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이상주의 ‘세종의 공부’
조선의 역사는 519년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 평균은 220년 남짓이다. 조선이 중국의 왕조에 비해 훨씬 안정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안정은 유교통치 질서를 큰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유교는 가부장제다. 집안은 아버지를 정점으로 일사분란하게 유지된다. 이 개념은 임금이 아버지요, 백성이 자식이라는 관계로 확대 정립되었다. 그 결과 안정된 사회구조를 형성할 수 있었다.
세종대왕은 이 같은 사회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군주다. 그 노력의 결과가 집현전 설치, 경연 등으로 나타난다. 세종은 평생공부를 통해 인품, 교양, 덕성, 비전을 가진 임금이 되어 만백성의 거울이 되었다. 공부의 핵심은 경연(經筵)이다. 경은 읽어야 할 유학서적이고, 연은 펼쳐 놓은 자리라는 뜻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인문학 세미나다. 이를 통해 임금은 인격을 닦고, 지식을 습득하고, 나라의 경영을 논의한다.
그러나 경연은 한편으로는 신하에 의한 임금의 통제 수단이기도 했다. 세종 시대의 고위 관료들은 임금에게 유학 경전, 즉 인문학 공부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성현의 가르침을 배워 백성을 섬기는 군주가 되어달라는 주문이다. 임금은 인문학과 함께 실용학의 병행을 꾀했다. 대신들에게도 실용학 서적 탐독을 권유했다. 당대 최고의 석학을 경연의 스승으로 모셨지만 끌려가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올곧은 소신과 비전을 갖고 공부를 했다. 또 학생으로서 배움의 자세에 충실하되 왕으로서 위엄을 잃지 않았다.
왕과 신하의 위치는 경연에서 볼 수 있다. 임금은 경연에서 석학들을 스승으로 예우하되 신하로 대우했다. 공부방에서도 임금이 스승보다 높은 존재였다. 공부 자리에서도 군신관계는 바뀌지 않았다. 이를 단종실록에서 엿볼 수 있다. 신하들은 경연관들이 꿇어 엎드려서 다만 예에 의하여 강의하는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다. 신하의 건의를 받은 단종은 대신은 경연 때 부복하지 말고 강의하도록 했다. 이로 볼 때 이전 임금인 세종 때는 편한 자세가 아니라 무릎을 꿇은 자세로 시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중국의 경우 공부방에서는 천자보다 스승이 우위였다. ‘상변통고’의 학교례를 보자. ‘태학에서의 예(禮)는 비록 천자(天子)에게 아뢸 때라도 북면(北面)하지 않으니, 스승을 높이는 까닭이다.’ 태학은 주나라 천자가 만든 중국 고대의 대학이다. 북면은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것이다. 왕정시대의 군주는 남향으로 앉아서 북쪽을 향해 자리한 신하와 정사를 의논하였다. 따라서 남면은 군주의 지위를, 북면은 신하의 예의를 의미한다. 그런데 태학에서는 천자에게 강의할 때 북면하지 않았다. 이는 천자도 학교에서는 학생이라는 의미다. 스승의 상징성이 학생인 천자보다 높은 것이다.
훗날 이익과 같은 조선의 유학자도 비슷한 시각이었다. 공부방에서는 스승이 군주보다 우위의 존재여야 한다고 입장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군주가 스승을 예우하되 신하로 대우했다. 조선에서는 경연에서도 학생인 군주의 지위가 스승보다 높았다.
‘세종의 공부’ 저자·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 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조선의 역사는 519년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 평균은 220년 남짓이다. 조선이 중국의 왕조에 비해 훨씬 안정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안정은 유교통치 질서를 큰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유교는 가부장제다. 집안은 아버지를 정점으로 일사분란하게 유지된다. 이 개념은 임금이 아버지요, 백성이 자식이라는 관계로 확대 정립되었다. 그 결과 안정된 사회구조를 형성할 수 있었다.
세종대왕은 이 같은 사회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군주다. 그 노력의 결과가 집현전 설치, 경연 등으로 나타난다. 세종은 평생공부를 통해 인품, 교양, 덕성, 비전을 가진 임금이 되어 만백성의 거울이 되었다. 공부의 핵심은 경연(經筵)이다. 경은 읽어야 할 유학서적이고, 연은 펼쳐 놓은 자리라는 뜻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인문학 세미나다. 이를 통해 임금은 인격을 닦고, 지식을 습득하고, 나라의 경영을 논의한다.
그러나 경연은 한편으로는 신하에 의한 임금의 통제 수단이기도 했다. 세종 시대의 고위 관료들은 임금에게 유학 경전, 즉 인문학 공부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성현의 가르침을 배워 백성을 섬기는 군주가 되어달라는 주문이다. 임금은 인문학과 함께 실용학의 병행을 꾀했다. 대신들에게도 실용학 서적 탐독을 권유했다. 당대 최고의 석학을 경연의 스승으로 모셨지만 끌려가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올곧은 소신과 비전을 갖고 공부를 했다. 또 학생으로서 배움의 자세에 충실하되 왕으로서 위엄을 잃지 않았다.
왕과 신하의 위치는 경연에서 볼 수 있다. 임금은 경연에서 석학들을 스승으로 예우하되 신하로 대우했다. 공부방에서도 임금이 스승보다 높은 존재였다. 공부 자리에서도 군신관계는 바뀌지 않았다. 이를 단종실록에서 엿볼 수 있다. 신하들은 경연관들이 꿇어 엎드려서 다만 예에 의하여 강의하는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다. 신하의 건의를 받은 단종은 대신은 경연 때 부복하지 말고 강의하도록 했다. 이로 볼 때 이전 임금인 세종 때는 편한 자세가 아니라 무릎을 꿇은 자세로 시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중국의 경우 공부방에서는 천자보다 스승이 우위였다. ‘상변통고’의 학교례를 보자. ‘태학에서의 예(禮)는 비록 천자(天子)에게 아뢸 때라도 북면(北面)하지 않으니, 스승을 높이는 까닭이다.’ 태학은 주나라 천자가 만든 중국 고대의 대학이다. 북면은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것이다. 왕정시대의 군주는 남향으로 앉아서 북쪽을 향해 자리한 신하와 정사를 의논하였다. 따라서 남면은 군주의 지위를, 북면은 신하의 예의를 의미한다. 그런데 태학에서는 천자에게 강의할 때 북면하지 않았다. 이는 천자도 학교에서는 학생이라는 의미다. 스승의 상징성이 학생인 천자보다 높은 것이다.
훗날 이익과 같은 조선의 유학자도 비슷한 시각이었다. 공부방에서는 스승이 군주보다 우위의 존재여야 한다고 입장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군주가 스승을 예우하되 신하로 대우했다. 조선에서는 경연에서도 학생인 군주의 지위가 스승보다 높았다.
‘세종의 공부’ 저자·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 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