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재조명
가족 잃고서도 항쟁정신 실천·계승 '앞장'
[광주=뉴시스] 변재훈 기자 = 제43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는 가족을 먼저 보낸 아픔 속에서도 항쟁 정신을 지켜온 오월어머니들의 삶이 재조명됐다.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43주년 5·18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오월의 어머니'와 함께 입장했다.
기념식 중에는 슬픔을 억누르고 살아온 오월 어머니의 43년 세월을 소개한 영상과 함께 헌정곡 '엄니'가 울려퍼졌다.
'오월 어머니'는 졸지에 자식과 남편을 잃고 지난 43년간 서로의 아픔을 보듬었다. 5·18 진상규명과 항쟁 정신 알리기에도 앞장섰다.
서슬퍼런 군부 독재 치하 항쟁 직후 '폭도의 가족'이라는 낙인 속에서 숨죽여야 했다. 그러나 항쟁 이후 한 달 넘도록 생사조차 알 수 없거나 영문도 모르고 죽은 내 남편, 내 아들, 내 딸의 억울함은 풀어야 했다.
가족의 구금, 사망에 발 벗고 나선 30여 명이 항쟁 직후 1980년 9월 말 '5·18구속자가족회'를 꾸렸다. 무작정 연행·구금돼 있는 가족의 행방을 찾아 발로 뛰며 '우리는 구속자 가족들이다'라고 외치면서 자연스럽게 이름 붙여졌다.
공안 당국의 감시·견제와 회유, 방해 공작 속에서 변변한 사무실도 없이 알음알음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석방·사면을 위한 탄원, 사망 진상 규명 활동에는 모두 내 가족의 일처럼 한데 힘을 모았다.
당시 군사 재판에서 이른바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사형·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자 투쟁 최전선에 섰다. 단식 농성과 미국 문화원 점거 투쟁 등을 벌이며 오월 어머니는 똘똘 뭉쳤다.
1982년 12월 '5·18 사형수' 고 정동년 씨 등을 끝으로 5·18구속자들이 풀려나지만 오월 어머니는 또 다른 가족을 품었다.
5·18 진실 규명을 외치다 구속되거나 다친 학생·노동자들의 탄원·지원 활동도 펼쳤다. 1980년대 신군부 독재로 고초를 겪는 민주 인사의 석방 투쟁을 벌이는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에도 힘을 보탰다.
항쟁 20주년을 맞던 2000년에는 오월여성회로 이름을 바꿨다. 회원 대다수는 5월 항쟁에서 사망, 부상, 구속된 피해자 가족이었지만 일부는 직접 항쟁에 뛰어든 여성도 있었다.
이후 오월어머니회로 재정비했고, 2006년에서야 광주 동구 장동의 한 주택을 기부받아 쉼터·사무실을 마련, '오월어머니집'으로 이름 붙였다.
오월어머니집은 2014년 지금의 남구 양림동 2층 신축 건물로 옮겼고 이 무렵 사단법인 단체로 등록했다. 현재 공식 명칭은 '오월어머니집'이다.
그 사이 희생·부상자의 가족들도 함께 하며 회원은 100여 명으로 늘었다.
시민군이 마지막까지 계엄군에 맞섰던 5·18 최후 항쟁지를 지켜낸 것도 오월어머니였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조성 사업 일환으로 옛 전남도청을 개축하는 과정에서 항쟁 현장이 훼손되자, 원형 복원을 요구하며 지난 2016년부터 2081일째 도청 별관 1층을 지키고 있다.
연대와 나눔의 광주 정신을 실천하는 표상이기도 했다. 오월 어머니는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이들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세월호 참사 당시에는 팽목항을 찾아가 4·16유가족들을 품에 안아 위로했고 지난해 1월 광주 신축 아파트 붕괴 사고 현장에서는 피해 가족들을 위한 따뜻한 밥 한 끼를 해먹였다.
오월어머니집은 현재 항쟁 정신 계승 교육, 오월어머니상 시상, 민족 화해를 위한 국내·외 교류, 회원들의 트라우마 치유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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