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전쟁기념관은 조선 중기인 1672년(인조 5년) 벌어진 정묘호란 당시 안주성 전투에서 최후까지 항전한 남이흥(南以興) 장군을 '2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고 28일 밝혔다.2014.01.28.(사진 = 전쟁기념관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김훈기 기자 = 전쟁기념관은 조선 중기인 1672년 정묘호란 당시 안주성 전투에서 최후까지 항전한 남이흥(南以興) 장군을 '2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고 28일 밝혔다.
남이흥 장군은 1576년 나주목사 남유(南瑜)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령, 자는 사호(士豪), 호는 성은(城隱).
정유재란 당시 부친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왜적과 싸우다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을 계기로 좋아하던 글공부를 포기하고 활쏘기 말타기에 전념해 27세이던 1602년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선전관을 거쳐 부총관, 포도대장, 경상도병마절도사, 안주목사, 평안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1624년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은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지휘 하에 중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평정했다.
이 공으로 진무공신 1등에 책훈되고 의춘군에 봉해졌다.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로서 영변부사를 겸해 국경 방어의 임무를 맡고 있던 중,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후금의 3만6000여 병사는 의주를 돌파하고 능한산성을 함락한 뒤 곧바로 안주성에 이르렀다. 당시 남이흥 장군이 이끄는 병력은 적군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3000명 수준이었다.
후금은 항복을 종용했지만 장군은 죽을 각오로 저항했고, 이에 후금은 장군이 항복할 의사가 없는 것을 알고 총공격을 퍼부었다. 장군과 조선군은 최후까지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적군이 성내로 쏟아져 들어오자 남이흥 장군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화약상자에 불을 붙여 적군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장군의 장례 때 인조 임금은 입었던 옷을 벗어 관 위에 덮어주며 애도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에 증직하고, 정1품 의춘부원군에 추봉했다. 평안도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2월6일 오후 2시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유관단체와 종중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장군을 추모하는 현양행사가 열린다.
[email protected]
남이흥 장군은 1576년 나주목사 남유(南瑜)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령, 자는 사호(士豪), 호는 성은(城隱).
정유재란 당시 부친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왜적과 싸우다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을 계기로 좋아하던 글공부를 포기하고 활쏘기 말타기에 전념해 27세이던 1602년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선전관을 거쳐 부총관, 포도대장, 경상도병마절도사, 안주목사, 평안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1624년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은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지휘 하에 중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평정했다.
이 공으로 진무공신 1등에 책훈되고 의춘군에 봉해졌다.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로서 영변부사를 겸해 국경 방어의 임무를 맡고 있던 중,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후금의 3만6000여 병사는 의주를 돌파하고 능한산성을 함락한 뒤 곧바로 안주성에 이르렀다. 당시 남이흥 장군이 이끄는 병력은 적군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3000명 수준이었다.
후금은 항복을 종용했지만 장군은 죽을 각오로 저항했고, 이에 후금은 장군이 항복할 의사가 없는 것을 알고 총공격을 퍼부었다. 장군과 조선군은 최후까지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적군이 성내로 쏟아져 들어오자 남이흥 장군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화약상자에 불을 붙여 적군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장군의 장례 때 인조 임금은 입었던 옷을 벗어 관 위에 덮어주며 애도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에 증직하고, 정1품 의춘부원군에 추봉했다. 평안도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2월6일 오후 2시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유관단체와 종중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장군을 추모하는 현양행사가 열린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