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경사로 없어도 그만"…면죄부 주는 '이상한 법'

기사등록 2021/04/20 05:00:00

턱과 계단 때문에 편의시설 이용 제약

대다수 편의점 경사로 설치의무 면제

장애인 위한 법이 오히려 접근권 방해

[서울=뉴시스]정유선기자= 서울 시내 한 편의점 출입구 앞에 턱이 있는 모습. 2021. 4. 19.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정유선기자= 서울 시내 한 편의점 출입구 앞에 턱이 있는 모습. 2021. 4. 19.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정유선 기자 =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 A씨는 집 앞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본 적이 없다. 출입구 앞 턱이 있지만 경사로가 없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날인 20일 A씨는 뉴시스에 "편하라고 있는 게 편의점이지만 이용할 수가 없다"며 "그래서 온라인으로 물건들을 미리 많이 사두거나 집에 누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말했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장애인 등 편의법)이 제정된지 20년이 지났지만 장애인과 생활편의시설 간 거리는 좀처럼 가까워지질 않고 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편의점·미용실·식당 등 생활편의시설을 이용하기 위해선 출입구에 턱·계단이 없거나 경사로가 있어야 하지만 이런 조건을 갖춘 곳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지난 3월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발표한 조사 기준으로 대구 지역에 있는 CU편의점 매장 110곳 중 26곳에만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출입할 수 있다. 나머지 84곳은 턱이나 계단이 있는 채로 경사로가 설치되지 않아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다.

장애인들은 지역과 브랜드에 따라 약간의 편차만 있을 뿐 대한민국 어느 곳이나 사정이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불편함 만큼은 평등하게 적용되는 셈이다.

A씨는 "물건을 필요할 때 바로 살 수가 없으니까 가방에 물이나 약 같은 걸 바리바리 싸들고 다닌다"며 "외출할 때 들고 다니는 가방만 여러 개"라고 밝혔다.
 
시설 접근이 제한되다 보니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실현하는 데에도 제약이 있다. 

중증장애인 B씨는 "편의점 매장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활동 보조사가 대신 들어간 적이 있다"며 "물건을 직접 보고 고를 수 없어서 답답했다"고 전했다.

A씨는 "미용실에 갈 때 잘 하는 곳을 고르는 게 아니라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며 "들어가서도 (머리를 감아야 하는) 파마나 염색은 못하고 커트만 친다"고 전했다.
[서울=뉴시스]정유선기자=서울 시내 한 카페 출입구에 계단과 경사로가 함께 설치되어있는 모습. 2021. 4. 19.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정유선기자=서울 시내 한 카페 출입구에 계단과 경사로가 함께 설치되어있는 모습. 2021. 4. 19. *재판매 및 DB 금지
장애인 단체로 구성된 '생활편의시설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장애인 편의시설이 대폭 확충되지 않는 이유로 장애인 등 편의법을 지적한다.

1998년 제정된 장애인 등 편의법은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이 일상생활에서 안전하고 편리하게 시설과 설비를 이용하고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같은 법 시행령 3조에서는 300㎡ 이하인 소규모 근린생활시설의 경우엔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할 의무가 없다고 정하고 있다.

2019년 국가통계포털 자료에 따르면 전국 체인 편의점 4만3975개 중 300㎡ 이하 편의점이 4만3145개로 98% 이상을 차지한다. 4만개가 넘는 지점에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가 면제되는 것이다. 장애인을 위해 제정된 법이 도리어 장애인의 접근권 개선을 막고 있는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실제로 편의점 GS25 운영 주체인 GS리테일은 이 시행령을 근거로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조정안 합의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8년 장애인 단체는 GS리테일, 신라호텔, 투썸플레이스를 상대로 차별 구제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낸 바 있다. 

공대위는 장애인 등 편의법 및 시행령에 대해 지난달 29일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법원에 신청했다.
 
A씨는 자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턱이 사라진 사회를 바라고 있다. 그는 "사람들은 장애인이 살기에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점이 많다"며 "더운 여름날 언제든 편의점에 들어가 시원한 물 한 병 사 마실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button by close ad
button by close ad

"휠체어 경사로 없어도 그만"…면죄부 주는 '이상한 법'

기사등록 2021/04/20 05:00:00 최초수정

이시간 뉴스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