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저항보다 강한 어떤 ‘굴종’

기사등록 2016/02/16 08:03:00

최종수정 2016/12/28 16:36:35

【서울=뉴시스】신동립 ‘잡기노트’ <568>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조국의 광복을 바라는 마음을 노래한 ‘참회록’을 비롯해 31편의 시가 수록돼 있는 윤동주의 유고 시집”이라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소개한다. ‘쉽게 쓰여진 시’를 두고는 “식민지 시대를 고뇌하며 살다 간 지식인의 순수한 마음을 부끄러움의 정서와 자아 성찰의 태도를 통해 노래한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독립기념관은 좀 더 단정적이다. “‘서시’, ‘별헤는 밤’, ‘무서운 시간’, ‘또다른 고향’ 등 많은 항일민족시를 발표하면서 우리 민족의 항일 정신을 고취했다. 일제의 강제적인 징병제를 반대하며 저항정신을 담은 시 작품을 발표하는 등의 활동을 하는 한편 민족적 문학관을 확립하는데 힘썼으며 민족문화의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전념하던 중 일경에 피체됐다”고 추모한다. 정부는 이렇게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런데 소설가 이병렬 박사는 “윤동주는 저항시인이 아니다”고 단언한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라는 시인 정지용을 인용, “서정시인, 여리디여린 심성과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한 사람이라 하는 것이 그의 시를 더욱 아름답게 하고 예술적 가치를 담는 말인지도 모른다”며 저항시인이 아니라 서정시인이라고 강조한다. 윤동주의 시를 저항이라는 일정한, 좁은 틀에 가두지 말자는 것이다.

 윤동주 연구의 태두는 마광수 연세대 교수(국어국문학)다.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의 이미지, 그리고 ‘병원’이나 ‘위로’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소외의식에 넘친 절망적인 몸부림은, 창백하고 무기력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자기자신을 한탄하는 윤동주의 처절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그의 시에 자연을 소재로 한 상징적 어구들이 자주 보이는 것도 그 당시 문학인들에게 만연했던 현실도피, 자연귀의의 사조와 아주 무관하진 않다. 그러므로 윤동주는 저항시인이 아니라 순수한 휴머니스트로 봐야 한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심지어 “그의 시가 갖는 품격과는 별개로 윤동주가 그저 불쌍해 보이기만 한다. 그는 안중근 의사 같은 사람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한 사람이 아니라 (그가 일제 말 창씨개명까지 해가며 굳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유약한 심성을 지닌 학구파 휴머니스트였을 따름이기 때문”이라고도 본다. “그의 시 어느 곳에도 저항의 기백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가 옥사한 것은 어찌 보면 군사독재시절 이한열군이나 박종철군의 죽음과 견줘질 만한 것으로서, 시대를 잘못 태어난 양심적 지식인의 억울한 비명횡사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라는 판단이기도 하다.

 저항시인이 윗길인 것도 아니다. “윤동주를 투쟁적 이미지의 저항시인으로 보지 않고 회의적 휴머니스트로 본다고 해서 그의 시의 가치가 깎여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스스로에 진짜로 ‘솔직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시의 가치가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함께 생각될 수는 없다. 시는 시인의 자기통찰과 자기연민, 그리고 본능적 욕구의 대리배설로 이뤄질 때 한결 진솔한 감동을 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윤동주의 저항은 끊임없는 자기 내면 또는 본능적 자의식과의 투쟁이었다. 이러한 ‘투쟁’이야말로 진정한 ‘저항’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희덕 조선대 교수(문예창작학)는 “윤동주를 단순한 항일시인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가 그의 문학적 본질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른 듯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순결한 정신의 소유자로서 그가 지녔을 윤리적 고뇌에 주목하는 견해 역시 윤동주에 대한 통합적 이해에 도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윤동주의 내면적 갈등을 굳이 의식의 차원에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자기 성찰적인 성격이 강한 내향적 자아에게 있어 의식과 무의식의 교접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며, 그런 무의식의 소리들을 부활시켜 내는 것은 윤동주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케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짚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이따금 내 문학이 시작된 자리를 더듬어 가다 보면, 나는 영락없이 윤동주라는 ‘신념이 깊은 으젓한 羊’(‘힌그림자’)과 마주치게 된다. 윤동주는 우리에게 이십 대의 젊은 영혼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요즘 그의 시를 생각하면 그의 시 역시 내 속에서 나이를 먹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스무 살의 나로 하여금 시를 통해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고 사랑하게 한 선한 눈동자. 그의 ‘맑음’은 여전히 내가 도망쳐야 할 그늘인 동시에 영영 도달할 수 없는 영토인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정병헌 숙명여대 교수(한국어문학)도 다른 듯 같은 이야기를 한다. “일제가 발악했던 식민지 말기, 언어의 정수인 시의 창작은 공개적으로 이뤄질 수 없었다. 그러나 식민지 시기 청년의 순수함과 열정, 그리고 저항의 표상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통해 우리말을 사용할 수 없었던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창작됐던 언어생활의 정수를 확인할 수 있다. 윤동주가 있음으로써 우리는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갖게 된 것이다.”

 한층 직설적이기는 하되, 마광수 교수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윤동주는 옥사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총각귀신’이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상하게도 ‘투사’보다는 ‘유약하지만 솔직한 사람’을 한 시대의 상징적 희생물로 만드는 일이 많다. 윤동주는 바로 그러한 역사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일제 말 암흑기, 우리 문학의 공백을 밤하늘의 별빛처럼 찬연히 채워줬다.”

 문약(文弱)이라는 말은 글을 못 쓰는 이들의 질투일는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윤동주는 잘생기기까지 했다. 청년의 이미지, ‘영원한 청춘스타’로 살아있다. 마침 영화 ‘동주’(감독 이준익)가 개봉한다.

 문화부국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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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저항보다 강한 어떤 ‘굴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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