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중국·멕시코·쿠바·미국·네덜란드·러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대한민국역사박물관·류가헌·춘천 상상마당 전시 및 사진집
백범(白凡) 김구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을 당시, 일제 순사가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고 고문하면서 자백을 강요할 때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고 다짐했다.
‘백범일지’에서 등장하는 ‘뭉우리돌’은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김구는 왜놈들이 자신을 뭉우리돌이라고 불렀고, 자신같은 독립투사를 뭉우리돌이라고도 표현했다고 백범일지에 썼다.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사진가 김동우(40)가 중국에서부터 중앙아메리카까지,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에서 이런 ‘뭉우리돌’들의 흔적과 그 후손 등을 기록한 사진들을 내놓는다.
김동우 작가는 인도-중국-멕시코-쿠바-미국-네덜란드-러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총 9개국 100여곳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일주하며 기록했다. 1년8개월이 걸렸다. 21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개막하는 특별전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을 통해 70여점의 사진과 영상, 26일부터 갤러리 류가헌에서 ‘뭉우리돌을 찾아서-세계에 남겨진 우리 독립운동의 흔적’ 25점을 선보인다. 또 동명의 사진집(아카이브류가헌, 280쪽, 3만8000원)도 출간한다. 28일부터는 춘천 상상마당에서도 전시한다.
“제가 원래 사진을 잘 찍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여행하면서 알았죠.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진가 강재훈, 이재갑에게 다큐멘터리 사진을 공부하게 되면서 제대로 작업해 보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 2017년 2월 EBS 세계테마기행 출연차 모리셔스에 있을 때,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홍범도 장군의 묘소가 있다는 이야기를 PD에게 전해듣고 놀란다.
“홍범도 장군은 김좌진 장군에 견줄 수 있는 인물이잖아요. 가만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그런 분들이 왜 그런 곳에서 돌아 가셨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더라고요. 한마디로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무지했던 거죠.”
“제가 갖고 있는 상식으로는 그 먼 인도가 우리 독립운동과 상관있을까 했어요. 그런데 뉴델리 레드포트가 우리 광복군이 영국군과 함께 훈련하던 장소였던 거죠. 탁하고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어요. 자료를 더 찾아보니 국내 독립운동 사적지는 잘 정리가 돼 있었는데,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는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자료가 있어도 국내 자료에 비해 수준이 많이 떨어졌고요. 어떤 작가도 이 작업을 하나로 엮어 낸 적이 없는 거예요. 내가 할 일이 이거다 싶었죠.”
그때부터 전 세계에 어떤 독립운동 유적지가 있는지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남미, 호주 등을 제외하면 전 지구적으로 우리의 보석 같은 독립운동 사적지가 흩어져 있었어요. 이민의 역사가 독립운동의 역사로 발전된 곳도 많았고요. 나라를 떠났는데 돌아갈 나라가 없어져 버린 거죠. 돌아갈 곳이 없어져 버린 우리 조상들은 눈물 나게도 그 곳에서 나라 걱정에 모금을 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시작해요. 와, 정말 뭉클했어요. 맘이 동한 거예요. 작가 스스로 마음이 움직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저랑 딱 맞는 거였죠. 여행을 좋아 하니 맞았고, 사진 작업으로도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가치가 있었고요.”
“이런 곳에서 과거를 소환해야 하는 일이 제 부족한 실력으로는 참 어렵더라고요.”
배경과 인물이 반투명하게 겹쳐지는 사진이 있다. 합성일까, 다중노출일까. 셔터를 오래 열고 반은 인물을 찍고, 반은 인물 뒤 벽을 찍어 투명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2, 3, 4세···. 이제 한국인의 모습조차 희미해지는 후손들의 시간을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하기 위함이다.
다른 방식을 쓴 사진도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는 날짜가 잘 맞았다. 장인환, 전명운 의거일을 며칠 앞두고 도착했다. 정확하게 110년 전 9시30분에 있었던 일, 시간을 맞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의 장인환, 전명운 의거 기념행사를 촬영했다.
“두 가지 풍경이 오버랩되면서 묘한 여운이 있더라고요. 거기에 장인환, 전명운 의사 흉상이 있긴 한데 그 주변이 너무 산만하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이게 바로 우리가 독립운동가들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했어요.”
멕시코에서는 애니깽 밭으로 선조들이 일을 시작한 시간인 새벽 5시에 맞춰 나가 그들이 100여년 전 봤을 풍경을 찍었다. 어둑발이 지워지기 전 유까딴의 따가운 햇빛이 쏟아져 내리기 전의 고요를 찍고 싶었다. 이민의 역사가 독립운동에서 확장한 미국, 멕시코, 쿠바에서는 그들의 시작이었던 애니깽과 사탕수수밭 등을 같이 작업했다.
후손들은 자신을 찾아 줬다고 반가워했다. 밥을 차려주고, 인터뷰 중 김치를 내오기도 했다. 밥 한 끼, 김치 한 조각이었지만 감동적인 순간들이었다.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 중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적지가 많았다. 여기를 누가 찾겠나 싶은 생각에 사명감으로 기록하게 된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감정을 추스르며 정리하지 못한 글을 쓰려는데 모니터 앞에만 앉으면 자꾸 엉엉 울게 돼 버렸다. 괜히 이런 작업을 해서 왜 이렇게 아파야 하는지 후회하기도 했다. 책을 쓰는 작업이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이유다.
“후손들을 촬영하면 저 스스로 숙연해지더라고요. 의자에 앉아 있는 분들을 촬영할 때 제가 무릎을 꿇으면 딱 맘에 드는 높이로 사진이 찍히더라고요. 그러면서 참 죄송하고,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매번 촬영했어요.”
“여행 전 가지고 있던 일산의 작은 아파트 하나를 팔아 작업했습니다”
은행 빚을 갚고 보니 얼마 되지 않은 작업비로 모든 지역을 다 작업할 수는 없었다. “일단 내가 먼저 세상에 이런 작업이 있고, 거기에는 ‘패배는 했지만 실패하지 않은’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사가 담겨 있다는 걸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뒤 2차 작업은 또 길이 생기지 않겠나 기대를 하면서요.”
지금은 “처가살이합니다”라며 웃었다. 부인이 흔쾌히 동의해 줘 가능했다.
남은 독립운동 사적지를 기록하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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