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최희정 기자 =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습니다."
25일 타계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신경영'으로 삼성을 세계일류 기업으로 키워낸 장본인이다. 1987년 회장 취임과 더불어 선언된 그 약속은 당시 사람들에게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했지만, 세월 속에 하나씩 하나씩 실현됐다.
이건희 회장이 취임한 1987년 10조원이 채 못되던 삼성그룹의 매출은 2018년 현재 386조원을 넘기면서 39배 늘어났고,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396조원으로 396배나 커졌다.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야"…반도체 불모지에서 도전
삼성이 IT 산업의 모태인 반도체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무도 삼성이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오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은 반도체 하면 '삼성'을 떠올리는 시대가 됐지만, 그 때만 해도 한국반도체 인수는 말도 안되는 공상과 같은 이야기였다. 일본의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은 "언제까지 그들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냐"면서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한다. 내 사재를 보태겠다"고 했다고 한다.
25일 타계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신경영'으로 삼성을 세계일류 기업으로 키워낸 장본인이다. 1987년 회장 취임과 더불어 선언된 그 약속은 당시 사람들에게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했지만, 세월 속에 하나씩 하나씩 실현됐다.
이건희 회장이 취임한 1987년 10조원이 채 못되던 삼성그룹의 매출은 2018년 현재 386조원을 넘기면서 39배 늘어났고,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396조원으로 396배나 커졌다.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야"…반도체 불모지에서 도전
삼성이 IT 산업의 모태인 반도체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무도 삼성이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오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은 반도체 하면 '삼성'을 떠올리는 시대가 됐지만, 그 때만 해도 한국반도체 인수는 말도 안되는 공상과 같은 이야기였다. 일본의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은 "언제까지 그들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냐"면서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한다. 내 사재를 보태겠다"고 했다고 한다.
1986년 7월 삼성은 1메가 D램을 생산하면서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꽃 피우기 시작했다. 삼성은 64메가 D램 개발로 기술 주도권을 확보한데 이어 생산량을 늘리며 시장 점유율도 1위를 기록, 기술과 생산 모두에서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랐다.
반도체 성공에 이어 애니콜 신화가 뒤를 이어받았다. 신경영 선언 이후 이건희 회장은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며 삼성의 신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예견했다. 1995년 8월 마침내 애니콜은 전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당시 대한민국은 모토로라가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였다.
◇위기 극복의 리더십, 미래를 열다
1992년 삼성이 세계 최초로 64M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하면서 메모리 강국 일본을 처음으로 추월하며 세계 1위로 올라섰지만, 이건희 회장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1993년, 품질보다 생산량 늘리기에 급급했던 생산라인에서 불량이 난 세탁기 뚜껑을 손으로 깎아서 조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모습이 사내 방송으로 보도됐고 파장이 커지면서 질보다 양을 앞세우던 기존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당시 삼성의 글로벌 위상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이었던 이건희 회장은 미국의 대표적인 전자제품 양판점인 '베스트바이'를 돌아보다가 진열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삼성 제품을 바라봤다. 그는 "'삼성이라는 이름을 반환하라'고 했다.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 어떻게 삼성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반도체 성공에 이어 애니콜 신화가 뒤를 이어받았다. 신경영 선언 이후 이건희 회장은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며 삼성의 신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예견했다. 1995년 8월 마침내 애니콜은 전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당시 대한민국은 모토로라가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였다.
◇위기 극복의 리더십, 미래를 열다
1992년 삼성이 세계 최초로 64M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하면서 메모리 강국 일본을 처음으로 추월하며 세계 1위로 올라섰지만, 이건희 회장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1993년, 품질보다 생산량 늘리기에 급급했던 생산라인에서 불량이 난 세탁기 뚜껑을 손으로 깎아서 조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모습이 사내 방송으로 보도됐고 파장이 커지면서 질보다 양을 앞세우던 기존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당시 삼성의 글로벌 위상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이었던 이건희 회장은 미국의 대표적인 전자제품 양판점인 '베스트바이'를 돌아보다가 진열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삼성 제품을 바라봤다. 그는 "'삼성이라는 이름을 반환하라'고 했다.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 어떻게 삼성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이 회장은 그동안 쌓여온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유명한 신경영 선언을 내놓았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된 신경영 대장정은 총 8개 도시를 돌며 임직원 18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350여 시간의 토의로 이어졌다.
◇학력아닌 '실력' 중심 채용…中企와 상생·동반성장 강조
1957년 1월, 민간 기업 최초로 공개 채용 제도를 도입해 27명의 사원을 채용한 삼성은 1995년 중대 발표를 했다. 전 세계가 무한 경쟁으로 가는 열린 시대를 맞아 이건희 회장은 학력과 성별, 직종에 따른 불합리한 인사 차별을 타파하는 열린 인사를 지시했다. 이 회장은 "대학 졸업장과 관계없이 입사할 수 있는 기회를 동일하게 주고 입사 후 승진, 승격에도 차별이 없도록 해야 한다"며 "삼성의 입사 기준은 학력이 아니고 실력"이라고 말했다. 이 때부터 삼성은 대졸 공채 대신 3급 신입사원 입사 시험을 실시했다. 또한 여성에 대한 차별을 과감히 없애고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고자 했다. 1987년 취임 초부터 여성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회장은 여성들이 육아 부담 때문에 마음 놓고 일하지 못하는 현실에 주목, 다른 기업들보다 앞서 어린이집 사업을 현실화 했다.
이건희 회장 취임 이듬해인 1988년, 삼성은 중소기업과 공존공생을 선언했다. 삼성이 자체 생산하던 제품과 부품 중 중소기업으로 생산이전이 가능한 352개 품목을 선정해 단계적으로 중소기업에 넘겨주기로 결정하면서 큰 화제가 됐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의 대부분이 양산조립을 하고 있는데 이 업의 개념은 협력업체를 키우지 않으면 모체가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라며 삼성의 발전은 물론 대한민국 경제 성장을 위해 협력업체 육성을 다시 한번 역설했다.
◇학력아닌 '실력' 중심 채용…中企와 상생·동반성장 강조
1957년 1월, 민간 기업 최초로 공개 채용 제도를 도입해 27명의 사원을 채용한 삼성은 1995년 중대 발표를 했다. 전 세계가 무한 경쟁으로 가는 열린 시대를 맞아 이건희 회장은 학력과 성별, 직종에 따른 불합리한 인사 차별을 타파하는 열린 인사를 지시했다. 이 회장은 "대학 졸업장과 관계없이 입사할 수 있는 기회를 동일하게 주고 입사 후 승진, 승격에도 차별이 없도록 해야 한다"며 "삼성의 입사 기준은 학력이 아니고 실력"이라고 말했다. 이 때부터 삼성은 대졸 공채 대신 3급 신입사원 입사 시험을 실시했다. 또한 여성에 대한 차별을 과감히 없애고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고자 했다. 1987년 취임 초부터 여성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회장은 여성들이 육아 부담 때문에 마음 놓고 일하지 못하는 현실에 주목, 다른 기업들보다 앞서 어린이집 사업을 현실화 했다.
이건희 회장 취임 이듬해인 1988년, 삼성은 중소기업과 공존공생을 선언했다. 삼성이 자체 생산하던 제품과 부품 중 중소기업으로 생산이전이 가능한 352개 품목을 선정해 단계적으로 중소기업에 넘겨주기로 결정하면서 큰 화제가 됐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의 대부분이 양산조립을 하고 있는데 이 업의 개념은 협력업체를 키우지 않으면 모체가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라며 삼성의 발전은 물론 대한민국 경제 성장을 위해 협력업체 육성을 다시 한번 역설했다.
또한 이 회장은 삼성 계열사들에게 신뢰에 기반해 협력회사와 수평적이고 전략적인 파트너 관계를 맺으라고 주문했다. 이에 따라 삼성에서는 '거래처, 납품업체, 하청업체'라는 말이 사라지고 '협력업체'라는 표현을 쓰게 됐다.
◇소프트 경쟁력 강화…'100년 기업' 삼성을 향해
이건희 회장은 1996년을 '디자인 혁명의 해'로 선언하고 디자인 경쟁력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2002년 4월 혁신적인 디자인의 휴대폰 'SGH-T100'이 출시됐는데 이 회장이 제품 개발 단계부터 꼼꼼히 디자인을 살피고, 잡기 쉽게 넓으면서도 가볍고 얇은 디자인을 제안했다고 한다. 조가비 형태의 이 휴대폰은 '이건희폰'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출시와 함께 큰 화제가 됐고 글로벌 1000만대 판매라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이건희 회장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2005년 이건희 회장은 세계적 명품과 디자인의 격전지인 밀라노에 주요 사장들을 소집하고 '디자인 전략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디자인 경쟁력을 1.5류로 평가하며 다시 한번 글로벌 초일류 수준으로 혁신할 것을 주문했다. 이 회장은 "제품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간은 평균 0.6초인데 이 짧은 순간에 고객의 발길을 붙잡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며 삼성의 '밀라노 4대 디자인 전략'을 발표했다. 독창적 디자인과 UI 아이덴티티 구축, 디자인 우수인력 확보,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조직문화 조성, 금형기술 인프라 강화 등으로 1996년에 이은 '제2 디자인 혁명' 선언이었다. 이후 이듬해 출시된 와인잔 형상의 보르도TV는 2006년 한 해에만 300만대가 판매되며 세계 TV시장의 판도를 뒤바꿨다.
이건희 회장 이후 삼성은 100년 기업을 향한 그 무수한 노력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회장 취임 당시 미래를 향한 약속, IT 강국의 초석, 글로벌 영토확장, 위기 극복의 리더십, 사회 문화 변화 선도, 사회공헌 활동, 상생과 동반성장, 스포츠 지원, 소프트 경쟁력 강화 등이 100년 기업 삼성의 밑거름이 됐다. 100년 기업 삼성을 꿈꾼 이건희 회장의 외침과 함께 삼성은 그 꿈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가슴 벅찬 미래를 향한 출발선상에 서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초일류이며, 방향은 하나로, 눈은 세계로, 그리고 꿈은 미래에 두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갑시다" (1994년 이건희 회장)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이건희 회장 이후 삼성은 100년 기업을 향한 그 무수한 노력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회장 취임 당시 미래를 향한 약속, IT 강국의 초석, 글로벌 영토확장, 위기 극복의 리더십, 사회 문화 변화 선도, 사회공헌 활동, 상생과 동반성장, 스포츠 지원, 소프트 경쟁력 강화 등이 100년 기업 삼성의 밑거름이 됐다. 100년 기업 삼성을 꿈꾼 이건희 회장의 외침과 함께 삼성은 그 꿈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가슴 벅찬 미래를 향한 출발선상에 서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초일류이며, 방향은 하나로, 눈은 세계로, 그리고 꿈은 미래에 두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갑시다" (1994년 이건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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