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춘향전] ① 이몽룡은 봉화 출신…성춘향은 모델 찾기

기사등록 2016/08/31 07:53:57

최종수정 2016/12/28 17:34:16

광한루 '월매의집'에 꾸며져 있는 이몽룡과 성춘향
광한루 '월매의집'에 꾸며져 있는 이몽룡과 성춘향
【봉화=뉴시스】김진호 기자 = 사랑을 주제로 한 '춘향전'은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하는 고대소설 중 으뜸이다.

 1999년 '춘향전 박사'로 통하는 설성경 연세대 명예교수가 '춘향전' 관련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이는 학계와 관련 지방자치단체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유적이 있는 봉화군과 영주시 등은 이를 관광산업화 하기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뉴시스는 그 학설이 무엇이며, 이를 토대로 한 관광산업화는 어디까지 진척됐는지, 해당 지자체간 갈등은 없는지 9회에 걸쳐 집중 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설성경(72) 연세대 명예교수는 춘향전을 50여 년간 연구해 온 '춘향전 박사'다. 그는 오랜 연구 끝에 17년전 이몽룡이 실존 인물이었음을 밝혀내는 학문적 쾌거를 달성했다.

 설 교수에 따르면 춘향전에 등장하는 어사 이몽룡의 본명은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청백리다.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서 태어났다.

 1616년 생원시를 거쳐 162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634년 정언에 임명된 이후 부수찬을 거쳐 부교리, 지평, 수찬, 사간 등 주로 언관 직을 역임했다. 합천현감, 담양부사, 창원부사, 진주목사, 강계부사 등 다섯 고을을 선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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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서종택
 언관으로 있을 때는 직언으로 일관해 주위의 시기를 받아 승진이 순조롭지 못했다. 하지만 강직한 성품 때문에 왕의 돈독한 신임을 받았다. 3회나 암행어사에 임명돼 경상·호서·호남 지역에 나가 민정을 살폈다.

 사후 청백리에 오르고, 부제학에 추증됐다는 기록에서 그의 올곧은 성품을 엿볼 수 있다.  기록에는 '평생 공사 구별 없이 청렴, 결백, 검소하게 살았다. 관아에서 이속들이 사또 자제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음식 하나도 아문 밖으로 사사로이 내어 가지 못했다. 평생 술을 과음하지 않았으며, 기녀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라고 적혀 있다.  

 1607년 그의 나이 13세 때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 성안의(成安義 1561~1629)를 따라 갔다가 4년간 남원에서 생활했다. 그가 태어난 생가 계서종택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 그가 말년에 은거했던 계서정과 묘는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있다.

 그렇다면 이몽룡의 연인 성춘향은 어떨까.

 먼저, 성이성이 남원에서 만난 기생과의 일화가 후일 춘향전의 주 뼈대가 됐다고 주장하는 설이다. 이에 의하면 성이성의 부친이 광주목사로 발령나 남원을 떠나면서 기생 춘향과 이별하게 된다. 이 때 세간에는 성이성과 춘향을 소재로 한 춘향전이 희극과 인형극, 만담 등으로 확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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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에 있는 '성춘향 사당'
 '양반가 자제의 스캔들'이라 하여 조선 조정에서 관을 동원해 금지시켰다. 그러자 사람들은 주인공 성몽룡을 이몽룡으로 바꿨다. 성씨가 없던 기생 춘향에게는 성이성의 성씨인 성(成)을 붙여 시연하게 됐다는 것이다.

 설 교수에 따르면 춘향전 작가에 대한 논의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태준이 저술한 '증보조선소설사'에는 전북지방 전설을 소개하면서 춘향전 작가로 어느 대작가를 언급했다.

 "전북지방 전설에는 남원에 얼굴이 매우 추해 시집갈 수 없어서 자살해 원혼이 된 처녀 춘향이 있었다. 그 후 남원부사는 부임해 오는 족족 죽는 고로 폐읍 지경에 이르게 됐다. 어느 대작가가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이 소설을 지어 위로한 이후로는 무사했다."

 정노식은 1930년대 '조선창극사'에서 "춘향이 죽은 후에 남원 일군이 대흉재가 들어 3년 동안 계속됐다. 전군민이 아사상태로 남부여대 유리개걸의 참상이 나타나자 농민과 부녀들은 흉재의 원인은 원귀 춘향의 소치라고 믿고 방재책에 대한 의논이 비등했다. 시임 이방이 춘향전을 지어서 무녀의 살풀이굿에 올려서 그 원혼을 위로했다"라고 적었다.

 권상로는 '조선문학사'에서 또 다른 야담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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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주천면에 있는 '춘향묘'
 "노진(盧禛 1518~1578)이 선조 때 이조판서까지 지내 명망이 자자했다. 그 당숙이 선천부사로 있을 때 선천에 갔다가 퇴기의 딸인 '동기'와 인연을 맺고 헤어졌다. 그 후에 옥계가 평안도 어사로 내려가 동기와 다시 만나 해로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자기 고향인 남원에 전해졌다.

 그것이 그 지방의 미담이 돼 사람들의 말에 회자하게 됨으로 어떤 문호가 그것을 소설화 했다. 그 후에 여러 사람들이 증보하고 부연해 걸작의 춘향전이 됐다고 한다."

 이처럼 여러 야담이나 남원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 등을 종합해 보면 결론이 일정 방향으로 흐른다. 춘향이 얼굴이 못생긴 남원지방의 처녀였든, 아니면 평안도 선천 지방에 살던 퇴기의 딸 동기였든 실존했던 인물일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신분의 차이를 초월해 남원 출신 암행어사 옥계와 사랑을 나눠 백년해로 했던 퇴기의 딸 동기가 춘향의 모델이었을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 보인다.

 설 교수는 "김태준이나 권상로는 실증적 자료에 근거하거나 체계적인 논리 없이 촌평적인 언급으로 춘향의 실존 가능성을 제시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1999년 이몽룡이 실존했던 인물임을 밝혀낸 이후 춘향의 실제 모델이 누구인지에 대한 학술적 연구에 큰 진전이 있다. 오는 12월 이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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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춘향전] ① 이몽룡은 봉화 출신…성춘향은 모델 찾기

기사등록 2016/08/31 07:53:57 최초수정 2016/12/28 17: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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