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하도겸 박사의 ‘한 번 더 간추린 백일법문’ <16>
선종(禪宗)이란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直指人心)’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부처의 이마에 있는 구슬을 직시하듯 바로 자성(自性)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참선이란 곧바로 깨쳐서 성불하는 것이 근본이지 절대로 점차(漸次)를 둔다든지 단계를 둔다든지 해서 시간을 끌며 하는 공부가 아니다.
선종에서 말하는 돈(頓)과는 정반대로 교가(敎家)에서는 점(漸)을 주장한다. 즉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서 마음을 닦아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나눠 시간적인 점차(漸次)를 둔다. 선종에서는 단박 찰나(頓)간에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見性成佛) 법을 주장한다. 반면 교문(敎門)에서는 일 찰나간에 성불한다는 것은 모든 중생에게 다 해당되기는 어려운 일이므로 점차 한 계단, 한 계단 층층이 올라가듯이 시간상으로 거리를 둬 점차(漸次)로 공부를 가르친다. 이 방법도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설하신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생의 근기가 열악(劣惡)해서 방편(方便)으로 말씀하신 것이지 실법(實法)은 아니다. 이처럼 선종에서 주장하는 것은 오직 돈(頓)으로서만 성불하는 길을 가르치지 절대로 점차적인 공부를 가르치지 아니한다.
‘깨친다(悟)’고 하는 것은 한번 깨칠 때 근본 무명을 완전히 끊고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또 ‘단박에 깨친다(頓悟)’고 하며 그래서 ‘단박에 닦는다(頓修)’고 한다. 더는 닦을 필요가 없다. 전체를 다 마쳐졌다는 뜻이니 등각(等覺)까지 넘어서 묘각(妙覺), 즉 구경각을 성취해 버렸는데 그 뒤에 어떤 점차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육조스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문(頓悟門)에서는 한번 깨침에 있어 구경각을 성취해 제8아뢰야 근본 무명까지 완전히 끊어버려서 그 뒤에 더 닦을 것이 없는 것을 견성이라고 한다.
무념(無念)이란 제8아뢰야의 무기무념(無記無念)이 아니라 진여본성을 바로 깨친 구경각을 성취한 묘각의 무념이요 불지(佛地)의 무념을 말한다.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망념은 제6식의 분별 망념만이 아니고 근본 미세망념까지 일어나지 않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이니 망념이 있는 이대로는 돈오(頓悟)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근본 미세망념까지 다 끊어져서 완전한 무념(無念)을 성취하게 되면 무구식(無垢識) 즉 대원경지(大圓鏡智)가 현발하는 동시에 진여자성을 깨치게 되니 이것이 ‘청정(淸淨)으로 본체를 삼는다’고 하는 뜻이다. 이렇게 청정하게 되면 거기에서 일체지(一切智)가 성취되는 데 그것을 활용으로 삼는다.
결론적으로 중도(中道)는 선과 교를 통한 근본 입장이다. 선은 중도의 실제 체험 법문이고 교는 중도의 이론이다. 이론은 실천하기 위한 것이고 실천을 떠난 이론은 안 된다. 그래서 이론에 밝은 아난도 가섭에 쫓겨난 후 깨쳐서 결집에 참여했다. 이것이 선이라는 별전(別傳)의 시발점이다. 별전이 인도에서는 달마까지 28대로 하고 다시 중국으로 내려왔는데, 거기서 표방하는 것은 실천법문에서는 ‘견성성불’이다.
이 견성성불을 견성해 성불한다는 식으로 나누면 잘못이다. 견성이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이다. 견성은 ‘자성을 깨쳤다.’ ‘불성을 깨쳤다.’ ‘진여본성을 깨쳤다.’는 말인데 불성이니 진여니 하는 것은 중도를 말하며 쌍차쌍조(雙遮雙照)인 진여를 말하는데, 즉 중도를 깨친 것이 견성이라 한다. 중도를 바로 깨치면 우리 심리 상태가 대무심지이며 무념무생한 이것이 제8아뢰야의 무기식에서 확실히 깨어난 대원경지의 무심이다. 대무심지에 들어가는데 오매일여라는 관문이 있다. 몽중에도 전 일여하면 7지 보살이고 잠이 꽉 들어서 일여하면 오매일여, 멸진정 이상의 제 8아뢰야 경지이다.
조사 스님 모두가 실지 오매일여 돼서 참으로 대무심지인 여기서 깨쳐 조사노릇을 했지 누구든 오매일여, 몽중일여도 못된 데서 깨쳤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오매일여 된 데서 죽어서 살아나지 못하면 제8아뢰야 마계(魔界)이다. 언구를 의심해서 제8아뢰야 오매일여에서 확철히 깨쳐야 깨끗한 유리그릇 속 보배를 비추는 것과 같이 참 광명이 시방세계를 비춘다. 무심경계가 돼도 깨친 경계가 아니다. 대무심지에서도, 오매일여한 경지에서 다시 깨쳐야 한다. 그래야만 견성이다 선이다 할 수 있다.
선종 정맥사상은 육조 스님 때 하택(荷澤)이 지해로 나가니까 지해종사라 수기했다. 그 뒤 규봉이 공부해 화엄 5조가 됐다. 규봉이 돈오점수 사상을 만들어서 번뇌망상 있는 그대로를 견성이라 하고 돈오라 하고 달마선이라 했다. 그 후 규봉의 돈오점수 사상이 죽어서 햇빛을 못 봤는데 보조 스님을 만나서 빛을 보게 됐다. 보조 스님이 초년에는 잘 몰라서 규봉의 돈오점수 사상을 달마선인 줄 알고 이에 따라서 수심결을 짓고 결사문을 지었다. 그 후 사상이 크게 전환해 간화결의에서는 대무심지가 돼도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해서 크게 살아나야 하며 이것이 선종이라고 했다. 규봉이 말하는 해오는 선종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사구인 죽은 길로 들어가면 삼아승지겁이 벌어지고 막대한 노력과 시간 손해가 납니다. 우리는 경절문인 활구로 들어가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해야 한다.
끝으로 ‘백일법문’ 중 성철 스님 주요 말씀을 한 단락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불교라고 하면, ‘불(佛)’은 부처님이고 ‘교(敎)’는 가르침이니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불’은 인도 말로 붓다(Buddha)이니, ‘깨친 사람’이라는 뜻이다. 무엇을 깨쳤는가? 일체 만법의 본원(本源) 자체를 원만하게 깨친 사람이 부처님이다. 그러므로 불교란 일체 만법의 본원 자체를 바로 깨친 사람의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불교는 일체 만법을 깨친다는 ‘각(覺)’에 근본 의의가 있다. 만약 ‘깨친다’는 데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서 불교를 논의한다면 절대로 불교가 아니다. 이 일체 만법을 총괄해서 말하자면 ‘법성(法性)’이라고 하니, 일체 만법의 자성(自性)이라는 말이다. 결국, 법성 또는 자성을 바로 깨치는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다. 불교라고 하면 성불(成佛)이 목적인데, 성불하려면 언어와 문자로는 안 된다. 아무리 큰 학자라도 언설과 이론으로 성불한다고 한 사람은 없다. 밥 이야기를 아무리 해 봤자 배가 부르지 않고 배가 부르려면 밥을 먹어야 하듯이, 스스로 마음을 닦아서 자성을 바로 봐야 성불할 수 있지 언어와 문자로는 성불하지 못한다. 불교의 최고 원리는 대승불교에서 볼 때도 중도에 있고, 선종에서 볼 때도 중도에 있다.”
* 이 글은 미래에 만들어질 새로운 대장경에 들어갈 ‘백일법문’(성철스님법어집)(장경각, 1992)의 뜻을 간추리면서 몇 가지 수정하기도 했다.
** 이 글은 사부대중 모두가 깨달음으로의 길을 가기 위한 공익적 목적으로 일부 전문가와 신도들의 의견이나 우려를 전하는 형식으로 작성됐다. 이는 일방의 의견일 뿐 다른 해석과 반론도 충분히 가능하다.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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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禪宗)이란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直指人心)’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부처의 이마에 있는 구슬을 직시하듯 바로 자성(自性)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참선이란 곧바로 깨쳐서 성불하는 것이 근본이지 절대로 점차(漸次)를 둔다든지 단계를 둔다든지 해서 시간을 끌며 하는 공부가 아니다.
선종에서 말하는 돈(頓)과는 정반대로 교가(敎家)에서는 점(漸)을 주장한다. 즉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서 마음을 닦아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나눠 시간적인 점차(漸次)를 둔다. 선종에서는 단박 찰나(頓)간에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見性成佛) 법을 주장한다. 반면 교문(敎門)에서는 일 찰나간에 성불한다는 것은 모든 중생에게 다 해당되기는 어려운 일이므로 점차 한 계단, 한 계단 층층이 올라가듯이 시간상으로 거리를 둬 점차(漸次)로 공부를 가르친다. 이 방법도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설하신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생의 근기가 열악(劣惡)해서 방편(方便)으로 말씀하신 것이지 실법(實法)은 아니다. 이처럼 선종에서 주장하는 것은 오직 돈(頓)으로서만 성불하는 길을 가르치지 절대로 점차적인 공부를 가르치지 아니한다.
‘깨친다(悟)’고 하는 것은 한번 깨칠 때 근본 무명을 완전히 끊고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또 ‘단박에 깨친다(頓悟)’고 하며 그래서 ‘단박에 닦는다(頓修)’고 한다. 더는 닦을 필요가 없다. 전체를 다 마쳐졌다는 뜻이니 등각(等覺)까지 넘어서 묘각(妙覺), 즉 구경각을 성취해 버렸는데 그 뒤에 어떤 점차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육조스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문(頓悟門)에서는 한번 깨침에 있어 구경각을 성취해 제8아뢰야 근본 무명까지 완전히 끊어버려서 그 뒤에 더 닦을 것이 없는 것을 견성이라고 한다.
무념(無念)이란 제8아뢰야의 무기무념(無記無念)이 아니라 진여본성을 바로 깨친 구경각을 성취한 묘각의 무념이요 불지(佛地)의 무념을 말한다.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망념은 제6식의 분별 망념만이 아니고 근본 미세망념까지 일어나지 않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이니 망념이 있는 이대로는 돈오(頓悟)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근본 미세망념까지 다 끊어져서 완전한 무념(無念)을 성취하게 되면 무구식(無垢識) 즉 대원경지(大圓鏡智)가 현발하는 동시에 진여자성을 깨치게 되니 이것이 ‘청정(淸淨)으로 본체를 삼는다’고 하는 뜻이다. 이렇게 청정하게 되면 거기에서 일체지(一切智)가 성취되는 데 그것을 활용으로 삼는다.
결론적으로 중도(中道)는 선과 교를 통한 근본 입장이다. 선은 중도의 실제 체험 법문이고 교는 중도의 이론이다. 이론은 실천하기 위한 것이고 실천을 떠난 이론은 안 된다. 그래서 이론에 밝은 아난도 가섭에 쫓겨난 후 깨쳐서 결집에 참여했다. 이것이 선이라는 별전(別傳)의 시발점이다. 별전이 인도에서는 달마까지 28대로 하고 다시 중국으로 내려왔는데, 거기서 표방하는 것은 실천법문에서는 ‘견성성불’이다.
이 견성성불을 견성해 성불한다는 식으로 나누면 잘못이다. 견성이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이다. 견성은 ‘자성을 깨쳤다.’ ‘불성을 깨쳤다.’ ‘진여본성을 깨쳤다.’는 말인데 불성이니 진여니 하는 것은 중도를 말하며 쌍차쌍조(雙遮雙照)인 진여를 말하는데, 즉 중도를 깨친 것이 견성이라 한다. 중도를 바로 깨치면 우리 심리 상태가 대무심지이며 무념무생한 이것이 제8아뢰야의 무기식에서 확실히 깨어난 대원경지의 무심이다. 대무심지에 들어가는데 오매일여라는 관문이 있다. 몽중에도 전 일여하면 7지 보살이고 잠이 꽉 들어서 일여하면 오매일여, 멸진정 이상의 제 8아뢰야 경지이다.
조사 스님 모두가 실지 오매일여 돼서 참으로 대무심지인 여기서 깨쳐 조사노릇을 했지 누구든 오매일여, 몽중일여도 못된 데서 깨쳤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오매일여 된 데서 죽어서 살아나지 못하면 제8아뢰야 마계(魔界)이다. 언구를 의심해서 제8아뢰야 오매일여에서 확철히 깨쳐야 깨끗한 유리그릇 속 보배를 비추는 것과 같이 참 광명이 시방세계를 비춘다. 무심경계가 돼도 깨친 경계가 아니다. 대무심지에서도, 오매일여한 경지에서 다시 깨쳐야 한다. 그래야만 견성이다 선이다 할 수 있다.
선종 정맥사상은 육조 스님 때 하택(荷澤)이 지해로 나가니까 지해종사라 수기했다. 그 뒤 규봉이 공부해 화엄 5조가 됐다. 규봉이 돈오점수 사상을 만들어서 번뇌망상 있는 그대로를 견성이라 하고 돈오라 하고 달마선이라 했다. 그 후 규봉의 돈오점수 사상이 죽어서 햇빛을 못 봤는데 보조 스님을 만나서 빛을 보게 됐다. 보조 스님이 초년에는 잘 몰라서 규봉의 돈오점수 사상을 달마선인 줄 알고 이에 따라서 수심결을 짓고 결사문을 지었다. 그 후 사상이 크게 전환해 간화결의에서는 대무심지가 돼도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해서 크게 살아나야 하며 이것이 선종이라고 했다. 규봉이 말하는 해오는 선종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사구인 죽은 길로 들어가면 삼아승지겁이 벌어지고 막대한 노력과 시간 손해가 납니다. 우리는 경절문인 활구로 들어가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해야 한다.
끝으로 ‘백일법문’ 중 성철 스님 주요 말씀을 한 단락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불교라고 하면, ‘불(佛)’은 부처님이고 ‘교(敎)’는 가르침이니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불’은 인도 말로 붓다(Buddha)이니, ‘깨친 사람’이라는 뜻이다. 무엇을 깨쳤는가? 일체 만법의 본원(本源) 자체를 원만하게 깨친 사람이 부처님이다. 그러므로 불교란 일체 만법의 본원 자체를 바로 깨친 사람의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불교는 일체 만법을 깨친다는 ‘각(覺)’에 근본 의의가 있다. 만약 ‘깨친다’는 데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서 불교를 논의한다면 절대로 불교가 아니다. 이 일체 만법을 총괄해서 말하자면 ‘법성(法性)’이라고 하니, 일체 만법의 자성(自性)이라는 말이다. 결국, 법성 또는 자성을 바로 깨치는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다. 불교라고 하면 성불(成佛)이 목적인데, 성불하려면 언어와 문자로는 안 된다. 아무리 큰 학자라도 언설과 이론으로 성불한다고 한 사람은 없다. 밥 이야기를 아무리 해 봤자 배가 부르지 않고 배가 부르려면 밥을 먹어야 하듯이, 스스로 마음을 닦아서 자성을 바로 봐야 성불할 수 있지 언어와 문자로는 성불하지 못한다. 불교의 최고 원리는 대승불교에서 볼 때도 중도에 있고, 선종에서 볼 때도 중도에 있다.”
* 이 글은 미래에 만들어질 새로운 대장경에 들어갈 ‘백일법문’(성철스님법어집)(장경각, 1992)의 뜻을 간추리면서 몇 가지 수정하기도 했다.
** 이 글은 사부대중 모두가 깨달음으로의 길을 가기 위한 공익적 목적으로 일부 전문가와 신도들의 의견이나 우려를 전하는 형식으로 작성됐다. 이는 일방의 의견일 뿐 다른 해석과 반론도 충분히 가능하다.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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