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日무로마치시대 외교사절단을 통해 칼국수 전달설에 무게
[서울=뉴시스] 김예진 기자 = 일본 면 요리 '우동' 생산에 정통한 전문가가 우동은 한반도에서 건너왔다고 주장했다.
23일 니혼게이자이 신문에 따르면 가카와(香川)현 제면기 기업 '사누키 면(麺)기'의 오카하라 유지(岡原雄二·70) 회장은 지난 1월 출판한 '불역유행(不易流行)'에서 우동은 무로마치(室町) 시대(1336~1573년)부터 에도(江戸) 시대(1603~1868년)에 걸쳐 한반도에서 건너온 면 요리가 우동의 원형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일본에서는 승려 구카이(空海·774~835)가 우동을 중국 당(唐)나라에서 들여왔다는 설이 유력했다. 가카와현은 구카이의 탄생지다. '사누키 우동'의 생산지로서 우동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오카하라 회장은 일본 불교의 종파인 진언종(真言宗)을 세우며 활약한 헤이안(平安) 시대(794~1185년) 초기에는 우동 만들기에 필요한 소금과 밀가루가 "국내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일본 서민들의 식사는 쌀이 중심이 된 입식(粒食)이었다. 밀가루 중심인 분식(粉食) 도입은 당시 생각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조선이 무로마치 시대 이후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단이 면요리 '칼국수'를 전달했다는 설을 둘러싸고 오카하라 회장은 "그 시대에는 일본에서도 맷돌이 파급됐다. 칼국수가 우동의 원형이 아니냐"라고 추측했다.
그는 "우동을 구카이의 공적으로 생각하고 싶은 사람들의 기분은 알지만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오카하라 회장은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소금을 양산할 수 있게 된 것은 에도시대에 와서야 우동이 확산하기 시작했다고 부연했다.
가카와현에서 생산되는 사누키 우동이 일본 전국에서 유명하게 된 것은 에도시대라고 신문은 설명했다. 당시 가카와현에 위치한 '고토히라(金刀比羅)'궁에서 참배를 마친 참배객이 사누키 우동을 먹고 전국 각지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23일 니혼게이자이 신문에 따르면 가카와(香川)현 제면기 기업 '사누키 면(麺)기'의 오카하라 유지(岡原雄二·70) 회장은 지난 1월 출판한 '불역유행(不易流行)'에서 우동은 무로마치(室町) 시대(1336~1573년)부터 에도(江戸) 시대(1603~1868년)에 걸쳐 한반도에서 건너온 면 요리가 우동의 원형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일본에서는 승려 구카이(空海·774~835)가 우동을 중국 당(唐)나라에서 들여왔다는 설이 유력했다. 가카와현은 구카이의 탄생지다. '사누키 우동'의 생산지로서 우동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오카하라 회장은 일본 불교의 종파인 진언종(真言宗)을 세우며 활약한 헤이안(平安) 시대(794~1185년) 초기에는 우동 만들기에 필요한 소금과 밀가루가 "국내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일본 서민들의 식사는 쌀이 중심이 된 입식(粒食)이었다. 밀가루 중심인 분식(粉食) 도입은 당시 생각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조선이 무로마치 시대 이후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단이 면요리 '칼국수'를 전달했다는 설을 둘러싸고 오카하라 회장은 "그 시대에는 일본에서도 맷돌이 파급됐다. 칼국수가 우동의 원형이 아니냐"라고 추측했다.
그는 "우동을 구카이의 공적으로 생각하고 싶은 사람들의 기분은 알지만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오카하라 회장은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소금을 양산할 수 있게 된 것은 에도시대에 와서야 우동이 확산하기 시작했다고 부연했다.
가카와현에서 생산되는 사누키 우동이 일본 전국에서 유명하게 된 것은 에도시대라고 신문은 설명했다. 당시 가카와현에 위치한 '고토히라(金刀比羅)'궁에서 참배를 마친 참배객이 사누키 우동을 먹고 전국 각지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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