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 글 써보는 '필사 카페', 인문문화축제 대표 프로그램으로
천근성 작가가 만든 필사카페의 힘…"예술로 자연스런 관계 맺기"
참가자 "재소자 글에 간절함 느껴…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단 생각"
천근성 "손으로 쓰고, 그리고, 생각하는건 AI에 안넘겨 줬으면 해"

천근성 작가가 22~23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제2회 인문문화축제'에서 '필사카페'를 운영했다. (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김주희 기자 = "한 번 읽는 것보단 직접 써보는 게 마음에 더 새겨지잖아요."
23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야외 잔디언덕에 마련된 '필사카페'는 여느 카페와는 전혀 다른 풍경을 빚어냈다.
천막과 박스로 지어진 움막과도 같은 카페 공간에는 열 명 남짓한 손님들이 모여앉아 자신이 고른 글 한편을 옮겨 쓰고 있었다. 벽과 바닥에는 앞선 방문객들이 남긴 손글씨가 빼곡히 붙어 '작은 전시'를 이루고 있었다.
'필사 카페'를 만든 천근성 작가는 이날 만큼은 바리스타 역할까지 맡아 손님들이 정성스레 필사한 글을 건네 받고, 그 대가로 따뜻한 커피와 차를 내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는 "준비된 글을 곰곰이 읽어보고, 각자의 손글씨로 정성스럽게 옮겨 적는 모습을 보면 감동적이다"라며 활짝 웃었다.

천근성 작가가 22~23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제2회 인문문화축제'에서 '필사카페'를 운영했다. (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필사카페: 돈 대신 글을 받습니다'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가 22~23일 개최한 '제2회 인문문화축제'의 전시 프로그램이다.
'필사 카페, 돈 안 받아요. 글 받아요'라는 간판 글귀처럼 손님이 글 한 편을 필사하면, 천 작가가 따뜻한 차를 대접하는 방식이다. '예술의 가치가 일상 속에서 어떻게 교환될 수 있는가'라는 축제 취지가 이 작은 카페 안에서 구현된 셈이다.
필사에 사용되는 글은 한국형 클레멘트코스 '디딤돌 인문학' 참여자들이 쓴 시와 수필로, 교정시설 재소자·노숙자 등을 대상으로 인문 경험을 통해 삶의 회복과 사회 복귀를 지원하는 아르코의 인문사업이다. 손님들은 30여 편 가운데 마음에 드는 글을 옮겨 적고, 직접 카페 벽에 붙여 또 다른 손님에게 전한다.
천 작가는 "재소자나 노숙인과의 관계 맺기는 자칫 시혜로 비칠 수 있어 조심스러웠다"며 "그래서 예술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방식을 고민했다"고 말했다.
이어 "필사는 읽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지 않나. 그만큼 그 문장에 더 마음이 머물게 된다"며 "(필사한 글과 커피의 교환은) 예술 노동의 대가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에게 스스로가 가치 있다는 걸 즉석에서 깨닫는 순간이 될 수 있다"고 '필사카페'의 의미를 부여했다.
천 작가는 올해 초 '수원역전시장커피'에서 70대 이상 손님들에게 커피값 대신 손님이 그린 그림을 받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 축제에서는 필사를 택했다.
"카페라는 공간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잖아요. 편하게 와서 차 한잔 하면서 글을 읽고, 생각지도 못한 마음을 발견할 수도 있죠. 이렇게 가벼운 관계맺기에서 시작되기를 바랐어요. 시와 수필이 재소자·노숙인들과 일반인들 간의 일종의 브리지 역할을 하는 셈이죠."
현장 반응은 뜨거웠다. 첫날 100명 정도를 예상했지만 200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아 글을 쓰고 차를 받아갔다. 이튿날에도 7세 아이부터 60대 부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카페를 찾아 집중해 글을 읽고 필사했다.
한 50대 남성 방문객은 "교정시설에 계신 분이 쓴 글을 필사했는데 (그 분의)간절함이 느껴졌다"며 "나도 오늘 하루를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커피까지 무료로 받아 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천근성 작가가 22~23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제2회 인문문화축제'에서 '필사카페'를 운영했다. (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디지털 문화가 일상이 된 시대에 '손으로 쓰는 경험'이 주는 울림도 컸다.
천 작가는 "AI(인공지능) 시대에는 클릭 만으로 글이 생성되고 그림이 그려지지만, 손으로 쓰는 시간 만큼은 기계에 넘기지 않았으면 한다"며 "필사는 문장을 깊게 머무르도록 하는 행위"라고 강조했다.
카페 공간을 천막과 박스로 꾸민 데에는 홈리스의 삶을 상징하는 장치로서의 의도도 담겼다.
그는 "박스는 누군가에게는 집을 짓는 벽돌이고, 무료급식소 앞에서 자리를 잡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며 "그런 상황과 의미를 자연스럽게 공유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행사가 끝나면 손님들이 쓴 글이 담긴 박스들은 무료 급식소 주변 등 노숙인들이 지내는 곳에 가져다 둘 계획이다. 카페에서 또박또박 쓰여진 문장들이 도시 곳곳으로 흩어져 또 다른 '관계 맺기'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천 작가는 "언젠가 다른 장소에서 다시 그 박스를 발견한다면, 이 때의 감정과 경험이 떠오르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이번 인문문화축제에서 필사카페는 일상의 형식을 빌어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글쓰기와 생각하기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통로가 됐다. 관람객들은 단순한 소비가 아닌 '나눔'의 경험을 하며 서로의 마음이 연결되는 순간을 체감했다.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는 리뷰가 많더라고요. 저도 충만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감성 카페에서는 커피잔을 찍지만, 여기선 대부분 본인이 쓴 글을 찍어 가시더라고요. 그게 이 카페의 의미 아닐까요."

천근성 작가가 22~23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제2회 인문문화축제'에서 '필사카페'를 운영했다. (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