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하도겸의 ‘일본 속 우리 신불(神佛)을 찾아서’ <2>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 일본은 네 개의 커다란 섬으로 이뤄진 섬나라다. 우리나라에서 가까운 섬이 규슈(九州), 도쿄·오사카가 있는 섬이 혼슈(本州)다. 규슈와 혼슈 아래에 시코쿠(四國)라는 또 하나의 커다란 섬에 있다. 도쿠시마현(德島縣) 북쪽에 있는 나루토시(鳴門市) 나루토초(鳴門町) 도사하쿠(土佐泊)가 바로 그곳이다.
이곳을 찾을 때 일본어를 조금 안다고 “시라기진자”가 어디냐고 물으면 누구도 모른다. 이를 두고 어떤 학자는 일본인들이 우리 한국 고대 신라에서 온 신을 모시는 신사를 어찌 알겠는가? 라고 탄식할지도 모른다. 신라신사는 그냥 우리 한자 발음과 비슷하게 ‘신라진자’로 읽힌다. ‘아! 신라진자는 어디죠?’라고 다시 물으면 동네 사람들은 바닷가 언덕 위에 있다고 바로 가르쳐 준다.
고구려는 고구리, 백제는 구다라, 신라는 시라기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 일본어 발음이다. 그럼에도 신라신사를 우리말 그대로 신라진자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신사에서 모시는 신이 도래계 즉 한반도 신라에서 건너온 신이라는 점에서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신사에서 모시고 있는 신은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嗚命)’이나 ‘우두천왕(牛頭天王) 또는 ’신라국명신(新羅國明神)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일본의 유명한 고대사학자 도오테이칸(藤貞幹)과 미즈노유(水野祐) 등은 이 이름이 신라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의 고음(古音)과 같으며, 신라계 도래인 집단이 모신 신으로 여겨진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신라 도래인들이 신라국명신을 모신 신라신사 역시 신라인의 사당 즉 신라 시조묘가 된다.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를 보면 일본 천태종의 조사 사이초(最澄)는 804년 7월 6일에 당나라 유학을 떠난다. 그는 입당하기 전에 규슈 다자이후(大宰府)에 도착해 항해의 안전을 위해 신라국신인 가와라신(香春神) 등에게 제사를 지낸 바 있다. 이후 중국에서 무사히 귀국해 다시 가와라신에게 감사의 뜻으로 규슈 후쿠오카(福岡)에 신궁원(神宮院)이라는 신사까지 창건했다.
사이초의 제자이자 일본 천태종 3세 좌주인 엔닌(圓仁)도 입당해 2년 반이나 산둥반도 장보고의 유적지 가운데 신라승원인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서 기거한 바 있다. 일본에 무사 귀국한 그는 864년 입적에 앞서 제자들에게 적산신을 위해 선원을 건립하도록 유언한다. 제자들은 유지를 받들어 888년에 적산선원(赤山禪院)을 세우고 적산명신(赤山明神)을 받들게 됐다.
오늘날 적산신은 태산부군(泰山府君)으로 도교에 있어서 명부(冥府)의 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적산신은 중국의 도교신이 아니다. 적산신라원의 불법을 수호하는 적산신 즉 신라산신에서 유래됐다. 원래 적산신은 적산법화원에서 신라인이 예배하던 토속신이다. 신사측은 적산신을 태산부군으로 보지만, 이가 곧 신라명신으로도 불리는 스사노오·우두천왕과도 동일시하고 있다. 때문에 적산신과 신라명신을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다.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 일본은 네 개의 커다란 섬으로 이뤄진 섬나라다. 우리나라에서 가까운 섬이 규슈(九州), 도쿄·오사카가 있는 섬이 혼슈(本州)다. 규슈와 혼슈 아래에 시코쿠(四國)라는 또 하나의 커다란 섬에 있다. 도쿠시마현(德島縣) 북쪽에 있는 나루토시(鳴門市) 나루토초(鳴門町) 도사하쿠(土佐泊)가 바로 그곳이다.
이곳을 찾을 때 일본어를 조금 안다고 “시라기진자”가 어디냐고 물으면 누구도 모른다. 이를 두고 어떤 학자는 일본인들이 우리 한국 고대 신라에서 온 신을 모시는 신사를 어찌 알겠는가? 라고 탄식할지도 모른다. 신라신사는 그냥 우리 한자 발음과 비슷하게 ‘신라진자’로 읽힌다. ‘아! 신라진자는 어디죠?’라고 다시 물으면 동네 사람들은 바닷가 언덕 위에 있다고 바로 가르쳐 준다.
고구려는 고구리, 백제는 구다라, 신라는 시라기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 일본어 발음이다. 그럼에도 신라신사를 우리말 그대로 신라진자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신사에서 모시는 신이 도래계 즉 한반도 신라에서 건너온 신이라는 점에서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신사에서 모시고 있는 신은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嗚命)’이나 ‘우두천왕(牛頭天王) 또는 ’신라국명신(新羅國明神)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일본의 유명한 고대사학자 도오테이칸(藤貞幹)과 미즈노유(水野祐) 등은 이 이름이 신라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의 고음(古音)과 같으며, 신라계 도래인 집단이 모신 신으로 여겨진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신라 도래인들이 신라국명신을 모신 신라신사 역시 신라인의 사당 즉 신라 시조묘가 된다.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를 보면 일본 천태종의 조사 사이초(最澄)는 804년 7월 6일에 당나라 유학을 떠난다. 그는 입당하기 전에 규슈 다자이후(大宰府)에 도착해 항해의 안전을 위해 신라국신인 가와라신(香春神) 등에게 제사를 지낸 바 있다. 이후 중국에서 무사히 귀국해 다시 가와라신에게 감사의 뜻으로 규슈 후쿠오카(福岡)에 신궁원(神宮院)이라는 신사까지 창건했다.
사이초의 제자이자 일본 천태종 3세 좌주인 엔닌(圓仁)도 입당해 2년 반이나 산둥반도 장보고의 유적지 가운데 신라승원인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서 기거한 바 있다. 일본에 무사 귀국한 그는 864년 입적에 앞서 제자들에게 적산신을 위해 선원을 건립하도록 유언한다. 제자들은 유지를 받들어 888년에 적산선원(赤山禪院)을 세우고 적산명신(赤山明神)을 받들게 됐다.
오늘날 적산신은 태산부군(泰山府君)으로 도교에 있어서 명부(冥府)의 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적산신은 중국의 도교신이 아니다. 적산신라원의 불법을 수호하는 적산신 즉 신라산신에서 유래됐다. 원래 적산신은 적산법화원에서 신라인이 예배하던 토속신이다. 신사측은 적산신을 태산부군으로 보지만, 이가 곧 신라명신으로도 불리는 스사노오·우두천왕과도 동일시하고 있다. 때문에 적산신과 신라명신을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다.

5세 좌주 지증대사(智證大師) 엔친(圓珍)도 신라무역상 흠량휘의 도움으로 입당 구법 했다. 858년에 그가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배에 한 노옹이 나타나 “나는 신라국의 명신이다. 그대 엔친을 위해 불법을 수호해 줄 것을 약속한다”고 했다. 엔친도 귀국 후 시가현(滋賀県) 온조지(園城寺)에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을 세웠다. 이 신라선신 역시 신라국신, 적산명신과 함께 신라대명신을 말한다.
다시 신라신사로 돌아가 보자. 도사하쿠를 처음 찾는 사람이 매우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 신라신사를 찾기란 쉽지 않다. 현재 신사를 관리하는 사람인 궁사 역시 주변의 다른 신사도 함께 관리하고 있다. 또 신사 주변의 어촌 주민만이 제사에 참여하고 있어 이 신사는 대부분 비워져 있다. 실제로 가을 풍어제를 겸한 추례제(秋例祭)인 10월 10일 이외에는 신사에서 사람들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다만 시골이다 보니 신사의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절하는 장소인 배전(拜殿) 등에 있는 목함(木函), 여러 신상은 쉽게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이 신사가 있는 도사하쿠(土佐泊)는 지도에 나오는 바와 같이 오사카와 와카야마현(和歌山縣)에서 시코쿠로 가는 길목에 있는 기항점에 있다. 오사카는 예나 지금이나 칼과 철기 등 각종 물산의 산지로 유명하다. 와카야마현은 일본의 김치와 다름없는 우메보시의 재료가 되는 매실과 밀감 등의 과일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이런 물산과 과일을 가득 실은 배가 시코쿠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사하쿠를 지나야 한다. 이 때문에 항해 안전의 신인 신라대명신을 모신 신라신사는 등대와도 같은 밝은 빛을 바닷가 언덕위에서 밝히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대명신을 당시의 사람들은 감사하게 섬겼을 것이다.
값비싼 물산과 희귀한 과일을 가득 실은 까닭에 선원들은 왜구 즉 해적의 출몰도 매우 걱정되는 일이었다. 935년에 쓰인 도사닛키(土佐日記)는 일본에서도 매우 귀중한 항해일지 가운데 하나다. 이를 보면 당시 사람들은 밤에는 해적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듣고, 어두운 밤임에도 시코쿠와 오사카를 왕래하고 있다. 그만큼 해적이 무서웠기에 위험천만한 어두운 밤에 암초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줄 신불이 필요했다. 이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우리의 신라대명신이었다.
일본 불교의 본산은 천태종이다. 천태종의 3대조사 모두의 무사귀국을 도은 신라대명신. 당나라로 향하는 뱃길뿐만 아니라 일본의 주요 항로에서 등대보다도 밝게 어두운 바다를 홀로 밝힌 신라대명신. 일본인들이 그 옛날 일본에 고대 문화를 선물한 신라인들을 기억하며 그를 모신 신사를 신라신사로 그대로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독도·위안부 문제 등 한일관계가 날로 어려워지고 있다. 다시 한 번 신라대명신의 출현을 빈다.
국립민속박물관 큐레이터 [email protected]
다시 신라신사로 돌아가 보자. 도사하쿠를 처음 찾는 사람이 매우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 신라신사를 찾기란 쉽지 않다. 현재 신사를 관리하는 사람인 궁사 역시 주변의 다른 신사도 함께 관리하고 있다. 또 신사 주변의 어촌 주민만이 제사에 참여하고 있어 이 신사는 대부분 비워져 있다. 실제로 가을 풍어제를 겸한 추례제(秋例祭)인 10월 10일 이외에는 신사에서 사람들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다만 시골이다 보니 신사의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절하는 장소인 배전(拜殿) 등에 있는 목함(木函), 여러 신상은 쉽게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이 신사가 있는 도사하쿠(土佐泊)는 지도에 나오는 바와 같이 오사카와 와카야마현(和歌山縣)에서 시코쿠로 가는 길목에 있는 기항점에 있다. 오사카는 예나 지금이나 칼과 철기 등 각종 물산의 산지로 유명하다. 와카야마현은 일본의 김치와 다름없는 우메보시의 재료가 되는 매실과 밀감 등의 과일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이런 물산과 과일을 가득 실은 배가 시코쿠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사하쿠를 지나야 한다. 이 때문에 항해 안전의 신인 신라대명신을 모신 신라신사는 등대와도 같은 밝은 빛을 바닷가 언덕위에서 밝히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대명신을 당시의 사람들은 감사하게 섬겼을 것이다.
값비싼 물산과 희귀한 과일을 가득 실은 까닭에 선원들은 왜구 즉 해적의 출몰도 매우 걱정되는 일이었다. 935년에 쓰인 도사닛키(土佐日記)는 일본에서도 매우 귀중한 항해일지 가운데 하나다. 이를 보면 당시 사람들은 밤에는 해적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듣고, 어두운 밤임에도 시코쿠와 오사카를 왕래하고 있다. 그만큼 해적이 무서웠기에 위험천만한 어두운 밤에 암초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줄 신불이 필요했다. 이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우리의 신라대명신이었다.
일본 불교의 본산은 천태종이다. 천태종의 3대조사 모두의 무사귀국을 도은 신라대명신. 당나라로 향하는 뱃길뿐만 아니라 일본의 주요 항로에서 등대보다도 밝게 어두운 바다를 홀로 밝힌 신라대명신. 일본인들이 그 옛날 일본에 고대 문화를 선물한 신라인들을 기억하며 그를 모신 신사를 신라신사로 그대로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독도·위안부 문제 등 한일관계가 날로 어려워지고 있다. 다시 한 번 신라대명신의 출현을 빈다.
국립민속박물관 큐레이터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