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108년 된 '춘포 도정 공장', 폐허→전시공간으로 변신
서문근 대표, 4년 전 쓰레기 더미 가득한 폐공장 매입 꾸며
조덕현 작가, 지역 사진 찍다 우연히 발견...1년간 전시 프로젝트 추진
김용택 시인, 조 작가와 만남 혁신적인' 유리 시화전'..."이게 예술"
'108 and: 어둠과 빛, 바람과 비의 서사'展 개관…N차 관람 이어져
방탄소년단 화보 촬영한 완주 오스갤러리·아원고택까지 전시
[익산=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세상은 누군가의 상상 속 현실이다."
108년 세월을 품은 도정 공장이 폐허를 딛고 예술이 됐다. 쓰레기 더미에 '개굴창' 같던 공장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에너지 넘치는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거듭남의 미학'이 흐르게 된 건 세 남자의 상상과 열정, 그리고 기쁨 때문이다.
인적이 드문 전북 익산 '춘포 도정 공장' 갤러리는 마치 '웜홀(Wormhole)'같았다. 서울에서 KTX 기차로 1시간 20분, 익산에서 춘포까지 20분 거리에 그 건물이 있다.
'춘포 도정 공장'. 일제 강점 시기인 1914년 춘포 일대를 소유했던 일본인 대지주 호소카와 모리다치(細川護立, 1883~1970)가 인근 농토에서 거둬들인 벼를 현미로 가공하여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세운 정미소였다. 이후 1998년까지 운영하다 버려졌다. 108년의 역사속에서 흔들렸지만 부러지지 않은 공장은 질긴 운명이었다. 20년 만에 한 남자를 만나면서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쓰레기 10톤을 치웠어요."(서문근 대표)
그러자 죽어 있던 건물, 거칠게 긴장하던 풀과 나무들이 부드러워졌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어둠을 빛으로 끄집어내 온 세 남자를 익산에서 만났다. 춘포도정공장을 운명처럼 사들인 서문근 대표, 우연히 사진 찍다 들어온 작가 조덕현(이대 명예교수), 섬진강 시인 김용택. 이들은 이전에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다. 오로지 '춘포 도정 공장'이 처음 이어준 인연이다.
'춘포 도정 공장 갤러리' 서문근 대표 VS 작가 조덕현
서울에서 퇴직을 하고 고향에 내려온 서문근 대표는 이리저리 건물을 알아보고 다녔다. 4년 전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춘포 도정 공장이었다. 완전한 폐가였다. '다크 투어'팀들이 몰래 오가곤 했다는 소리도 들었다. 약 700여평의 공장, 터는 좋았다. 딱 가지고 있던 돈 만큼 흥정이 됐다.
그렇게 사들인 공장건물에 대해 말이 많았다. 아파트를 지어라 건물을 새로 지어라...그는 "카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방치한 시간의 무게는 10톤의 쓰레기로 처리됐다. '귀신 나올 것 같던' 폐공장이 그 옛날 미곡을 쌓아 보관하는 창고의 모습을 드러냈다.(익산은 예로부터 곡창지대로 이름이 높았다.) 매일 청소하고 매만지고 바라보며 그는 춘포 공장에 푹 빠졌다. "멍때릴 때가 많았어요." 무엇을 해야 하나. 이 너른 공간을 어떻게 살려낼까.
어느 날 그가 나타났다.
"작년 7월15일 날짜도 정확하게 기억합니다."(조덕현 작가)
작가 조덕현은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춘포 도정 공장은 진짜 우연히, 99% 우연으로 왔습니다."
그의 인생에 도정 공장은 물론 춘포는 없었다. 이화여대 교수직을 퇴임하고 우리나라 오래된 지역에서 사진을 찍고 다녔다. 그날도 전북 지역 마을을 찍으러 왔다. 충남과 전북이 마주치는 지역 강경에 도착해 새벽에 촬영하러 갔다가 낭패를 당했다. 골목길 안에 들어서는 순간 알았다. 좁은 길에서 렌트카는 반파가 됐다. "새 차인데...오늘은 완전히 망쳤다. 재수가 없으니 호텔 가서 쉬자"하고 차를 모는데 맑은 물 같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나 한테 얼마나 좋은 일이 있으려고 이런 일이..." 33년간 운전했지만 자동차 사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전주에 있는 숙소에 가는 중 중간 기착지로 네이버 지도를 찾아보니 '춘포'가 보이더라. 점심을 먹으려고 춘포 맛집 사랑방 한식 백반집에 갔어요."
밥을 먹고 나니까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동네를 볼 겸 식당 건너편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거기에 그 공장이 있었다. 마침 철문 쪽문이 열려 있었다.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제가 웬만하면 문열렸다고 안 들어갑니다. 사진 찍을 때 나의 예술행위를 빙자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자'는 철학이거든요. 정 찍고 싶으면 허락을 받고 촬영하는데, 그날은 안 찍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홀려 들어가듯이 들어갔는데, 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어디서 오셨어요?"
심장이 철렁했다. "제가 사진작가인데요(아닌데...아무 말 대잔치였다)"
그렇게 만난 서문근 대표는 기골이 장대했다. "사진 몇 컷 후다닥 찍고 나오려는데 붙잡더라고요. 혹시 알고 왔냐고 묻더니 건물을 소개하겠다 해서 따라 들어갔어요."
서 대표는 한눈에 알아봤다. "아, 이 사람이 이 건물을 좋아하는구나." 그는 "사람들이 공장을 대하는 게 다르다"고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면 걸음이 빨라져요, 잰걸음을 하죠. 조 작가가 그랬어요."
서 대표에 이끌려 들어간 공장은 1번방부터 7개의 공간으로 나눠 있었다. 낡았고 심란했다. "오죽하면 집사람이 와서 보고 전시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무너져서 사람 다칠 것 같다고."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 건물은 제게 엄청나게 미학적으로 보였어요. 한 여름에 (건물에)뻥뻥뻥 구멍이 뚫렸는데 그 아래 빛의 점이 뚝 떨어져 있는데...와우~"
그게 시작이었다. "뭐한 테 씐 것 같이 온 공장, '만물공장설'로 끝나는" 서문근 대표와의 '철렁한 만남'은 어느새 전시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그렇게 엉겹결에 조덕현 개인전 '108 and: 어둠과 빛, 바람과 비의 서사'전이 지난 4월22일 개막했다. 허름한 건물을 그대로 살려 자연과 어우러진 전시다. 공장과 내외부에 설치된 작품들을 정원사가 철에 따라 정원을 가꾸듯 손보고 살피는 '실험적' 프로젝트를 1년 동안 진행한다.
조용했던 전시는 "나 혼자 보기 아깝거나", "나만 보고 싶은 전시"로 입소문을 탔다. 전시를 후원한 PKM갤러리 박경미 대표는 '혼자 보기 아까운' 쪽으로 미술인들을 이끌고 있다.
6개월간의 1부 전시를 끝내고, 최근 2부 전시가 열렸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합류해 시공간을 넘나드는 전시는 마치 '비엔날레급 전시장' 같다는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이 전시는 '춘포 공장'에서 확장되어 완주 오스 갤러리와 방탄소년단( BTS) 화보촬영지로 더 유명세인 '아원 고택'으로 이어진다.
김용택 시인이 미발표한 짧은 시들이 투명 아크릴과 유리창에 쓰여지거나 물에 담겨 선보이는 전시는 기존의 시화전을 혁신한 분위기다. 미술과 문학의 진정한 공생, 새롭고 신선한 교류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화가 조덕현 vs 시인 김용택 "상생 공생 기쁨 감사함"
익산 춘포 도정공장에서 열린 조덕현 개인전이 허름한 전시장에도 '있어빌리티(있어+bility)'한 건 작품과 연출력의 힘이기도 하지만, 윤이상 음악 덕분으로도 보인다. 폐건물이 평화롭게 보이는 배경이기도 하다.
서늘한 가을 바람, 오래된 시멘트 구멍에 집을 진 거미, 땅에 떨어진 갈색 낙엽, 초록의 낮은 풀, 바람에 하늘거리는 담쟁이 이파리, 그리고 투명한 유리창에 써 있는 김용택 시인의 시들을 마음에 와 닿게 하는 건 '윤이상의 음악 선율'이 보일 듯 말 듯 날아다니는 나비의 리듬처럼 흐르기 때문이다. 서걱서걱한 풍경을 말랑하게 물들인다.
이는 작가 조덕현의 꿈이 실현된 상상이다. "윤이상의 음악을 센 것만 생각하는데 말년 윤이상의 음악은 평화롭다"는 그는 "음의 정원' 컨셉의 정원을 꾸미는 것 같은 전시를 반영구적으로 진행하고 싶었는데, 지금 이 전시장 조건이 딱 맞아떨어졌다"고 했다.
"윤이상 음악을 선택하면서 김용택 시인이 겹쳐 보였어요."
익산에서 40여분 걸리는 섬진강을 찾아가 시인 김용택을 만났다.
"짧은 시들이 좋더라고요. 여백이 있으니까. 특히 요즘에 쓴 시들은 서정이 넘쳤어요. 여러 번 읽었지요. 너무 좋아서 더 넣고 싶었는데 공간의 제약으로 뺀 시도 많아요. 시들에 죄송할 정도로요. 하하~"
시인이 내준 미발표 원고 130여편을 읽고 또 읽고 읽고 풀어낸 전시는 그야말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게 모든 문장이 제자리에 놓여있는 느낌이다.
얼키설키한 나무건물 속살이 그대로 내보여진 공간에 시인의 시를 유리에 담아냈다. 희고 얇게 여리게 쓰여진 시들은 시공간을 관통하는 빛처럼 존재감을 발한다.
작가 조덕현은 사진같은 사실적인 회화로 근현대의 시간 속 개인의 실존과 운명을 재조명하고, 망각된 삶의 기억을 섬세하게 복원하여 서사적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이번 전시도 그 연장선이다.
"일단 공장 건물 자체가 슬픈 존재입니다. 자기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을까? 지금까지 오면서 오해와 오명도 많았어요.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바지한 부분도 있었고 그러다 버려졌지요. 폐가로 있다가 되찾은 것은 사연이 보통이 아니구나. 여기서 내가 작업을 뭘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역사성과 대결은 벅찼다. "이 공간과 공간이 주는 물리적인 대상이 있지만 이 지역사람들의 삶, 결국 이 모든 게 '우리나라 근현대사다"라고 생각하자 실마리가 풀렸다."
그러다 이춘기씨를 찾아내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춘포 태생의 실존 인물 이춘기(1906-1991)를 중심으로 전시가 엮어졌다. "이 씨는 무명인으로 처절하게 살다가 돌아가신 분이예요.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삶의 열정을 쏟아낸 몸부림, 그 분이 도달하고 싶었던 지점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춘기 씨의 일기는 이중섭 못지않은 필력과 화력이 돋보인다. 무명 촌부의 솜씨라고는 믿기지 않는 편지와 일기는 한쪽 벽에 빼곡히 전시되어 마치 피라미드 같은 '인생 역사 무덤'처럼 보인다.
거칠었던 폐공장, 순수해지기까지...'어둠과 빛, 바람과 비의 서사'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조덕현의 대규모 설치작업과 그림 전시와 함께 살포시 얹혀진 듯한 유리창의 시, 김용택 시인의 시들은 절로 발걸음을 멈추고 집중하게 한다.
관심을 받고 있는 건물, 그 땅에서 올라온 풀들은 보들보들하다. 그 사이 사이에 툭 툭 놓여진 물그릇 안에 시가 들어앉았다. 맑은 물속에서 숨을 쉬는 '시어'는 매일 자연을 품어 새로움을 전하고,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인 사람들은 경탄한다.
조덕현 개인전에 초대된 김용택 시인도 깜짝 놀랐다. "야외는 장소마다 달라서 평화가 깨트려질 수가 있는데....특히 이곳은 거칠고 거칠어서 예술이 들어가 앉기에 무리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와서 볼때마다 놀란다"고 했다.
조덕현은 "시가 너무 좋아서 그런다"고 겸손함을 보였다. "시는 특히 텍스트가 중요하다"는 조 작가는 "시각적으로 해체해서 비주얼을 덧대기보다 '텍스트'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고 시 그림처럼 찾아낸 게 문체부 정자체"라고 했다. 실제로 감성어린 싯귀에 글씨체가 아름답게 똑 떨어진다.
"만약 시인이 시를 낭송한다면 그 목소리와 같다고 생각하는데 이 글씨체가 맞더라고요." 조 작가는 "미술의 영역에서 문학을 초대한다고 해서 흥분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문학을 짓밟게 된다. 공생, 상생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김 시인은 "내 여린 시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했는데, 몸과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이 너무 자연스럽게 시가 담겨 있다"면서 "밥 같기도, 국 같기도 하고 너무 평화로운 상태"라며 전시에 만족감을 보였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모든 것을)죽이지 않고 살려낼 수 있을까.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조 작가와 말을 나누던 일흔다섯살의 김용택 시인이 조용히 일어나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아이 같은 모습의 시인은 역시 시인이었다. 그의 감탄은 시처럼 나왔다.
"예술이라는 게 죽어가는 것들을 살리는 것이구나!." 전시는 2023년 4월22일까지.
조덕현 작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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