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이야기①]'페니실린·종이·설탕' 이병철의 선택은

기사등록 2013/06/08 06:33:25

최종수정 2016/12/28 07:34:49

[거인시대-뉴시스 특별 연재]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 삼성그룹 이병철 선대회장, LG그룹 구인회 회장…'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대한민국 산업 역사의 큰 업적을 남긴 기업인들의 숨은 이야기를 쉽게 풀어쓴 서적이 나왔다. 뉴시스는 전경련 FKI미디어의 협조를 얻어 최근 출간된 '대한민국을 바꾼 경제거인 시리즈'의 주요 내용을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연재한다. 그 두번째 이야기는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의 삶과 경영법칙으로 '경제거인시리즈② 이병철처럼(저자 박시온)'에서 요약 발췌했다. [편집자 주]

【서울=뉴시스】정리/우은식 기자 = 21세기 우리나라 CEO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경영자는 누구일까?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다. 그는 우리나라에 ‘경영’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부터 ‘글로벌 초일류 기업, 삼성’의 초석을 마련한 대한민국 경영의 아버지이다. 그가 기업을 일구어낸 역사는 한국의 산업사요, 경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병철 회장은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세워 사업을 시작해 1938년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그룹의 모태인 삼성상회를 설립했다.

 1951년에는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설립해 무역업을 시작했으며, 1953년에서 1954년 사이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통해 큰 성공을 거뒀다.

 이후 전기, 전자, 조선, 항공, 석유 화학, 은행, 증권, 보험, 병원, 백화점, 언론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산업 분야에 진출해 삼성을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이병철 회장이 50년간 삼성의 최고 사령탑으로 재임하면서 설립 또는 인수한 기업은 모두 서른일곱 개에 달한다. 그 기업들은 대부분 세계 최고이거나 그 수준에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

 ◇한국전쟁 중에 20배 성장한 삼성물산공사

 아직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우리나라 임시 수도인 부산.

 “우리 회사 자본금이 60억 원입니다. 지난 1년 사이에 스무 배나 불어났어요.”

 이병철 회장이 부산에서 처음 회사를 열었을 때에는 규모가 훨씬 큰 회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무엇이 잘 팔리는 물건인지 알아내는 시장 조사 능력과 물건을 조달하는 기동력에 있어서는 삼성물산주식회사를 따라올 곳이 없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에 철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전국에 있는 고철을 모아 일본에 수출했다.

 그 이익으로 홍콩 등지에서 비료와 설탕을 수입해 국내에 팔았다. 그의 예상은 늘 적중했고 수익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삼성물산공사가 드디어 재기에 성공한 것 맞죠? 사장님, 어서 한 말씀 해주십시오!” 직원들이 재촉했다.

 그랬다. 이병철 회장은 전쟁 전에 서울에서 이미 삼성물산공사라는 이름의 회사를 운영해본 경험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 모든 재산을 잃고 내려왔지만, 당시 체득했던 무역의 기초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직원들과 함께 기쁨에 흠뻑 취해도 좋을 것 같았지만 오늘따라 이병철의 눈빛이 평소보다 깊었다.

 “저는 어쩐지 숫자 놀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호해 보이는 입술을 열어 그가 낮게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전쟁 중이라 물건값이 그만큼 올랐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흑자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이 호황이 얼마나 더 갈지 자신할 수도 없습니다. 물자가 부족하니 당장은 무역을 해서 조달하는 것이 옳습니다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본적 해결책은 물건을 만드는 것"

 직원들이 순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사장님은 우리도 무언가 만들어서 팔자는 말씀이십니까?”

 이병철 회장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직원들은 미소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평소 말수가 적은 이병철이 그런 미소를 보인다는 것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는 뜻!

 “아이쿠, 사장님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여기저기서 총질을 해대는 이 상황에서 공장을 세우는 건 화약을 짊어지고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공장을 지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투자 원금을 회수할 수나 있을지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맞습니다. 더 많은 물건을 더 빨리 들여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미 순조롭게 궤도에 올라 있는 무역업을 버리고 왜 굳이 제조업에 손을 대신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밑 빠진 독에 물을 계속 붓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깨진 독을 고치고 나서 물을 부어야 합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알쏭달쏭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아 돈을 버는 일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더 크고 탄탄한 회사가 되려면 물건을 살 소비자가 돈이 있어야 하고 나라가 부강해져야 합니다. 이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는 길은 힘들어도 잿더미 위에 공장을 짓고 우리 손으로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가진 60억 원을 가장 값지게 쓰는 방법입니다.”

 해방 직후 혼란기를 거치면서 정부가 수립된 해는 1948년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경제 개발의 기반을 다지려고 애쓰던 1950년에 한국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농업시설, 공업 시설, 발전 시설을 포함한 피해액은 3억 5400만 달러 정도였고 특히 공업 시설의 피해액은 1억 1500만 달러에 달했다.

 당시 남한의 3대 공업 지역으로는 경인(서울과 인천 서구), 삼척(중부 및 동해안 지역), 영남(대구 및 부산 지구)이 있었다. 그중 영남 지구만이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형편이었고 나머지 두 곳은 생산 시설 대부분이 파괴됐다.

 이병철 회장의 결심이 이미 확고하다는 것을 간파한 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생산 공장을 짓는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공장을 지을 생각이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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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저도 아직 모릅니다. 앞으로 연구해서 결정하도록 하지요.”

 그 말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업종도 생각해두지 않고 무조건 공장을 세우겠다니…. 그러나 사람들은 이병철이 한번 내뱉은 말은 꼭 해내고 마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이병철의 혜안을 다시 한 번 믿고 따르기로 했다.

 이병철은 지난 15년간 사업을 하면서 가장 먼저 깨달은 성공의 필수 조건이 있었다.

 ‘먼저 치밀한 조사와 준비가 필요해.’

 다음날부터 전 직원이 각계에 있는 전문가를 쫓아다녔다. 질문은 단 한가지!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이병철 자신도 정부의 경제 관료, 경제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며 돌아다녔다. 그러나 대부분 비관적인 답을 내놓았다.

 “돈이 돈 같지 않은 세상입니다. 날마다 치솟는 물가를 보십시오. 공장이 아니라 돈을 집어삼키는 괴물이 따로 없을 걸요?”

 “아직 전쟁 중이에요. 그럴 일이 없길 바라지만, 만에 하나 폭격이라도 맞으면 그날로 파산입니다.”

 경영진의 걱정 어린 충고만 되돌아왔다.

 “마음에 둔 품목이나 업종이 있습니까?”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수입품을 대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허, 이거 참! 공장을 세우고 물건을 만든다고 칩시다. 미국산보다 잘 만들 수 있습니까? 어림없지요.”

 그런데 같은 이야기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단 한 명의 전문가가 있었다. 정부 관료였던 그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병철 회장은 용기를 얻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끈질기게 질문을 던졌고 결국 가장 중요한 답을 얻었다.

 "그럼 각오를 단단히 하십시오. 당분간 이익을 기대하긴 어려울 겁니다.”

 “예,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나라와 국민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 사장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다행입니다. 수입 물자 중에서 앞으로 국민들한테 더 많이 필요해질 품목은 종이, 페니실린(Penicillin, 푸른곰팡이를 배양하여 얻은 항생 물질), 설탕일 겁니다.”

 ◇종이, 페니실린, 설탕…이병철의 선택은

 세 가지 품목은 모두 막대한 설비 투자가 필요했고 기술적인 문제도 안고 있었다. 선택을 잘못하면 한 번에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마음을 담담히 하고 여러 가지 조건을 비교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기준은 세 가지! 수입품을 대체할 수 있고, 국민들에게 현재와 미래에 모두 꼭 필요해서 시장성이 충분하고, 마지막으로 빨리 국산화할 수 있는 물건이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해방 전 우리나라에는 대규모 제지 공장이 열다섯 개 있었다. 북한에 열 네 개, 남한의 군산에 한 개가 있었다. 물론 규모가 작은 공장들도 십여 개가 있었지만, 한국전쟁 중에 거의 파괴되어 지금은 부산에 있는 몇 개 공장만 가동하고 있었다.

 1년에 겨우 3~4톤 정도밖에 생산해내지 못했고 나머지는 모두 원조 물자와 재생지로 충당하고 있었다.

 제약업은 해방 전에 일본 약품 회사가 시장을 독점했다. 그러다보니 국내생산 시설은 기껏해야 고약(주로 헐거나 곪은 데에 붙이는 끈끈한 약) 종류, 간단한 외상 치료 약품, 소화제나 감기약 정도를 만드는 수준이었다.

 페니실린 같은 항생제를 만들 수 있는 회사는 단 한 곳도 없었다. 그런데 각종 전염병과 감염이 많은 때이니 페니실린의 수요가 많았고 대부분 군대에서 흘러나온 것을 시장에서 팔고 있었다. 분명 생산에만 성공하면 판로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비용이 많이 들고 전문성을 많이 요구했다.

 제당업은 1917년에 평양 근처에 우리나라 사람이 ‘조선제당회사’를 세워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원료를 제대로 조달하지 못해 문을 닫았다. 1920년에 이 회사를 인수해 문을 연 ‘대일본제당’이 해방 직전까지 1년에 약 50톤 정도를 생산해 전국에 공급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이 공장도 문을 닫아 우리나라는 설탕 공급을 모두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1년에 200만 달러의 외화를 설탕과 맞바꿨고, 국내에서 거래하는 설탕 가격은 다른 나라 시세보다 세 배 이상 높았다.

 ‘종이 소비량은 문화 수준의 척도이다. 설탕도 식생활이 개선되면 분명히 그 수요가 훨씬 늘어날 거야. 약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럼 어떤 품목을 선택해야 할까?’

 이병철 회장의 고민은 점점 커졌다. 이때 그의 고민을 덜어준 것은 의뢰한 지 3개월 만에 ‘다나카기계’에서 도착한 제당 공장 건설에 관한 기획서와 견적서였다.

 “나머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약은 6개월, 제지는 8개월 정도 걸린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제당업을 선택했다.

 ‘세 가지 품목 모두 수입 대체 효과와 장래성이 있다. 하지만 한 달이라도 빨리 착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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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이야기①]'페니실린·종이·설탕' 이병철의 선택은

기사등록 2013/06/08 06:33:25 최초수정 2016/12/28 07:3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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