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19년 11월10일. 만주의 한 시골 마을에 신흥무관학교 출신 젊은이 13명이 모였다. 이들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기로 뜻을 모아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뉴시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비견되는 의열단의 창단 100주년을 맞아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도움으로 의열단의 대표적 인물들을 매주 소개한다.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음에도 잊혀져만 가는 선인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재조명해 본다.
【서울=뉴시스】김성진 기자 = 류자명(柳子明)선생(1894~1985)은 의열단장 김원봉의 비밀참모로 고위 일본관료와 친일파 제거에 앞장섰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1984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본래 유흥식(柳興湜)이 본명이었지만, 본명보다 의열단 참모 '유자명'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충주 간이농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 중심의 시위를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의 밀정에게 발각되자 상하이로 망명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고, 나석주의 소개로 조선의열단에 가입했다. 의열단장 김원봉의 비밀참모로 국내외 일본인과 친일파 처단활동에 성과를 올렸다.
1920년대 베이징을 중심으로 이회영·김창숙·신채호 등과 함께 활동했는데, 그 무렵 무정부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한때 입원학교(立遠學校) 교장을 지냈으며,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항일독립의 연합전선을 펴나가는 한편, 한국 청년 다수를 난징 군관학교(南京軍官學校)에 입교시켜 민족혁명의 대열에 서도록 주선했다.
1927년 중국 난징에서 김규식, 중국인 목광록, 인도인 간다싱 등과 함께 일본에 대한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공동투쟁을 강화할 목적으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했다.
중국 국민당 중앙본부와 협의해 적극 후원을 약속받은 뒤 회장에 김규식을 선출하고, 기관지 '동방민족'을 영어·중국어·한국어로 발간해 관계된 여러 나라에 발송했다. 또 비밀지부를 설치하고 동지들을 규합해 운동범위를 확장하는 등 제반 공작을 추진했다.
5월에는 이념적으로 무정부주의를 견지해 조선혁명자연맹 간부로 활동하며 무창(武昌) 입달학원(立達學院)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1930년 4월에는 상해 강만(江灣)의 농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장도선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했다.
1931년 11월에는 무정부주의자 유기석·정치화 등과 불멸구락부(不滅俱樂部)를 조직해 활동했다.
그 뒤 이우관·정화암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해부를 조직하고, 무력항쟁을 계획해 1933년에는 중국주재 일본공사 유길명(有吉明) 등을 상해 6·3정에서 암살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36년에는 중국군과 합류하여 전시공작대로서 항일전에 참가했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약헌개정 기초의원을 역임했다.
1943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을 지냈고 해방 이전까지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는 한편, 중국 국민당의 거물급 인사와도 꾸준히 교류하며 항일독립운동 연합전선을 펴나갔다.
1944년 4월 임시정부 5차 개헌 통과에 즈음해 7인 헌법기초위원으로 표면적인 활동을 한 것 이외에는 일제의 수괴급을 암살하거나 공공기관을 파괴하는 참모역으로 일관했다.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湖南省) 창사(長沙)에서 대학교수 생활을 했으며, 윈난(雲南) 고원지대에서 최초로 특수벼 재배에 성공해 농학박사가 됐다.
특히 독립운동가 출신 원예학자로 중국인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선생은 만년에 후난농업대학 원예학과 명예주임으로, 중국 원예학회 명예이사장에 추대됐다.
1968년에 대한민국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197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급 국기훈장을 받아 남북에서 모두 인정받은 독립운동가가 됐다. 사후인 199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email protected]
1984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본래 유흥식(柳興湜)이 본명이었지만, 본명보다 의열단 참모 '유자명'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충주 간이농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 중심의 시위를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의 밀정에게 발각되자 상하이로 망명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고, 나석주의 소개로 조선의열단에 가입했다. 의열단장 김원봉의 비밀참모로 국내외 일본인과 친일파 처단활동에 성과를 올렸다.
1920년대 베이징을 중심으로 이회영·김창숙·신채호 등과 함께 활동했는데, 그 무렵 무정부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한때 입원학교(立遠學校) 교장을 지냈으며,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항일독립의 연합전선을 펴나가는 한편, 한국 청년 다수를 난징 군관학교(南京軍官學校)에 입교시켜 민족혁명의 대열에 서도록 주선했다.
1927년 중국 난징에서 김규식, 중국인 목광록, 인도인 간다싱 등과 함께 일본에 대한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공동투쟁을 강화할 목적으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했다.
중국 국민당 중앙본부와 협의해 적극 후원을 약속받은 뒤 회장에 김규식을 선출하고, 기관지 '동방민족'을 영어·중국어·한국어로 발간해 관계된 여러 나라에 발송했다. 또 비밀지부를 설치하고 동지들을 규합해 운동범위를 확장하는 등 제반 공작을 추진했다.
5월에는 이념적으로 무정부주의를 견지해 조선혁명자연맹 간부로 활동하며 무창(武昌) 입달학원(立達學院)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1930년 4월에는 상해 강만(江灣)의 농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장도선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했다.
1931년 11월에는 무정부주의자 유기석·정치화 등과 불멸구락부(不滅俱樂部)를 조직해 활동했다.
그 뒤 이우관·정화암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해부를 조직하고, 무력항쟁을 계획해 1933년에는 중국주재 일본공사 유길명(有吉明) 등을 상해 6·3정에서 암살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36년에는 중국군과 합류하여 전시공작대로서 항일전에 참가했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약헌개정 기초의원을 역임했다.
1943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을 지냈고 해방 이전까지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는 한편, 중국 국민당의 거물급 인사와도 꾸준히 교류하며 항일독립운동 연합전선을 펴나갔다.
1944년 4월 임시정부 5차 개헌 통과에 즈음해 7인 헌법기초위원으로 표면적인 활동을 한 것 이외에는 일제의 수괴급을 암살하거나 공공기관을 파괴하는 참모역으로 일관했다.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湖南省) 창사(長沙)에서 대학교수 생활을 했으며, 윈난(雲南) 고원지대에서 최초로 특수벼 재배에 성공해 농학박사가 됐다.
특히 독립운동가 출신 원예학자로 중국인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선생은 만년에 후난농업대학 원예학과 명예주임으로, 중국 원예학회 명예이사장에 추대됐다.
1968년에 대한민국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197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급 국기훈장을 받아 남북에서 모두 인정받은 독립운동가가 됐다. 사후인 199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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