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박주연 기자 = <케네디, 루스벨트, 애덤스, 부시, 태프트….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명가다. 우리나라에는 대를 이어 정치를 하고 국민의 존경을 받을만한 업적을 쌓은 가문이 없을까. 뉴시스는 한국의 정치명가 기획기사 여덟번째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인 조소앙 전 의원 일가편을 게재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최고 이론가, 대한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헌장의 초안 작성자, '교육균등, 권리 균등, 경제 균등'의 삼균주의 창안자, 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 임시정부 외무부장, 의정원 의장, 비상국민회의 의장, 사회당 당수, 2대 국회의원….'
평생을 조국과 민족의 독립에 헌신한 조소앙 전 의원(1887~1958)의 이력이다. 안중근이나 이회영이 무력투쟁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면 조소앙은 이론과 사상을 통해 독립운동의 노선을 선도한 이론가였다.
조소앙의 활동을 더욱 빛나게 했던 건 그의 가문이었다. 이회영 가문과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문으로 꼽히는 조소앙의 가문에서는 그의 여섯남매를 비롯해 무려 11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됐다.
조소앙의 형 조용하(1862~1939)는 대한제국 시절 독일주재 참사관, 죽산군수 등을 지내다 합병 후 하와이로 망명해 대조선독립단장으로서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펼쳤다.
동생 조용주(1889~1937)는 1913년 소앙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 아세아민족반일대동단을 결성했고 1915년에는 국내로 들어와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해 조소앙의 활동을 지원했다.
조용한(1894~1933) 역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붙잡혀 옥고를 치렀으며 여동생 조경순(1898~1948)도 중국으로 건너가 한국독립당·한국혁명여성동맹에서 항일운동에 나섰다.
막내동생 조시원(1904~1982)도 중국한인청년동맹, 화랑청년회,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선전위원, 한국독립당 조직부장 등을 지내며 활발한 독립운동을 했고, 그의 아내 이순승(1902~1994) 역시 남편과 함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조소앙의 아들 시제(1913~1947)와 인제(1917~1997) 등 조소앙 6남매의 2세들도 임시정부와 광복군 등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의 대를 이었다.
함안 조씨인 조소앙은 고종 24년이던 1887년 세조 때의 생육신 중 한 명인 조여의 16대손으로 경기도 파주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용은(鏞殷)이지만 호인 소앙(素昻)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조정규와 박필양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6살 때부터 정삼품 통정대부였던 조부 조성룡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15살 무렵이던 1902년 성균관에 입학,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성균관에 입학하던 해인 1902년 신채호 등과 함께 이하영의 매국음모를 막고자 성토문을 만들어 항의했고, 1904년 성균관을 마친 후에는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으로 유학, 동경부립1중학에 들어갔다.
조소앙은 1906년에는 동경유학생 친목단체인 '공수학회'를 조직해 회보를 발간하면서 주필로 활동했고, 같은 해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1909년에는 동경에 있는 조선인 단체를 모두 통합한 대한흥학회를 창립, 회지인 '대한흥학회보'의 주필로 활동했다.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 당시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하는 '한일병합조약'이 맺어지자 조소앙은 '한일합방 성토문'을 작성하고 비상대회를 소집하려다 발각돼 심한 고초를 겪었다.
1912년 메이지대를 졸업하고 귀국해 국내의 경신학교·양정의숙·대동법률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그는 1913년 중국으로 망명, 항일단체 대동당을 조직했다.
조소앙은 1917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대회에 '주권불멸론'(主權不滅論), '민권민유론'(民權民有論)을 골자로 하는 발제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1918년에는 무장항쟁노선을 담은 '무오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작성, 독립운동가 39명의 서명을 받아 공동 명의로 발표했다.
3·1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에는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해 부주석을 맡았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임시정부헌법·의정원법 기초위원과 심사위원을 지내며 민주공화제헌법의 기초를 만드는데 기여했다.
이어 임시정부 초대국무원 비서장을 역임한 후 국무위원에 선임됐고, 영국·프랑스·스위스·네덜란드 등 세계 각국을 돌며 만국평화회의, 만국사회당대회, 국제사회당집행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며 한국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조소앙은 1922년 임시정부 외무총장·의정원의장이 돼 의열단원이던 김상옥을 국내에 밀파,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등을 지원했다.
1929년에는 김구·안창호·이시영·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 교육 균등·권리 균등·경제 균등 등 삼균주의에 입각한 '태극기 민족혁명론'을 주창했다. 고르게 교육받고, 고르게 정치에 참여하고, 고르게 잘 살아 개인뿐 아니라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도 균등한 생활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한국독립당의 당 이념으로 채택된데 이어 한국국민당, 민족혁명당 등 좌·우익 정당의 정강·정책에 채택됐고,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임시정부건국강령'에도 반영됐다.
1943년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 1945년 충칭 임시정부 외무부장을 지낸 조소앙은 광복을 맞은 1945년 임시정부요인 2진으로 귀국, 김구와 함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남북협상에 참가하는 등 조국 통일을 위해 힘을 쏟았다.
같은 해 12월 방응모·백홍균·조시원 등과 사회당을 결성해 당수로서 삼균주의의 정책적 실현을 위해 노력했고, 1950년 2대 총선에서는 서울 성북구에 출마, 전국 최고득표를 기록하며 당선됐다.
하지만 6·25 전쟁 때 조소앙은 강제 납북됐고, 이후 그와 그의 삼균주의는 잊혀졌다. 반공을 강조한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서 북으로 간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공산주의와 유사한 사상으로 치부됐다.
북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피랍 뒤 북한에서 납북인사들과 함께 평화통일운동과 북한체제 반대 운동을 벌이던 조소앙은 1958년 9월 10일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조소앙이 사망한지 30년이 지난 1989년에야 조소앙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고, 이듬해 북한도 그에게 조국통일상을 수여했다.
[email protected]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최고 이론가, 대한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헌장의 초안 작성자, '교육균등, 권리 균등, 경제 균등'의 삼균주의 창안자, 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 임시정부 외무부장, 의정원 의장, 비상국민회의 의장, 사회당 당수, 2대 국회의원….'
평생을 조국과 민족의 독립에 헌신한 조소앙 전 의원(1887~1958)의 이력이다. 안중근이나 이회영이 무력투쟁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면 조소앙은 이론과 사상을 통해 독립운동의 노선을 선도한 이론가였다.
조소앙의 활동을 더욱 빛나게 했던 건 그의 가문이었다. 이회영 가문과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문으로 꼽히는 조소앙의 가문에서는 그의 여섯남매를 비롯해 무려 11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됐다.
조소앙의 형 조용하(1862~1939)는 대한제국 시절 독일주재 참사관, 죽산군수 등을 지내다 합병 후 하와이로 망명해 대조선독립단장으로서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펼쳤다.
동생 조용주(1889~1937)는 1913년 소앙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 아세아민족반일대동단을 결성했고 1915년에는 국내로 들어와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해 조소앙의 활동을 지원했다.
조용한(1894~1933) 역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붙잡혀 옥고를 치렀으며 여동생 조경순(1898~1948)도 중국으로 건너가 한국독립당·한국혁명여성동맹에서 항일운동에 나섰다.
막내동생 조시원(1904~1982)도 중국한인청년동맹, 화랑청년회,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선전위원, 한국독립당 조직부장 등을 지내며 활발한 독립운동을 했고, 그의 아내 이순승(1902~1994) 역시 남편과 함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조소앙의 아들 시제(1913~1947)와 인제(1917~1997) 등 조소앙 6남매의 2세들도 임시정부와 광복군 등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의 대를 이었다.
함안 조씨인 조소앙은 고종 24년이던 1887년 세조 때의 생육신 중 한 명인 조여의 16대손으로 경기도 파주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용은(鏞殷)이지만 호인 소앙(素昻)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조정규와 박필양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6살 때부터 정삼품 통정대부였던 조부 조성룡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15살 무렵이던 1902년 성균관에 입학,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성균관에 입학하던 해인 1902년 신채호 등과 함께 이하영의 매국음모를 막고자 성토문을 만들어 항의했고, 1904년 성균관을 마친 후에는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으로 유학, 동경부립1중학에 들어갔다.
조소앙은 1906년에는 동경유학생 친목단체인 '공수학회'를 조직해 회보를 발간하면서 주필로 활동했고, 같은 해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1909년에는 동경에 있는 조선인 단체를 모두 통합한 대한흥학회를 창립, 회지인 '대한흥학회보'의 주필로 활동했다.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 당시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하는 '한일병합조약'이 맺어지자 조소앙은 '한일합방 성토문'을 작성하고 비상대회를 소집하려다 발각돼 심한 고초를 겪었다.
1912년 메이지대를 졸업하고 귀국해 국내의 경신학교·양정의숙·대동법률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그는 1913년 중국으로 망명, 항일단체 대동당을 조직했다.
조소앙은 1917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대회에 '주권불멸론'(主權不滅論), '민권민유론'(民權民有論)을 골자로 하는 발제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1918년에는 무장항쟁노선을 담은 '무오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작성, 독립운동가 39명의 서명을 받아 공동 명의로 발표했다.
3·1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에는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해 부주석을 맡았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임시정부헌법·의정원법 기초위원과 심사위원을 지내며 민주공화제헌법의 기초를 만드는데 기여했다.
이어 임시정부 초대국무원 비서장을 역임한 후 국무위원에 선임됐고, 영국·프랑스·스위스·네덜란드 등 세계 각국을 돌며 만국평화회의, 만국사회당대회, 국제사회당집행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며 한국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조소앙은 1922년 임시정부 외무총장·의정원의장이 돼 의열단원이던 김상옥을 국내에 밀파,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등을 지원했다.
1929년에는 김구·안창호·이시영·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 교육 균등·권리 균등·경제 균등 등 삼균주의에 입각한 '태극기 민족혁명론'을 주창했다. 고르게 교육받고, 고르게 정치에 참여하고, 고르게 잘 살아 개인뿐 아니라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도 균등한 생활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한국독립당의 당 이념으로 채택된데 이어 한국국민당, 민족혁명당 등 좌·우익 정당의 정강·정책에 채택됐고,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임시정부건국강령'에도 반영됐다.
1943년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 1945년 충칭 임시정부 외무부장을 지낸 조소앙은 광복을 맞은 1945년 임시정부요인 2진으로 귀국, 김구와 함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남북협상에 참가하는 등 조국 통일을 위해 힘을 쏟았다.
같은 해 12월 방응모·백홍균·조시원 등과 사회당을 결성해 당수로서 삼균주의의 정책적 실현을 위해 노력했고, 1950년 2대 총선에서는 서울 성북구에 출마, 전국 최고득표를 기록하며 당선됐다.
하지만 6·25 전쟁 때 조소앙은 강제 납북됐고, 이후 그와 그의 삼균주의는 잊혀졌다. 반공을 강조한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서 북으로 간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공산주의와 유사한 사상으로 치부됐다.
북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피랍 뒤 북한에서 납북인사들과 함께 평화통일운동과 북한체제 반대 운동을 벌이던 조소앙은 1958년 9월 10일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조소앙이 사망한지 30년이 지난 1989년에야 조소앙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고, 이듬해 북한도 그에게 조국통일상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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