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19년 11월10일. 만주의 한 시골 마을에 신흥무관학교 출신 젊은이 13명이 모였다. 이들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기로 뜻을 모아 의열단을 결성했다. 뉴시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비견되는 의열단의 창단 100주년을 맞아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도움으로 의열단의 대표적 인물들을 매주 소개한다.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음에도 잊혀져만 가는 선인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재조명해 본다.
【서울=뉴시스】김성진 기자 = 1921년 9월12일 오전 10시께 조선인 청년 한 명이 전기공 차림으로 남산에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청년이 들어간 뒤 얼마 안 돼 총독부 청사 2층에서 거대한 폭음이 들리고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됐다.
청년은 유유히 총독부를 빠져나와 용산역에서 평양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백주에 총독부 청사가 폭파됐지만 일제 경찰은 누가 이 같은 거사를 실행에 옮겼는지 6개월이 넘도록 실마리조차 풀지 못한 채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조선 침략의 상징과도 같은 총독부를 폭파한 영웅은 바로 의열단원 김익상(金益相,1895~1941) 의사다.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태어난 김익상 의사는 어려서부터 부모를 잃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학업에 대한 열의가 남달라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기독교 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다 서울 연초공장에 취직해 기계 감독으로 일했다.
1920년 만주 봉천(奉天)에 연초회사의 새로 만들어진 지점으로 전근되자 어렸을 때부터 꿈인 비행사가 되기 위해 비행학교가 있는 광둥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학교가 문을 닫아 상해(上海)로 돌아와야만 했고, 생계를 위해 그곳에서 전차 감독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북경(北京)으로 거처를 옮겼고 유림 출신 독립운동가인 김창숙 선생을 만나게 된다. 김창숙 선생은 김익상 의사에게 인생의 전기가 되는 인물인 의열단장 김원봉을 소개해준다. 의사는 우국충정에서 나오는 김원봉의 열변에 감동해 항일 운동에 몸바칠 것을 결심하고 의열단에 입단하게 된다.
당시 의열단은 1919년 창단 이후 본격적인 암살 및 파괴 투쟁을 하고 있었다. 1920년 3월 총독부와 경제적 약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총독부 선전기관인 매일신보사 등을 폭파하려고 했지만 거사 직전 비밀이 누설돼 일제 경찰에 탐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의열단은 포기하지 않고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 최수봉 의사의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 등을 이어 나가며 악랄한 일제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핵심시설들을 파괴함으로써 일제 고위관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럼에도 의열단의 1차 목표는 늘 조선총독부 파괴였다. 김익상 의사는 의열단에 가입하고 일제의 '심장'에 칼을 꽂기 위해 거사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의사는 1921년 9월10일 폭탄과 권총을 지니고 북경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일본인 학생으로 변장한 의사는 열차에서 신분을 감추기 위해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여성 옆에 앉아 부부인 것처럼 행세해서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했다. 폭탄과 권총 등을 지니고 있어 어려움이 많았지만 무사히 국경을 넘어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도착했다.
거사 당일인 12일 오전, 전기설비 수리 신청을 받고 온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한 의사는 드디어 거사를 감행하기 위해 남산 왜성대(오늘날 숭의여전 부근) 총독부에 유유히 들어갔다.
당시 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에 있었다.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훗날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함)가 1907년 2월 통감부 청사로 지은 르네상스풍 목조 2층 건물로 병탄 직후 현판을 통감부에서 '조선총독부'로 바꿔 내걸면서 본격적인 침탈 행위를 했다.
의사는 민족의 원한을 갚기 위해 총독부 2층으로 올라가 총독 집무실로 보이는 방(실제는 비서실)에 폭탄을 던졌다. 아쉽게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주저하지 않고 다음 방(회계과 사무실)에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이번에는 폭음과 함께 마룻바닥과 탁자, 유리창 등이 파괴됐다.
의사는 폭발로 혼란 상태인 틈을 타 진짜 전기공처럼 위험하다고 소리치며 다시 유유히 총독부 건물을 빠져나와 평양을 거쳐 중국으로 무사히 탈출했다. 대단한 용기와 지혜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행동들이었다.
이 사건은 일제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일제 경찰은 범인조차 잡지 못하면서 경성(서울) 시내는 그야말로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의사가 왜성대에서 빠져나간 뒤에야 일제는 비로소 전기수리공이 범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제는 그 전기수리공이 검정 저고리에 흰 바지 차림이었고 나이는 서른 살 정도 돼 보였고 일어가 유창하다는 등 몇 가지 단서를 빌미로 온 서울을 뒤집었지만 이미 그는 떠난 뒤였다. 당일 남산에 올라갔던 시민들은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조리 잡혀서 곤욕을 당하기도 했다.
의열단의 활동은 국내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왜적과 밀정, 친일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활동무대였다. 의열단은 총독부 투탄 거사 이듬해인 1922년 일본의 전 육군대신이며 육군 대장인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필리핀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다나카는 일본 군부의 대표적인 전쟁론자로 1920년 이른바 훈춘사건을 조작해 간도를 침공, 간도에 살고 있는 무수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경신참변을 지휘한 인물이었다. 훗날 의열단원들의 저격을 받고도 요행히 살아남은 다나카는 일본 총리대신으로 대륙 침략을 총지휘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
의열단원에게 다나카의 상해 방문은 하늘이 준 기회였다. 놓쳐서는 안 되는 민족의 원수를 처단하기 위해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과 의열단의 맹장 오성륜, 총독부 폭파 영웅 김익상이 거사 참여를 자청했다. 1차 저격은 오성륜이 담당하고, 만약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2차 저격을 김익상 의사가 맡기로 했다.
거사 당일인 3월28일 드디어 황포탄(黃浦灘)에 도착한 다나카가 배에서 내려오자 준비하고 있던 오성륜이 그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발사 순간 신혼여행차 상해에 온 영국 여성이 다나카의 앞으로 뛰쳐나오면서 총탄은 이 여성에게 명중돼 실패하고 말았다.
사전 계획에 따라 김익상 의사는 달아나는 다나카를 향해 총을 쐈으나 모자만 뚫어버렸다. 이에 폭탄을 재빨리 꺼내 던졌지만 불발이 됐고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다. 의사는 중국 경찰 등이 추격하자 공포를 쏘며 도주했으나 총을 맞고 즉사한 영국 여성의 남편이 쏜 권총에 맞고 일제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의사는 같은 해 4월1일 상해 일본 총영사관에서 예심을 마치고 5월3일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돼 9월25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검사의 공소로 공소원(控訴院)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다시 감형돼 21년의 옥고를 치렀다.
1941년 고향에 돌아왔지만 일본 형사에게 연행된 뒤 종적이 묘연해졌다. 암살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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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유유히 총독부를 빠져나와 용산역에서 평양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백주에 총독부 청사가 폭파됐지만 일제 경찰은 누가 이 같은 거사를 실행에 옮겼는지 6개월이 넘도록 실마리조차 풀지 못한 채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조선 침략의 상징과도 같은 총독부를 폭파한 영웅은 바로 의열단원 김익상(金益相,1895~1941) 의사다.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태어난 김익상 의사는 어려서부터 부모를 잃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학업에 대한 열의가 남달라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기독교 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다 서울 연초공장에 취직해 기계 감독으로 일했다.
1920년 만주 봉천(奉天)에 연초회사의 새로 만들어진 지점으로 전근되자 어렸을 때부터 꿈인 비행사가 되기 위해 비행학교가 있는 광둥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학교가 문을 닫아 상해(上海)로 돌아와야만 했고, 생계를 위해 그곳에서 전차 감독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북경(北京)으로 거처를 옮겼고 유림 출신 독립운동가인 김창숙 선생을 만나게 된다. 김창숙 선생은 김익상 의사에게 인생의 전기가 되는 인물인 의열단장 김원봉을 소개해준다. 의사는 우국충정에서 나오는 김원봉의 열변에 감동해 항일 운동에 몸바칠 것을 결심하고 의열단에 입단하게 된다.
당시 의열단은 1919년 창단 이후 본격적인 암살 및 파괴 투쟁을 하고 있었다. 1920년 3월 총독부와 경제적 약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총독부 선전기관인 매일신보사 등을 폭파하려고 했지만 거사 직전 비밀이 누설돼 일제 경찰에 탐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의열단은 포기하지 않고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 최수봉 의사의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 등을 이어 나가며 악랄한 일제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핵심시설들을 파괴함으로써 일제 고위관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럼에도 의열단의 1차 목표는 늘 조선총독부 파괴였다. 김익상 의사는 의열단에 가입하고 일제의 '심장'에 칼을 꽂기 위해 거사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의사는 1921년 9월10일 폭탄과 권총을 지니고 북경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일본인 학생으로 변장한 의사는 열차에서 신분을 감추기 위해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여성 옆에 앉아 부부인 것처럼 행세해서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했다. 폭탄과 권총 등을 지니고 있어 어려움이 많았지만 무사히 국경을 넘어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도착했다.
거사 당일인 12일 오전, 전기설비 수리 신청을 받고 온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한 의사는 드디어 거사를 감행하기 위해 남산 왜성대(오늘날 숭의여전 부근) 총독부에 유유히 들어갔다.
당시 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에 있었다.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훗날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함)가 1907년 2월 통감부 청사로 지은 르네상스풍 목조 2층 건물로 병탄 직후 현판을 통감부에서 '조선총독부'로 바꿔 내걸면서 본격적인 침탈 행위를 했다.
의사는 민족의 원한을 갚기 위해 총독부 2층으로 올라가 총독 집무실로 보이는 방(실제는 비서실)에 폭탄을 던졌다. 아쉽게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주저하지 않고 다음 방(회계과 사무실)에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이번에는 폭음과 함께 마룻바닥과 탁자, 유리창 등이 파괴됐다.
의사는 폭발로 혼란 상태인 틈을 타 진짜 전기공처럼 위험하다고 소리치며 다시 유유히 총독부 건물을 빠져나와 평양을 거쳐 중국으로 무사히 탈출했다. 대단한 용기와 지혜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행동들이었다.
이 사건은 일제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일제 경찰은 범인조차 잡지 못하면서 경성(서울) 시내는 그야말로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의사가 왜성대에서 빠져나간 뒤에야 일제는 비로소 전기수리공이 범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제는 그 전기수리공이 검정 저고리에 흰 바지 차림이었고 나이는 서른 살 정도 돼 보였고 일어가 유창하다는 등 몇 가지 단서를 빌미로 온 서울을 뒤집었지만 이미 그는 떠난 뒤였다. 당일 남산에 올라갔던 시민들은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조리 잡혀서 곤욕을 당하기도 했다.
의열단의 활동은 국내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왜적과 밀정, 친일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활동무대였다. 의열단은 총독부 투탄 거사 이듬해인 1922년 일본의 전 육군대신이며 육군 대장인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필리핀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다나카는 일본 군부의 대표적인 전쟁론자로 1920년 이른바 훈춘사건을 조작해 간도를 침공, 간도에 살고 있는 무수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경신참변을 지휘한 인물이었다. 훗날 의열단원들의 저격을 받고도 요행히 살아남은 다나카는 일본 총리대신으로 대륙 침략을 총지휘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
의열단원에게 다나카의 상해 방문은 하늘이 준 기회였다. 놓쳐서는 안 되는 민족의 원수를 처단하기 위해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과 의열단의 맹장 오성륜, 총독부 폭파 영웅 김익상이 거사 참여를 자청했다. 1차 저격은 오성륜이 담당하고, 만약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2차 저격을 김익상 의사가 맡기로 했다.
거사 당일인 3월28일 드디어 황포탄(黃浦灘)에 도착한 다나카가 배에서 내려오자 준비하고 있던 오성륜이 그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발사 순간 신혼여행차 상해에 온 영국 여성이 다나카의 앞으로 뛰쳐나오면서 총탄은 이 여성에게 명중돼 실패하고 말았다.
사전 계획에 따라 김익상 의사는 달아나는 다나카를 향해 총을 쐈으나 모자만 뚫어버렸다. 이에 폭탄을 재빨리 꺼내 던졌지만 불발이 됐고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다. 의사는 중국 경찰 등이 추격하자 공포를 쏘며 도주했으나 총을 맞고 즉사한 영국 여성의 남편이 쏜 권총에 맞고 일제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의사는 같은 해 4월1일 상해 일본 총영사관에서 예심을 마치고 5월3일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돼 9월25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검사의 공소로 공소원(控訴院)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다시 감형돼 21년의 옥고를 치렀다.
1941년 고향에 돌아왔지만 일본 형사에게 연행된 뒤 종적이 묘연해졌다. 암살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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