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서 세 번째 개인전

김명희, 김치 담그는 날 2025, 2025, 칠판에 오일 파스텔, LCD 모니터, 119 × 297.5 c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나는 디아스포라보다 앰뷸런트(ambulant)에 가깝다.”
화가 김명희에게 이동은 떠돎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다. 뉴욕과 춘천 내평리를 오가며 작업해온 그는 정착과 귀속 대신 ‘이동하며 살아가는 존재’를 선택했다.
“내 그림은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닌 현실의 문제, 특히 ‘Dislocation’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이다.” 김명희가 2003년 작가 노트에 남긴 이 문장은 삶과 그림의 관계를 압축한다.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가 7일 개막한 개인전 ‘깊은 시간’은 그렇게 반세기 동안 축적된 삶과 작업의 시간을 조망한다.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명희는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뉴욕으로 이주해 프랫인스티튜트에서 수학했다. 1970년대 남성 중심 미술계 속에서 여성 작가 그룹 ‘표현’ 활동에 참여하며 독자적인 작업 세계를 구축했고, 이후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삶과 작업을 병행해왔다.
1990년 춘천 내평리 폐교에서 발견한 칠판은 그의 작업 세계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작가는 칠판을 단순한 지지체가 아니라 ‘소거와 축적’이 반복되는 시간의 표면으로 확장했다.

김명희, 차경, 가을, 2015, 칠판에 오일 파스텔, 201 × 111.5 cm *재판매 및 DB 금지
김명희의 ‘칠판 회화’는 쓰고 지우는 행위가 반복되는 칠판의 물성을 통해 시간의 축적과 소거를 드러낸다.
어두운 표면 위에 쌓이는 오일 파스텔의 점과 선, 세밀하게 묘사된 인물과 자연의 형상은 이미지가 떠오르고 사라지는 기억의 층위를 환기한다. 영상이 결합된 대형 칠판 작업은 정적인 회화를 넘어 호흡과 움직임까지 포착하며 삶의 지속성을 암시한다.
2003년과 2012년에 이어 갤러리현대에서 세 번째로 열리는 이번 개인전은 1980년대 목탄 드로잉부터 칠판 회화, 영상 결합 작업, 신작까지 40여 점을 선보인다. 삶과 역사, 개인의 경험과 집단 기억이 교차하는 작가의 작업 세계를 압축적으로 담아낸 미니 회고전 형식이다.
김명희는 “씨앗을 제자리에 심고 태양과 비를 기다리며 가꾸는 것은 내 몫이다. 삶과 그림의 필연적 관계”라고 말해왔다. 그는 “내 안목으로 보는 세상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며 “극단적인 여성주의와는 조금 다르다”고 했다.

김명희, 신은 수학자인가?, 2026, 칠판에 오일파스텔, LCD 모니터, 113 × 174 cm *재판매 및 DB 금지
이번 전시는 내평리 풍경, 자화상, 군상, 지도 연작과 더불어 김명희의 삶을 조명하는 장우진 감독의 다큐멘터리 일부도 함께 소개한다.
특정 사조나 경향에 자신을 귀속시키기보다 삶과 작업의 연속성 속에서 독자적인 시간을 구축해온 김명희는 최근 한국 여성미술 서사를 다시 쓰는 흐름 속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민중미술과 단색화 중심의 미술사 바깥에서 자신만의 궤적을 구축해온 ‘늦게 읽히는 작가’라는 점에서다. 전시는 6월 14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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