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 PD로 일하다 쓰러진 후
달리기 시작…'해피러너'로 삶 바꿔
에세이 '마라닉 페이스' 출간
[서울=뉴시스]조수원 기자 = "'달리기'라는 단어를 들으면 사명감을 느껴요. 나를 성장시켰으니까."
2013년부터 달리기를 시작한 이재진(49)은 이제 '마라톤 전도사'로 달라진 삶을 살고 있다. 매일 10km를 하루도 빠짐없이 달리고 있는 그는 러닝 유튜브 채널 '마라닉 TV'를 운영하며 행복한 달리기를 전파하고 있다. 평일에는 혼자, 주말에는 동호회원들과 또 뛰는 그는 자신을 '해피러너'라고 칭하고 있다.
그는 속도보다는 명확한 방향을 우선시하는 달리기, 내 몸에 맞춘 달리기인 ‘마라닉 페이스’로 달려볼 것을 권한다. '마라닉'은 마라톤과 피크닉의 합성어다.
"마라닉은 운동도, 힐링도, 좋은 사람들과의 친목 도모도 되는 엄청난 개념입니다. 초보시절 마라톤을 소풍처럼 하면서 멈춰서 사진도 찍고 힘들면 걷기도 했어요. 가방에 김밥과 음료, 맥주 같은 걸 사서 들고 뛰다가 경치 좋은 곳에 앉아서 먹기도 하면서 달렸거든요."
"누군가와 함께 달리는 게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놀라웠다. 우리는 주말마다 만나 공원과 숲길, 산과 바다를 달렸다. '달렸다'라고는 하지만, 중간중간 걷고 사진 찍고 각자 배낭에 싸 온 간식들을 꺼내 먹으며 시시덕거리는 시간이 더 많았기에 초보인 나도 부담 없이 함께할 수 있었다. 어떤 날은 달린 시간을 다 합쳐도 30분이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42쪽)
'해피러너'에서 최근 에세이 '마라닉 페이스'까지 출간한 그를 만났다.
진짜 나답게 살 수 있게 된 여정을 풀어놓은 이 책은 단순히 달리기 그 자체에 관한 책이라기보다 달리기로써 달라진 삶에 대한 증언이자 제안이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기 전 2000년부터 2016년까지 방송사에서 PD로 근무했다. '영상 콘텐츠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어릴 적 꿈이었다. 하지만 16년 동안 PD로 있었던 시간은 되려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고 했다.
"만들고 싶은 좋은 콘텐츠와 영향력 있는 콘텐츠, 개인적인 어떤 PD로서 자질 등 그 차이에서 오는 열등감과 뛰어난 사람들을 비교하면서 나 스스로 자책하던 시간"이었다며 "불안과 자존감 낮은 상태, 스트레스를 술과 담배로 풀었던 시간이었다."
2012년은 그의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됐다. 늦은 퇴근 시간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서 버스를 탄 그는 순식간에 쓰러져 기억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응급실 침대였다.
"서른다섯 살이 저물어가던 밤이었다. 모두가 연말 분위기로 들떠있는 시간, 나는 만원 버스 바다에서 비명을 지르며 뒹굴고 있었다. (중략) 핏기를 잃은 팔뚝에 바늘이 꽂히고 수일 같았던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통증이 잦아들었다. 커튼을 걷어 젖히고 의사가 들어왔다. 그의 입을 떼기 전부터 나는 이 고통의 원인을 이미 알고 있었다. 똑같은 증상으로 응급실에 실려 온 게 벌써 세 차례나 되기 때문이다. 급성 위경련."(15~16쪽)
이재진은 "거의 기절하듯이 의식을 잃어서 마지막 응급실에서 나올 때는 '이대로는 죽겠다 정말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마음까지 무너져 있는 이 상태를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던 시기가 있었다"고 했다.
"달리기? 그건 얼마든지 내 힘으로 해볼 수 있는 거잖아? 매일 직장에서 침대에서 쿵쾅대는 심장 소리에 가슴 조이며 살아갈 바에는 내가 스스로 심장을 뛰어보게 해보자. 그렇게 나의 달리기는 시작되었다."(19쪽)
두 아이의 아빠인 그는 살기 위해 술과 담배를 끊고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 한 운동은 달리기가 아닌 수영과 자전거 타기였다.
"자전거와 수영을 잠깐 했는데 수영강좌 등록도 실패하는 경우가 있었고 자전거는 넘어지니 크게 다치기도 해서 루틴으로 하지는 못했다"며 "다른 운동에 대한 대안을 생각도 못 하고 있을 때 달리기하는 친구가 1년간 설득해 온 게 (머리에) 딱 박힌 거죠."
그렇게 시작한 달리기의 첫날은 열등감을 제대로 털어내지 못한 시간이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어정쩡한 폼에, 걷는 건지 달리는 건지 모를 속도였기에 다들 나를 보고 피식대며 비웃는 것 같았다. 저 멀리서 멋진 자세로 달려오는 러너가 보이면 나도 모르게 발이 멈춰졌다. 그러곤 산책 나온 사람처럼 어기적거리며 걷다가 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다시 달렸다."(80쪽)
남을 신경 쓰지 않는 달리기를 해야겠다고 깨달은 건 한순간이었다.
이재진은 "내가 누구랑 경쟁하는 게 아닌데 그런 경쟁들이 싫어서 다른 운동을 접고 달리기를 시작해 놓고 '왜 내가 지금 빨리 달리려고 하는 거지'를 알아차렸다"며 "'천천히 달리자'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했다.
이날부터 달리기는 이재진의 삶 속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인생 2막도 펼쳐졌다.
PD 생활을 청산하고 콘텐츠 외주 제작사업을 거쳐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러닝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주변의 부정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을 느꼈다. 달리기로 충분히 길러낸 체력과 기존 러닝 채널 분석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재진은 "즐겁고 체력도 올라오고 잘 달리고 있으니 저 같은 사람들에게 (달리기의) 기술적인 부분들을 다 빼고 마인드를 즐길 수 있도록 변화와 성장 스토리를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꾸준히 달리는 삶을 지키며 올해 4월에는 보스턴 마라톤까지 완주했다.
"마지막 1km 표지판을 지나쳤다. 힘들지만 환상적인 이 레이스가 곧 끝난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아쉬움이 동시에 들었다. (중략) 피니시 라인을 드디어 밟는 순간, 수없이 그려오던 그 장면 그대로 나는 두 팔을 치켜든 채 내 모든 과정들을 자축했다. 이윽고 상상했던 그대로 내 목에 유니콘이 새겨진 완주 메달이 걸렸다. 죽는 순간 떠오를 또 하나의 명장면이 내 머릿속에 그렇게 각인되었다."(263쪽)
PD에서 러너로 변신한 이재진은 달려온 과정을 돌아보며 마라닉 페이스가 가져온 성장을 체감했다. "20번 넘게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고, 보스턴 마라톤까지 다녀올 수 있을 정도의 속도와 기록을 낼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마라닉 페이스에서 시작됐다."
이 책은 건강 증진은 물론 정신 건강, 삶의 태도와 가치관 등 마음가짐까지 변화시키는 달리기의 이로움을 알려주고, 하우투를 전한다.
속도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면서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다는 그는 "아주 천천히 원하는 것을 이루는 법에 대해 지금은 안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원하는 걸 빠르게 이룰 수 있는 왕도는 없다. 모든 일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당장에 담뱃갑을 구겨 휴지통에 집어 던졌고, 달리기로 마음먹곤 ‘식스 팩’까지는 아니어도 출렁이는 뱃살은 없애버리기로 결심했다. 거울 속 생기 잃은 내 얼굴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 실려 다니다 불식간 생을 마감할지 모를 끔찍한 상황은 만들면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야근을 밥 먹듯 한 그 거대한 닭장 같던 건물에서 빠져나오겠다는 결심도 그 무렵에 했다. 그리고 40대 중반이 된 지금, 그 모든 결심대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하는 결심들이 10년 후의 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58쪽)
달리면서 인생을 배운 이재진은 말한다. "결국 자신감이란 단순히 ‘할 수 있다’는 느낌을 넘어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법과 지식을 내재화하는 과정이다. 직접 부딪쳐 얻은 경험. 바로 이것이 진정한 자신감의 원천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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