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뉴시스] 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 “(휘트니미술관) 테라스는 말 그대로 허드슨강과 하이라인 중간에 있죠”
2016년 뉴욕에서 활동하는 버지니아 오베르톤(Virginia Oberton)작가는 휘트니미술관의 야외 공간인 5층 테라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높지도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5층 높이는 빌딩숲으로 가득한 대도시의 모습을 적절히 담아낸다. 동시에 뉴욕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도 있다.
바로 허드슨 강이다. 야외 테라스에서 전시를 하게 된 작가는 이곳을 가득 채운 ‘바람’에 집중한다. 하루 종일, 일년 내내 부는 바람을 휘트니미술관에 한 번이라도 와 본 사람은 안다. 이렇다 할 소리도 색도 아무것도 없지만 온 몸으로 느껴지는 존재감. 그 막막한 존재를 작가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작은 풍차와 그와 연결된 화분 연못으로 시각화 했다. (Virginia Overton: Sculpture Gardens, 2016)
최첨단의 경계에서 시작한 휘트니미술관
1931년 일명 ‘철도왕’으로 불리던 코넬리어스 밴드빌트의 손녀이자 미술가였던 거트루드 밴드빌트 휘트니(Gertrude Vanderbilt Whitney)는 자신이 수집한 미술품 700여점을 메트로폴리탄에 기증하려 했으나 ‘검증되지 않은 젊은 미술가들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거부됐다. 그의 컬렉션을 받아줄 기관이 없어지자 결국 미술관을 세운 것. ‘동시대 미국 예술작품을 보여주는 플랫폼’이라는 정체성은 휘트니의 자랑이자 어려움이기도 했다. (그래서 미술관의 공식 명칭도 휘트니 미국 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다) 최첨단에 서서 미술의 경계를 넓히는 작업은 비난과 찬사의 대상이 된다. 마치 맨하탄의 가장 서쪽, 피어 53 인근에서 강바람을 온 몸으로 맞고 견디는 미술관처럼 말이다.
시작부터 미국 신진작가 지원이 사명이었던 휘트니미술관은 1932년 젊은 (미국)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회로 ‘휘트니비엔날레’를 시작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미술제의 시작이다. 백남준을 비롯 제니 홀저, 에드워드 호퍼, 마크 브래드포드, 로이 리히텐슈타인, 글렌 리곤, 신디 셔먼 등 3600여명의 작가가 휘트니비엔날레를 거쳐갔다.
휘트니비엔날레는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1993년 당시 휘트니 비엔날레 관장인 데이비드 로스는 첫 해외 전시로 일본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백남준이 주제인 ‘경계선’(Borderline)에 더 적합한 곳이 한국, 서울이라며 적극 추천했던 것. 덕분에 뉴욕을 벗어나 열린 유일무이한 휘트니비엔날레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릴 수 있었다.
가장 파격적인 컬렉션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른 일요일 아침’(Early Sunday Morning,1930)은 작품을 완성하고 몇 달 만에 휘트니미술관의 초기 컬렉션에 포함됐다. 이 그림의 배경이 된 7번가 건물은 호퍼의 스튜디오가 있었던 워싱턴스퀘어에서도 가깝다.
호퍼는 제 1회 휘트니비엔날레 참여작가이기도 하며 작고 전인 1965년까지 29번의 비엔날레와 기획전, 그룹 전시에 참여했다.
뿐만 이랴 조지아 오키프, 제이콥 로렌스, 알랙산더 칼더, 노만 루이스와 같은 미국 추상작가들의 작업도 주요 컬렉션으로 꼽힌다. 특히 칼더의 ‘서커스’(1926-1931)는 작가가 줄타는 곡예사부터 칼잡이, 사자 조련사 등 서커스 공연자들의 모습을 움직일 수 있는 형태로 제작한 미니어처다.
휘트니 소장품에는 칼더가 이들을 직접 시연하는 영상도 포함되어 있다. 대상의 움직임을 핵심만 포착하여 구현해내는 거장의 눈썰미가 지금도 감탄을 자아낸다. 미술관은 거트루드 휘트니의 컬렉션은 “작가들이 미국 라이프의 복잡함과 아름다움을 독특하게 드러낸다”고 설명한다.
몇 번의 이사 끝에 지금의 자리로
1964년부터 2014년까지 약 50년을 함께한 곳이다.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가 디자인한 이 건물은 위로 올라갈수록 면적이 커지는 계단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듯한 모습으로 찬사와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육중한 콘크리트엔 작은 창문 몇 개만 달려있었는데, 모두 직사광선이 들지 않게 설계해 작품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미술관으로서는 최적의 건물이었다. 늘어나는 컬렉션과 전시수요를 위해 새로운 건물로 미술관이 이전하고 나서도 브로이어 빌등은 계속 비슷한 용도로 쓰이고 있다.
2020년까지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분점으로 운영되다 2021년부터 올 3월까지는 프릭 컬렉션이 본 건물을 리모델링 하는 동안 임대해서 사용했다. 현재 이 건물의 주인은 글로벌 경매사 소더비다. 2023년 6월 매입하면서 본사 건물로 사용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현 휘트니미술관은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설계, 2015년에 완공했다. 전체 8층, 20만 제곱피트(약 5만 6000평) 규모로 이전 건물(7만6830 제곱피트)보다 2배 넘게 커졌다. 1977년 ‘퐁피두센터’로 일약 스터덤에 오른 렌조 피아노의 건축은 유리와 철근을 재료로 최첨단기술을 아낌없이 활용한다. 브로이어처럼 파격적이지만 자연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좀 더 열린 느낌이 든다. 이전 개관 당시 뉴욕타임즈는 4개의 테라스와 야외로 연결된 계단, 허드슨강을 내려보는 창문 뷰를 언급하며 브로이어 빌딩에 비해 좀 더 개방적이라고 평가했다.
외부로 이어지는 테라스, 외부와 소통하는 미술관
이에 테라스는 소통의 공간이 됐다. 공연, 이벤트가 1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 작가들에겐 훌륭한 외부 전시장이고 관객들에겐 쉼터이자 ‘즐기는 곳’이다. 이전 개관 직후엔 마리 하일만(Mary Heilmann)이 계단에서 착안한 직선이 살아있는 1인용 의자를 놓고 관객들에게 적극적으로 쉬라고 유도했다.
도시와 미술관이 상호작용 하라며 “미술관은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최근 막을 내린 2024 휘트니비엔날레에선 키안 윌리엄스가 침몰하는 백악관 파사드를 검은 흙으로 지어 이곳에 설치하기도 했다. 허드슨 강바람에 펄럭이는 거꾸로 매달린 성조기가 ‘미국은 (이미) 망해가고 있어’라고 외치는 듯 한 파격적이고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오는 9월 25일부터 토크와세 다이슨의 대형 조각 ‘액체 그림자, 고체 꿈-수도승의 놀이터’(Liquid Shadows, Solid Dreams-A Monastic Playground)가 설치될 예정이다.
이미 휘트니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바 있는 작품으로, 5층 메인 테라스로 이동한다. 작가는 관객이 조각 위에 앉고 눕고 기대어 자유롭게 즐기라고 기대한다. 마치 놀이터처럼 말이다. 이 같은 움직임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자유란 움직임과 상상의 한계가 어디인지 계속 공간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작가가 늘 고민하는 ‘추상과 흑인됨의 결합’은 이렇게 자유에 대한 역사적 사유를 바닥에 깔고 있다. 테라스에서 선보이는 대형 조각 전시는 현대차가 휘트니미술관과 파트너십으로 신설한 ‘현대 테라스 커미션’의 일환으로 열린다. 10년 간 이어지는 프로젝트는 올해가 시작이다. 앞으로 어떤 작가들이 테라스 정원에서 관객들과 소통할지, 미래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