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업적 과대 해석…과거 오류 축소" 지적
톈안먼 사태 "엄중한 정치 풍파이자 동란" 기술
![[베이징=AP/뉴시스] 시진핑(가운데) 중국 국가주석이 11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 '6중전회'에 참석해 손을 들어 안건을 의결하고 있다. 이번 6중전회에서 시진핑 주석의 초장기 집권 명분이 담긴 역사결의가 채택돼 내년 당대회에서 시 주석의 세 번째 연임이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왼쪽부터 한정 중국 국무원 부총리, 왕후닝 중국 공산당 서기, 리잔수 전인대 상무위원장, 시진핑 주석, 리커창 총리, 왕양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자오러지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2021.11.12.](https://img1.newsis.com/2021/11/12/NISI20211112_0018149153_web.jpg?rnd=20211112184302)
[베이징=AP/뉴시스] 시진핑(가운데) 중국 국가주석이 11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 '6중전회'에 참석해 손을 들어 안건을 의결하고 있다. 이번 6중전회에서 시진핑 주석의 초장기 집권 명분이 담긴 역사결의가 채택돼 내년 당대회에서 시 주석의 세 번째 연임이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왼쪽부터 한정 중국 국무원 부총리, 왕후닝 중국 공산당 서기, 리잔수 전인대 상무위원장, 시진핑 주석, 리커창 총리, 왕양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자오러지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2021.11.12.
[서울=뉴시스] 문예성 기자 = 중국공산당이 16일 발표한 세 번째 역사결의, 즉 ‘당의 100년 분투의 중대 성취와 역사 경험에 관한 결의’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의 치적을 과도하게 치켜세우고 과거 오류를 너무 가볍게 다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16일 대만 연합신문망은 3만6000여자 분량의 세 번째 역사결의에서 시진핑은 22번 거론됐는데 이는 마오쩌둥이 18번 언급된 것보다 더 많다고 전했다.
덩샤오핑은 6번, 장쩌민 전 주석과 후진타오 전 주석은 각각 한 번씩만 거론됐다.
앞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8~11일 개최된 제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6중 전회)에서 세 번째 역사결의를 심의 및 의결했다. 이번 결의는 1945년 1차와 1981년 2차에 이어 중국 공산당 100년 역사상 3번째 역사결의다.
폐막 닷새 뒤인 16일 중국 공산당은 관영 언론을 통해 세 번째 역사결의의 전문을 공개했다.
시 주석의 집권 1기부터 현재까지 과정을 담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신시대 창립' 부분은 전체 분량의 절반이 넘는 1만9200여자를 차지했다.
반면 100년 당사 가운데 과오는 너무 가볍게 다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프랑스 국제라디오방송(RFI) 중국어판은 “1949년부터 1979년까지 30년 인재(人災)를 단 330자로 축소해 기술했다”고 전했다. 즉 마오쩌둥 집권 30년 동안 일어난 일련의 재앙적인 운동에 대해 세 번째 역사결의가 언급한 분량은 330자로, 전체의 1%도 채 안 된다.
최대 4000만명이 굶어죽은 결과를 초래한 대약진운동 등에 대해 세 번째 역사 결의는 "유감스럽게도 제8차 당 대회에서 형성된 바른 노선이 완전하게 유지하지 못해 '대약진운동', '인민공사화 운동' 등의 착오가 잇달아 발생하고 반우파투쟁도 심각하게 확대됐다"고 서술했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 지식인과 사회 전반에 심각한 상처를 남긴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직전 역사결의가 지적한 비판적 기조를 유지했지만 마오가 이용당했다는 주장을 담았다.
또한 두 번째 결의에서 문혁에 대한 '10년 하오제(浩劫·대재앙)'이라는 표현을 '10년 내란(內亂)'으로 평가수위를 낮췄다.
세 번째 역사결의는 “마오쩌둥 동지는 당시 국내 정세, 당과 국가의 정치 상황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예측을 했고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고 이끌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린뱌오(林彪), 장칭(江靑) 등 반혁명집단의 마오쩌둥 동지의 과오를 이용해 국가와 인민에게 큰 재앙을 가져온 범죄를 저질렀고, 10년 내란이 일어났다”고 비판했다. 결의는 “1976년 10월 중앙정치국은 당과 인민의 의지에 따라 ‘4인방(장칭 등 4인의 ‘반당집단’을 척결했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재앙을 끝냈다”고 부연했다.
중국공산당은 세 번째 역사결의에서 '6.4운동'으로 불리는 1989년 '톈안먼 민주화운동'에 대한 최초 평가도 내렸다. 그 서술은 97자에 불과했다.
톈안먼사태에 대해 "국제사회 반(反) 공산주의·반 사회주의 적대 세력의 지지와 선동으로 인해 국제적인 큰 기류와 국내의 작은 기류는 1989년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시기에 우리나라에 엄중한 ‘정치 풍파’를 초래했다"고 기술했다.
이어 "당과 정부는 인민을 의지해 동란(動亂)에 선명하게 반대하는 것을 기치로 삼고 사회주의 국가 정권과 인민의 근본 이익을 수호했다"고 부연했다.
반부패와 개혁 등을 요구한 대학생과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고, 군이 무비장 시위대를 유혈진압한 톈안먼 사태를 한차례 '정치 풍파'이자 '동란'으로 규정한 것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16일 대만 연합신문망은 3만6000여자 분량의 세 번째 역사결의에서 시진핑은 22번 거론됐는데 이는 마오쩌둥이 18번 언급된 것보다 더 많다고 전했다.
덩샤오핑은 6번, 장쩌민 전 주석과 후진타오 전 주석은 각각 한 번씩만 거론됐다.
앞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8~11일 개최된 제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6중 전회)에서 세 번째 역사결의를 심의 및 의결했다. 이번 결의는 1945년 1차와 1981년 2차에 이어 중국 공산당 100년 역사상 3번째 역사결의다.
폐막 닷새 뒤인 16일 중국 공산당은 관영 언론을 통해 세 번째 역사결의의 전문을 공개했다.
시 주석의 집권 1기부터 현재까지 과정을 담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신시대 창립' 부분은 전체 분량의 절반이 넘는 1만9200여자를 차지했다.
반면 100년 당사 가운데 과오는 너무 가볍게 다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프랑스 국제라디오방송(RFI) 중국어판은 “1949년부터 1979년까지 30년 인재(人災)를 단 330자로 축소해 기술했다”고 전했다. 즉 마오쩌둥 집권 30년 동안 일어난 일련의 재앙적인 운동에 대해 세 번째 역사결의가 언급한 분량은 330자로, 전체의 1%도 채 안 된다.
최대 4000만명이 굶어죽은 결과를 초래한 대약진운동 등에 대해 세 번째 역사 결의는 "유감스럽게도 제8차 당 대회에서 형성된 바른 노선이 완전하게 유지하지 못해 '대약진운동', '인민공사화 운동' 등의 착오가 잇달아 발생하고 반우파투쟁도 심각하게 확대됐다"고 서술했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 지식인과 사회 전반에 심각한 상처를 남긴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직전 역사결의가 지적한 비판적 기조를 유지했지만 마오가 이용당했다는 주장을 담았다.
또한 두 번째 결의에서 문혁에 대한 '10년 하오제(浩劫·대재앙)'이라는 표현을 '10년 내란(內亂)'으로 평가수위를 낮췄다.
세 번째 역사결의는 “마오쩌둥 동지는 당시 국내 정세, 당과 국가의 정치 상황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예측을 했고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고 이끌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린뱌오(林彪), 장칭(江靑) 등 반혁명집단의 마오쩌둥 동지의 과오를 이용해 국가와 인민에게 큰 재앙을 가져온 범죄를 저질렀고, 10년 내란이 일어났다”고 비판했다. 결의는 “1976년 10월 중앙정치국은 당과 인민의 의지에 따라 ‘4인방(장칭 등 4인의 ‘반당집단’을 척결했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재앙을 끝냈다”고 부연했다.
중국공산당은 세 번째 역사결의에서 '6.4운동'으로 불리는 1989년 '톈안먼 민주화운동'에 대한 최초 평가도 내렸다. 그 서술은 97자에 불과했다.
톈안먼사태에 대해 "국제사회 반(反) 공산주의·반 사회주의 적대 세력의 지지와 선동으로 인해 국제적인 큰 기류와 국내의 작은 기류는 1989년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시기에 우리나라에 엄중한 ‘정치 풍파’를 초래했다"고 기술했다.
이어 "당과 정부는 인민을 의지해 동란(動亂)에 선명하게 반대하는 것을 기치로 삼고 사회주의 국가 정권과 인민의 근본 이익을 수호했다"고 부연했다.
반부패와 개혁 등을 요구한 대학생과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고, 군이 무비장 시위대를 유혈진압한 톈안먼 사태를 한차례 '정치 풍파'이자 '동란'으로 규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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