로부터 우리 조상이 돼지에 가진 기대와 공경심은 남달랐다. 이는 돼지를 재물과 복의 상징으로 여기는 계기가 됐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돼지 꿈'이다. 돼지꿈을 꾸면 로또를 구매하는 사람이 많다. 다만 꿈 속에서 돼지는 집으로 들어와야지 나가면 오히려 좋지 않다는 단서가 달리기는 했다. 이와 관련한 설화가 전북 부안군에 전승(한국구비문학대계)한다.
도산이라는 마을에 김씨라는 사람이 살았다. 이 사람은 천성적으로 착했으나 집안 형편은 좋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씨는 암퇘지 한 마리가 새끼들을 데리고 자기 집 곡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신기한 것은 같이 있던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그에게만 보인다는 것이다. 김씨는 속으로 '우리 집 형편이 나아지려고 하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정말 10년도 안 돼 그는 천석꾼이 되고, 진사 벼슬에도 올랐다. 그런데 그 후 어느 날 김씨는 그때의 그 암퇘지가 새끼들을 데리고 집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말았다.
'집안이 망하려나 보다'고 걱정하는데 잠시 뒤 밖에서 총소리가 나더니 방금 나간 암퇘지가 새끼를 데리고 황급히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몹시 기뻐하며 다행스러워했다. 저녁 무렵 포수 한 무리가 집을 찾아와 "돼지가 들어오는 것을 못 봤느냐?"고 물었다. 김씨는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저녁도 늦었으니 하룻밤 머물고 가라"고 권했다. 사냥꾼들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사랑 방에다 재우는데 느닷없이 강도가 쳐들어왔다. 그러나 집안에 총을 가진 사냥꾼들이 있었기에 강도를 쉽게 물리쳤다. 이후 김씨는 오랫동안 잘 살았다.
이제는 보기 힘들어졌지만, 1970~80년대 이발소나 음식점에 가면 쉽게 볼 수 있었던 그림이 어미 돼지가 새끼 10여 마리에게 젖을 먹이는 그림이다. 유명 화가 작품도 아닌 작가 미상의 민화에 지나지 않은 이 그림을 태극기처럼 가게들이 앞다퉈 걸어놓은 것은 역시 돼지의 좋은 기운으로 사업 번창을 기원하는 의미였을 것이다. 개업할 때 음력 정월의 첫 돼지 날(亥日)에 하면 부자가 된다고 믿은 것도 그 영향이다.
도산이라는 마을에 김씨라는 사람이 살았다. 이 사람은 천성적으로 착했으나 집안 형편은 좋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씨는 암퇘지 한 마리가 새끼들을 데리고 자기 집 곡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신기한 것은 같이 있던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그에게만 보인다는 것이다. 김씨는 속으로 '우리 집 형편이 나아지려고 하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정말 10년도 안 돼 그는 천석꾼이 되고, 진사 벼슬에도 올랐다. 그런데 그 후 어느 날 김씨는 그때의 그 암퇘지가 새끼들을 데리고 집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말았다.
'집안이 망하려나 보다'고 걱정하는데 잠시 뒤 밖에서 총소리가 나더니 방금 나간 암퇘지가 새끼를 데리고 황급히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몹시 기뻐하며 다행스러워했다. 저녁 무렵 포수 한 무리가 집을 찾아와 "돼지가 들어오는 것을 못 봤느냐?"고 물었다. 김씨는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저녁도 늦었으니 하룻밤 머물고 가라"고 권했다. 사냥꾼들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사랑 방에다 재우는데 느닷없이 강도가 쳐들어왔다. 그러나 집안에 총을 가진 사냥꾼들이 있었기에 강도를 쉽게 물리쳤다. 이후 김씨는 오랫동안 잘 살았다.
이제는 보기 힘들어졌지만, 1970~80년대 이발소나 음식점에 가면 쉽게 볼 수 있었던 그림이 어미 돼지가 새끼 10여 마리에게 젖을 먹이는 그림이다. 유명 화가 작품도 아닌 작가 미상의 민화에 지나지 않은 이 그림을 태극기처럼 가게들이 앞다퉈 걸어놓은 것은 역시 돼지의 좋은 기운으로 사업 번창을 기원하는 의미였을 것이다. 개업할 때 음력 정월의 첫 돼지 날(亥日)에 하면 부자가 된다고 믿은 것도 그 영향이다.
돼지에게 우리 민족이 가진 긍정적인 인식은 돼지가 그 옛날 국가를 위해서도 큰 역할을 했다고 각종 전설, 설화를 통해 전해지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유리왕 편'을 보면 신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기르던 돼지가 달아나자 유리왕(재위 기원전 19∼기원후 18)이 이를 잡아 오라고 명령했다. 관리는 현 중국 지린성(吉林省)에 있는 국내성 위나암에서 돼지를 겨우 잡을 수 있었다. 관리는 그곳 산세와 지세가 매우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왕에게 "국내 위나암은 산이 험하고 물이 깊습니다. 땅은 오곡을 기르기에 좋고, 사슴과 물고기도 많이 납니다.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면 백성에게 크게 이롭고, 병란도 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고 보고했다.
왕이 직접 지역을 시찰했고, 이듬해 수도를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왕은 수도를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다. 서기 3년(유리왕 22)의 일이다. 이는 신이 왕에게 현 도읍이 왕조에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돼지를 도망치게 만든 것으로 돼지는 신의 메신저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이야기는 또 있다. 고려 태조 왕건(877~943)의 조부 작제건과 관련한 설화다. '고려사'에 수록된 것으로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가던 중 해상에서 풍랑을 만났다. 고려인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에 당나라 상인들이 그를 섬에 내려놓았다. 죽음을 각오한 작제건 앞에 노인이 나타나 자신을 서해 용왕이라고 소개하면서 섬에 사는 늙은 여우가 경을 외우면 두통이 생겨 죽을 것 같으니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여우를 쏘아 죽인 뒤 용왕의 사위가 돼 온갖 보물과 돼지를 선물로 받아 귀국했다. 용왕의 선물이 돼지인 것도 신기한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개성 영안성에 정착해 1년가량 지났을 때 돼지가 우리에 들어가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작제건이 돼지에게 말하기를 "이곳이 살 곳이 아니라면 네가 가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겠다"고 하자 돼지는 개성 송악산 남쪽에 가서 누워 버렸다. 그러자 작제건은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고 그 집에서 왕건이 태어났다. 여기서도 돼지는 메신저 구실을 한다.
왕이 직접 지역을 시찰했고, 이듬해 수도를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왕은 수도를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다. 서기 3년(유리왕 22)의 일이다. 이는 신이 왕에게 현 도읍이 왕조에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돼지를 도망치게 만든 것으로 돼지는 신의 메신저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이야기는 또 있다. 고려 태조 왕건(877~943)의 조부 작제건과 관련한 설화다. '고려사'에 수록된 것으로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가던 중 해상에서 풍랑을 만났다. 고려인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에 당나라 상인들이 그를 섬에 내려놓았다. 죽음을 각오한 작제건 앞에 노인이 나타나 자신을 서해 용왕이라고 소개하면서 섬에 사는 늙은 여우가 경을 외우면 두통이 생겨 죽을 것 같으니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여우를 쏘아 죽인 뒤 용왕의 사위가 돼 온갖 보물과 돼지를 선물로 받아 귀국했다. 용왕의 선물이 돼지인 것도 신기한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개성 영안성에 정착해 1년가량 지났을 때 돼지가 우리에 들어가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작제건이 돼지에게 말하기를 "이곳이 살 곳이 아니라면 네가 가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겠다"고 하자 돼지는 개성 송악산 남쪽에 가서 누워 버렸다. 그러자 작제건은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고 그 집에서 왕건이 태어났다. 여기서도 돼지는 메신저 구실을 한다.
지금도 고사나 굿 등을 할 때 돼지 머리나 통돼지를 제물로 올린다. 이는 돼지를 신성한 동물로 여기는 전통을 잇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종대 중앙대 민속학과 교수는 "돼지에 대한 우리 민족의 인식은 매우 긍정적인 편"이라며 "이는 봉건시대 궁핍한 삶을 해결해줄 수 있는 상징적 신호로서 돼지를 연상했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돼지는 우리 민족에게 중요한 존재로 각인됐으며, 동시에 식량원으로서도 중요하게 다뤄졌다"고 설명했다.
김종대 중앙대 민속학과 교수는 "돼지에 대한 우리 민족의 인식은 매우 긍정적인 편"이라며 "이는 봉건시대 궁핍한 삶을 해결해줄 수 있는 상징적 신호로서 돼지를 연상했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돼지는 우리 민족에게 중요한 존재로 각인됐으며, 동시에 식량원으로서도 중요하게 다뤄졌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물론 예로부터 돼지를 게으름과 탐욕의 상징으로 여긴 사례도 일부 있다"면서도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은 돼지를 생태적인 의미로서 읽어낸 결과다. 돼지의 순수한 상징을 보여준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그뿐만 아니라 돼지가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우리 민족에게 각인된 사실을 뒤집을 정도는 못 된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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