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이재준 기자 = 이번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19大)에서 확정하는 최고 권력기관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두 명의 젊은 위원이 가세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한 명은 당 총서기 겸 국기주석, 다른 한 명이 총리 직을 이어받을 후계자이다.
그간 하마평에서는 천민얼(陳敏爾 57) 충칭시 당서기와 후춘화(胡春華 54) 광둥성 당서기가 유력 후보로 꼽혀왔다.
이들 등 50대 정치국원 두 명이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하면 시진핑은 오는 2022년 제20차 당 대회에서 권력을 이양할 준비작업에 들어간다.
하지만 상무위원회에 연부역강한 소장 정치국원이 한 명이라도 진입하지 않는다면 시진핑의 장기집권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19차 당 대회의 최대 '정치 흑마(다크호스)'로 꼽히는 천민얼은 시진핑이 저장성 당서기 시절 상관과 부하 관계를 맺은 이들을 지칭하는 '즈장신쥔(之江新軍)'의 선두주자이다.
천민얼이 두각을 나타내는 데는 시진핑의 절대적인 신임에 더해 '젊은 나이'가 크게 작용했다.1960년 9월 태어난 천민얼은 '최고 지도자 후계군'의 연령 관례에 부합한다.저장성 주지(諸暨) 출신인 천민얼은 사오싱(紹興) 사범전과학교에서 중문과를 나와 1982년 9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98년에는 중앙당교의 석사학위를 취득했다.사오싱 사범전과학교 졸업 후 모교에 남아 선전부 간사로 공직에 첫발을 디딘 후 32년 동안 저장성에서만 근무했다.
말솜씨와 글재가 탁월한 천민얼은 진중한 성격으로 전형적인 선생님 같은 풍모를 지녔다는 평을 들었다.
지방 선전 부문에서 잔뼈가 굵은 천민얼은 저장일보(浙江日報) 사장과 당서기를 발판으로 저장성 당 상무위원, 선전부장으로 간부에 오른 다음 2007년 5월 저장성 부성장으로 승차했다.
2002년 10월 시진핑이 저장성 당서기 겸 대리성장으로 부임했을 때 천민얼은 선전부장이었다. 시진핑이 5년여 동안 저장성에 머무는 동안 천민얼은 시진핑이 제일 신뢰하는 '선전 나팔수'이자 '정치 화장사'로 그를 도왔다.
특히 2003년 저장일보가 '즈장신어(之江新語)'라는 칼럼을 신설하고 매번 300~500자의 시평을 실어 시진핑의 시정 이념과 생각을 엿보이도록 했다. 칼럼은 시진핑이 저장성을 떠나는 2007년 3월까지 총 232편이나 게재됐는데 천민얼이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2012년 1월 천민얼은 저장성 부성장에서 구이저우(貴州)성 부서기로 자리를 옮겼으며 시진핑의 왼팔인 리잔수(栗戰書)과 손발을 맞추는 기회를 잡았다.
그해 11월 열린 제18차 당 대회에서 천민얼은 부성장급 간부로는 유일하게 중앙위원으로 뽑혔다. 2015년 7월에는 구이저우성 서기 겸 성장에 올랐다.
구이저우성에서 있던 5년간 천민얼은 '빈곤 구제와 데이터 산업 진흥(大扶貧 大數據)'을 성 제13차 5개년계획(2016~2020년) 발전전략으로 설정하고 전력 투구하면서 농촌생산 합작개혁 등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뒀다.
천민얼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성급 데이터 클라우드 서비스 '윈상 구이저우(雲上貴州)'를 개설하고 디지털 산업과 휴대전화 산업을 성장시켰다.
그가 돌연 낙마한 쑨정차이(孫政才) 전 충칭시 서기의 후임으로 자리를 이동하기 전 올해 상반기 구이저우의 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0.4%로 전국 2위를 차지했다.
4월20일 구이저우성 제19대 당대표 선거 때 시진핑이 구이저우 대표로 선출된 사실이 공표됐다. 이는 시진핑이 종전 상하이에서 선거구를 구이저우를 옮겼기 때문이며 천민얼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7월15일 당중앙은 쑨정차이를 충칭시 서기에서 해임하고 천민얼을 임명했다. 직할시인 충칭시 서기는 당연직 정치국원인 점에서 그의 입지가 예약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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