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뉴시스】이종찬 기자 = 올해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후손들은 선조들이 남긴 숭고한 문화유산의 가치가 새삼 위대하다는 것을 느꼈다.
지난 8월1일 유네스코가 한국의 경주 양동마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 등재했기 때문.
조선시대 대표적인 양반촌이었던 양동마을은 지금도 당시 양반의 위엄과 생활풍습을 그대로 엿볼 수 있어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양동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으면서 500년 전 조선시대로 되돌아가 부활되는 조선의 숨결을 느끼게 된다.
◇용인 민속촌과 다른 것은
이 마을의 특징은 용인 민속촌과 달리 실제 후손들이 선조들이 거처했던 초가집과 기와집에서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후손들의 생활도구와 의복만이 당시와 다를 뿐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과 후손들이 묵고 있는 가옥은 500년이란 긴 세월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이 마을은 손씨(孫:월성)와 이씨(李:여강) 양성이 서로 협조하며, 5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온 것이라는 것. 또 우리나라 전통 민속마을 중 가장 큰 규모와 가장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전국에는 6개소의 전통 민속마을이 있으나, 양동마을은 마을의 규모,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 묻지 않은 향토성 등에서 그 어느 곳보다 훌륭하고 볼거리가 많다.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도 이곳을 방문했을 정도로 영국에까지 명성이 알려져 있다.
특히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同姓聚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 5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이를 에워싸고 있는 나지막한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지키고 있어 당시 양반과 하인의 역할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
양동마을의 대향조는 손소이다. 원래 양동리는 풍덕류씨가 살던 곳이었다. 손소가 25세 때 류씨 집안의 복하란 사람의 딸과 결혼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돼 이 부락에 터를 잡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큰 아들은 백돈. 그러나 그에게는 후사가 없어 둘째 아들 중돈이 종통을 이었는데 그가 바로 조선 명현의 한 분으로 청백리에 오른 우재(愚齊)선생이다.
이로써 경주 손씨는 양동에 토착기반을 견고하게 다질 수 있었으며, 여기에 우재선생의 여동생인 손씨 부인이 여주 이씨 이번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그중 장남이 동방오현의 한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선생이다. 이래서 양동은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의 전통적인 토성마을이 됐다.
대종가(大宗家)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설창산의 동쪽과 서쪽 산등성이에 우람하게 자리하고 있어 조선조 500년 동안의 양 성씨 문중의 영화를 비춰주고 있다.
◇명당(明堂)에서 나온 명공(名公)이
양동마을은 경주시에서 동북방으로 20㎞쯤 떨어져 있으며, 마을의 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 줄기로 갈라진 등선과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어 명당중의 명당으로 꼽힌다.
그 덕분일까,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 가문에 의해 형성된 이 마을은 우재 손중돈 선생, 회재 이언적 선생을 비롯하여 조선의 명공(名公)과 석학을 많이 배출하면서 명성을 더하고 있다..
산등성이를 내리 뻗으면서 내곡, 물봉골, 거림 하촌의 4골짜기가 있고,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와 함께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으로 마을이 이어져 있어 요새 같은 느낌을 준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 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토담으로 이어지며, 통감속편(국보 283), 무첨당(보물 411), 향단(보물 412), 관가정(보물 442), 손소영정(보물 1216)을 비롯하여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 분재기(경북유형문화재 14) 등 도지정문화재만도 7점이 있다.
와가와 초가 등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전통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며, 아름다운 풍경과 낮은 토담 길 사이를 걸으며 긴 역사의 향기를 넉넉하게 감상할 수도 있어 양반이 된 느낌을 주고 있다.
관할 자치단체인 경주시는 최근 유교 전통문화와 관습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선보이면서 아름다운 우리의 예절과 선비 및 하인의 문화 등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하면서 이 마을을 찾는 관광객에게 흥미를 선사하고 있다.
◇후손들이 만든 흉물은 없어져야
그러나 아직 500년 전으로 돌아가기엔 과제도 많다.
마을 앞을 가로막는 고속전철(경주-포항) 교량(건설 중)은 앞으로 이 마을의 최대 흉물로 자리할 것이 분명하다. 원래 이 구간은 계획이 없었던 것이었다. 경주와 포항이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고, 경주 화천리 고속전철역사까지도 포항에서 30분이면 충분한데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이를 건설하고 있다.
따라서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선조들이 선사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흉물”이며“권력(?)이 만든 흉물이 될 것”이라며 우려하고 있다.
또 재산권 문제도 해결하지 못해 흉물로 남아 있는 낡은 슬레이트 지붕의 상점이나 마을 안 주택의 철 대문, 가구마다 가옥 한 편에 불쑥 나와 있는 철 구조물의 농기구 창고, 양철 기와집과 시멘트 블록으로 된 담장 등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훼손하는 각종 시설물을 정비하는 일도 과제다.
하지만 양 명문가문 후손들은 슬기로운 지혜로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더욱 아름답고 빛나게 가꾸는데 노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시 500년 전으로 돌려주는 것은 후손들의 몫”이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한 유네스코가 준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mail protected]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196호(10월11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지난 8월1일 유네스코가 한국의 경주 양동마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 등재했기 때문.
조선시대 대표적인 양반촌이었던 양동마을은 지금도 당시 양반의 위엄과 생활풍습을 그대로 엿볼 수 있어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양동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으면서 500년 전 조선시대로 되돌아가 부활되는 조선의 숨결을 느끼게 된다.
◇용인 민속촌과 다른 것은
이 마을의 특징은 용인 민속촌과 달리 실제 후손들이 선조들이 거처했던 초가집과 기와집에서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후손들의 생활도구와 의복만이 당시와 다를 뿐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과 후손들이 묵고 있는 가옥은 500년이란 긴 세월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이 마을은 손씨(孫:월성)와 이씨(李:여강) 양성이 서로 협조하며, 5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온 것이라는 것. 또 우리나라 전통 민속마을 중 가장 큰 규모와 가장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전국에는 6개소의 전통 민속마을이 있으나, 양동마을은 마을의 규모,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 묻지 않은 향토성 등에서 그 어느 곳보다 훌륭하고 볼거리가 많다.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도 이곳을 방문했을 정도로 영국에까지 명성이 알려져 있다.
특히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同姓聚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 5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이를 에워싸고 있는 나지막한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지키고 있어 당시 양반과 하인의 역할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
양동마을의 대향조는 손소이다. 원래 양동리는 풍덕류씨가 살던 곳이었다. 손소가 25세 때 류씨 집안의 복하란 사람의 딸과 결혼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돼 이 부락에 터를 잡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큰 아들은 백돈. 그러나 그에게는 후사가 없어 둘째 아들 중돈이 종통을 이었는데 그가 바로 조선 명현의 한 분으로 청백리에 오른 우재(愚齊)선생이다.
이로써 경주 손씨는 양동에 토착기반을 견고하게 다질 수 있었으며, 여기에 우재선생의 여동생인 손씨 부인이 여주 이씨 이번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그중 장남이 동방오현의 한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선생이다. 이래서 양동은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의 전통적인 토성마을이 됐다.
대종가(大宗家)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설창산의 동쪽과 서쪽 산등성이에 우람하게 자리하고 있어 조선조 500년 동안의 양 성씨 문중의 영화를 비춰주고 있다.
◇명당(明堂)에서 나온 명공(名公)이
양동마을은 경주시에서 동북방으로 20㎞쯤 떨어져 있으며, 마을의 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 줄기로 갈라진 등선과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어 명당중의 명당으로 꼽힌다.
그 덕분일까,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 가문에 의해 형성된 이 마을은 우재 손중돈 선생, 회재 이언적 선생을 비롯하여 조선의 명공(名公)과 석학을 많이 배출하면서 명성을 더하고 있다..
산등성이를 내리 뻗으면서 내곡, 물봉골, 거림 하촌의 4골짜기가 있고,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와 함께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으로 마을이 이어져 있어 요새 같은 느낌을 준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 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토담으로 이어지며, 통감속편(국보 283), 무첨당(보물 411), 향단(보물 412), 관가정(보물 442), 손소영정(보물 1216)을 비롯하여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 분재기(경북유형문화재 14) 등 도지정문화재만도 7점이 있다.
와가와 초가 등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전통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며, 아름다운 풍경과 낮은 토담 길 사이를 걸으며 긴 역사의 향기를 넉넉하게 감상할 수도 있어 양반이 된 느낌을 주고 있다.
관할 자치단체인 경주시는 최근 유교 전통문화와 관습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선보이면서 아름다운 우리의 예절과 선비 및 하인의 문화 등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하면서 이 마을을 찾는 관광객에게 흥미를 선사하고 있다.
◇후손들이 만든 흉물은 없어져야
그러나 아직 500년 전으로 돌아가기엔 과제도 많다.
마을 앞을 가로막는 고속전철(경주-포항) 교량(건설 중)은 앞으로 이 마을의 최대 흉물로 자리할 것이 분명하다. 원래 이 구간은 계획이 없었던 것이었다. 경주와 포항이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고, 경주 화천리 고속전철역사까지도 포항에서 30분이면 충분한데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이를 건설하고 있다.
따라서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선조들이 선사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흉물”이며“권력(?)이 만든 흉물이 될 것”이라며 우려하고 있다.
또 재산권 문제도 해결하지 못해 흉물로 남아 있는 낡은 슬레이트 지붕의 상점이나 마을 안 주택의 철 대문, 가구마다 가옥 한 편에 불쑥 나와 있는 철 구조물의 농기구 창고, 양철 기와집과 시멘트 블록으로 된 담장 등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훼손하는 각종 시설물을 정비하는 일도 과제다.
하지만 양 명문가문 후손들은 슬기로운 지혜로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더욱 아름답고 빛나게 가꾸는데 노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시 500년 전으로 돌려주는 것은 후손들의 몫”이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한 유네스코가 준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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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196호(10월11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