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박주연 기자 = <케네디, 루스벨트, 애덤스, 부시, 태프트….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명가다. 우리나라에는 대를 이어 정치를 하고 국민의 존경을 받을만한 업적을 쌓은 가문이 없을까. 뉴시스는 한국의 정치명가 기획기사 다섯번째로 독립운동가 김근수-전월선 부부편을 게재한다.>
김근수·전월선 지사는 엄혹했던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활약했던 부부 독립운동가다. 동지이자 부부였던 이들은 가난한 독립운동가로 중국에서 하루하루를 기약할 수 없는 삶을 살면서도 독립을 향한 의지를 불태웠다.
두 사람의 인연을 맺어준 인물은 백범 김구 선생이다. 김구 선생은 1942년 독립운동을 하던 30살의 김 지사와 19세의 여성광복군이던 전 지사의 결혼을 주선했다.
의성 김씨 이계공파 33세손인 김근수 지사는 1912년 9월27일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중국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에 나섰다.
김 지사는 1935년 중국 난징에서 조선의열단에 입단해 연락원으로 활동했다. 1941년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가담, 선전 및 정보수집활동을 벌였다. 이준식이 이끄는 광복군 제1지대에 소속돼 산시·화베이 등지에서 지하공작에 참여하며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 동북지역 총책이라는 지위를 숨기고 '왕석(王石)'이라는 중국인 엿장수로 살던 그는 1940년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국내로 압송당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소변을 본다는 핑계를 대고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기차에서 뛰어내려 탈출했고, 건강을 회복한 후 다시 임시정부에 복귀했다.
김 지사의 아들 김원웅 전 의원은 10일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당시에 대해 '이제 끝이라는 생각과 매일 일본순사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는 악몽에서 벗어났다는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김 지사는 광복 직전인 1945년에는 한미연합작전의 한국측 대표로 미국 정보기관인 전략정보국(OSS·CIA의 전신)과 함께 광복군과 미군의 국내 상륙을 위한 OSS작전(독수리작전)을 추진했다.
1923년 2월6일 경북 상주에서 정선 전씨 전석출씨의 딸로 태어난 전월선 지사는 16세였던 1939년 중국의 귀주성 계림으로 건너가 '조선의용대'에 입대, 일본군에 대한 정보수집과 군대모집 등 공작활동을 했다.
전 지사는 1942년 4월20일 조선의용대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산하 광복군에 편입되면서 김 지사를 만났고, 광복군 제1지대서 김 지사와 함께 항일운동을 펼쳤다.
전 지사는 훗날 독립운동에 대해 "여성의 몸으로 독립군이되는 것은 쉬운 삶은 아니었다"며 "그러나 이것은 나 한사람만의 고난이 아니었다. 한사람의 독립운동가가 나오기에는 수많은 주변사람들의 고통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근수·전월선 지사는 해방후 국내로 들어와 서울 마포구, 경기 용인 등에서 거주하며 평범하고 조용한 삶을 살았다. 1990년 독립운동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나란히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김 지사는 광복 후에도 남북통일과 친일잔재 청산을 간절히 원했다. 그는 생전에 아들인 김원웅 전 의원에게 "남한이 친일파 청산을 못하면 통일의 주체가 될 수 없다"며 "민족공동체의 선을 지킬 도덕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근수 지사는 1992년 1월30일 경기 성남시 궁내동의 자택에서 80세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전월선 지사 역시 17년 후인 2009년 5월25일 89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타계했다.
김근수·전월선 지사는 엄혹했던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활약했던 부부 독립운동가다. 동지이자 부부였던 이들은 가난한 독립운동가로 중국에서 하루하루를 기약할 수 없는 삶을 살면서도 독립을 향한 의지를 불태웠다.
두 사람의 인연을 맺어준 인물은 백범 김구 선생이다. 김구 선생은 1942년 독립운동을 하던 30살의 김 지사와 19세의 여성광복군이던 전 지사의 결혼을 주선했다.
의성 김씨 이계공파 33세손인 김근수 지사는 1912년 9월27일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중국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에 나섰다.
김 지사는 1935년 중국 난징에서 조선의열단에 입단해 연락원으로 활동했다. 1941년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가담, 선전 및 정보수집활동을 벌였다. 이준식이 이끄는 광복군 제1지대에 소속돼 산시·화베이 등지에서 지하공작에 참여하며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 동북지역 총책이라는 지위를 숨기고 '왕석(王石)'이라는 중국인 엿장수로 살던 그는 1940년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국내로 압송당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소변을 본다는 핑계를 대고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기차에서 뛰어내려 탈출했고, 건강을 회복한 후 다시 임시정부에 복귀했다.
김 지사의 아들 김원웅 전 의원은 10일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당시에 대해 '이제 끝이라는 생각과 매일 일본순사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는 악몽에서 벗어났다는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김 지사는 광복 직전인 1945년에는 한미연합작전의 한국측 대표로 미국 정보기관인 전략정보국(OSS·CIA의 전신)과 함께 광복군과 미군의 국내 상륙을 위한 OSS작전(독수리작전)을 추진했다.
1923년 2월6일 경북 상주에서 정선 전씨 전석출씨의 딸로 태어난 전월선 지사는 16세였던 1939년 중국의 귀주성 계림으로 건너가 '조선의용대'에 입대, 일본군에 대한 정보수집과 군대모집 등 공작활동을 했다.
전 지사는 1942년 4월20일 조선의용대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산하 광복군에 편입되면서 김 지사를 만났고, 광복군 제1지대서 김 지사와 함께 항일운동을 펼쳤다.
전 지사는 훗날 독립운동에 대해 "여성의 몸으로 독립군이되는 것은 쉬운 삶은 아니었다"며 "그러나 이것은 나 한사람만의 고난이 아니었다. 한사람의 독립운동가가 나오기에는 수많은 주변사람들의 고통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근수·전월선 지사는 해방후 국내로 들어와 서울 마포구, 경기 용인 등에서 거주하며 평범하고 조용한 삶을 살았다. 1990년 독립운동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나란히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김 지사는 광복 후에도 남북통일과 친일잔재 청산을 간절히 원했다. 그는 생전에 아들인 김원웅 전 의원에게 "남한이 친일파 청산을 못하면 통일의 주체가 될 수 없다"며 "민족공동체의 선을 지킬 도덕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근수 지사는 1992년 1월30일 경기 성남시 궁내동의 자택에서 80세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전월선 지사 역시 17년 후인 2009년 5월25일 89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타계했다.
김근수·전월선 지사 슬하의 7남매 중 첫 아들인 김원웅 전 의원은 1944년 3월8일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충칭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부모님과 함께 고향인 대전으로 간 그는 대전중, 대전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중국국립정치대학에서 정치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시절에는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졸업 후인 1972년 민주공화당 사무처 직원으로 정계에 발을 들였다. 김근수 지사는 정치를 시작한 아들에게 '무사즉강'(無私卽强·사사로움이 없어야 강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 전 의원은 "아버지는 '사사로움이 없어야 강할 수 있다. 탄압에 저항하는 것보다 유혹에 무너지지 않는게 더 어렵다'고 말씀했다"며 "정치를 하면서 유혹에 무너지지 않도록 하라고 신신 당부했다"고 회고했다.
김 전 의원은 이후 3당 합당에 반대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 등과 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의원으로 첫 금배지를 달았다.
그는 15대 총선 낙선 후에는 노 전 대통령, 제종구·이부영 전 의원 등과 함께 서울 강남에서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음식점을 열었다.
'하로동선'은 여름의 화로, 겨울의 부채처럼 당장은 필요하지 않으나 언젠가 때가 오면 소중하게 쓰일 날이 올 것이라는 뜻이다.
김 전 의원은 "나라가 남북으로 갈려져 있는데 영·호남으로까지 갈라지는 것은 안 된다는 뜻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제종구, 이부영 전 의원 등과 함께 꼬마민주당을 만들었다"며 "15대 총선 낙선 후 흩어지지 말고 모여있자는 뜻으로 각자 2000만원씩 내서 하로동선을 만들었고, 나는 사장을, 노 전 대통령은 감사를 맡아 4년 가까이 식당을 운영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후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당한 한나라당에 입당, 16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그러나 국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일관되게 지지, 김용갑 전 의원 등 한나라당 보수의원들과 수시로 의견차를 빚었다.
그는 결국 한나라당에서 탈당,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등이 주도한 '개혁당'에 현역의원으로 합류해 공동대표가 되면서 노무현 정권 창출에 공헌했다. 17대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3선의 금배지를 달았다.
김 전 의원은 의정활동 중 "'국민학교'가 '황국신민'이라는 단어에서 '국'자와 '민'자를 따 만들어졌다"며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는 교육법개정을 주도해 실현했다.
또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에 맞서 대마도가 우리땅이라는 근거를 제시하며 맞불을 놓기도 했다.
그는 여야 의원 59명의 서명을 받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이 1909년 중국에 간도를 넘겨주는 간도협약을 체결한 것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간도협약 원천무효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 밖에 ‘민주개혁모임’정책위원장(1992), 이완용재산몰수특별법 추진(1994), 교육법개정으로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명칭을 바꾸고, 학교급식법을 제정(1995)했다. 또 구 민주당 정책위의장, 수석부총무(1995~1996),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정책위원장 겸 대변인(1996), 국회 운영위·교육위·여성특위 간사(14대국회),국회 정신대대책모임 및 일제잔재청산을위한모임 대표(〃),‘정치개혁을위한의원모임’ 간사(2000~2001),국회의원연구단체 ‘나라와문화를생각하는모임’대표 (16대국회),개혁국민정당 대표(2003),민족평화축전 조직위원장(2003),국회 윤리특별위원장· 통일외교통상위원장 등을 지냈다.
해방 후 부모님과 함께 고향인 대전으로 간 그는 대전중, 대전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중국국립정치대학에서 정치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시절에는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졸업 후인 1972년 민주공화당 사무처 직원으로 정계에 발을 들였다. 김근수 지사는 정치를 시작한 아들에게 '무사즉강'(無私卽强·사사로움이 없어야 강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 전 의원은 "아버지는 '사사로움이 없어야 강할 수 있다. 탄압에 저항하는 것보다 유혹에 무너지지 않는게 더 어렵다'고 말씀했다"며 "정치를 하면서 유혹에 무너지지 않도록 하라고 신신 당부했다"고 회고했다.
김 전 의원은 이후 3당 합당에 반대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 등과 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의원으로 첫 금배지를 달았다.
그는 15대 총선 낙선 후에는 노 전 대통령, 제종구·이부영 전 의원 등과 함께 서울 강남에서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음식점을 열었다.
'하로동선'은 여름의 화로, 겨울의 부채처럼 당장은 필요하지 않으나 언젠가 때가 오면 소중하게 쓰일 날이 올 것이라는 뜻이다.
김 전 의원은 "나라가 남북으로 갈려져 있는데 영·호남으로까지 갈라지는 것은 안 된다는 뜻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제종구, 이부영 전 의원 등과 함께 꼬마민주당을 만들었다"며 "15대 총선 낙선 후 흩어지지 말고 모여있자는 뜻으로 각자 2000만원씩 내서 하로동선을 만들었고, 나는 사장을, 노 전 대통령은 감사를 맡아 4년 가까이 식당을 운영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후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당한 한나라당에 입당, 16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그러나 국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일관되게 지지, 김용갑 전 의원 등 한나라당 보수의원들과 수시로 의견차를 빚었다.
그는 결국 한나라당에서 탈당,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등이 주도한 '개혁당'에 현역의원으로 합류해 공동대표가 되면서 노무현 정권 창출에 공헌했다. 17대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3선의 금배지를 달았다.
김 전 의원은 의정활동 중 "'국민학교'가 '황국신민'이라는 단어에서 '국'자와 '민'자를 따 만들어졌다"며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는 교육법개정을 주도해 실현했다.
또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에 맞서 대마도가 우리땅이라는 근거를 제시하며 맞불을 놓기도 했다.
그는 여야 의원 59명의 서명을 받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이 1909년 중국에 간도를 넘겨주는 간도협약을 체결한 것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간도협약 원천무효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 밖에 ‘민주개혁모임’정책위원장(1992), 이완용재산몰수특별법 추진(1994), 교육법개정으로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명칭을 바꾸고, 학교급식법을 제정(1995)했다. 또 구 민주당 정책위의장, 수석부총무(1995~1996),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정책위원장 겸 대변인(1996), 국회 운영위·교육위·여성특위 간사(14대국회),국회 정신대대책모임 및 일제잔재청산을위한모임 대표(〃),‘정치개혁을위한의원모임’ 간사(2000~2001),국회의원연구단체 ‘나라와문화를생각하는모임’대표 (16대국회),개혁국민정당 대표(2003),민족평화축전 조직위원장(2003),국회 윤리특별위원장· 통일외교통상위원장 등을 지냈다.
김근수 지사의 가문인 의성 김씨는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순왕과 고려 태조 왕건의 큰딸인 신란공주(낙랑공주)의 넷째아들 석(錫)을 시조로 한다. 고려와 조선에서 '군'(君)으로 책봉된 사람이 7명이었고, 충의공·용소공 등 시호를 받은 사람도 13명이나 될 정도로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가다.
의성 김씨는 조선조에 석학이자 문장가였던 모재 김안국과 그의 동생 정국 등 96명의 문과 급재자를 냈다. 안국은 대사헌·대사간·예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서울 안국동은 안국이 살던 지역으로.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안국동이라고 이름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구한말 일제에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의성 김씨는 수많은 의병, 독립지사, 의사, 열사를 배출했다. 의성 김씨 소속의 독립운동가는 85명이나 된다.
"의성 김씨 앞에서는 독립운동을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유학자로서 반일투쟁의 선두에 섰던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매국오적청참소(賣國五賊請斬疏)'를 올려 이완용 등을 성토했다.
또 친일단체 '일진회'를 비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김창숙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 '한국독립청원서'를 작성, 중국 상해로 망명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를 우편으로 보냈다.
김 선생은 광복 후인 6·25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 경고문을 보내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기도 했다. 의로운 성품의 한 면이다.
또 이시영·김성수·조병옥 선생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발표하는 등 끊임없이 이승만 독재정권과 투쟁했다.
김창숙 선생 외에 을미사변 직후 단발령에 반대하며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김도화, 영덕 오십천 전투에서 순국한 김하락, 애국단체들의 통합체인 통의부를 조직해 총장을 지낸 일송 김동삼, 전봉준과 함께 갑오농민전쟁을 지휘한 김도삼 등도 모두 의성 김씨다.
전월선 여사의 가문인 정선 전씨는 백제 개국공신 10명중 한 명인 전섭을 도시조, 백제의 대광공주와 함께 신라로 와 정선군에 봉해진 전훤(전섭의 8세손)을 시조로 한다.
신라·고려시대를 통틀어 '군으'로 책봉된 사람이 35명이며, 조선시대에는 문과급제자 57명을 배출했다. 고려시대 2등공신이었던 전윤장과 형조판서를 역임한 전오륜, 조선시대 3등 호성공신이었던 전용 등이 유명하다.
구한 말 안창호 선생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해 항일활동을 했던 전덕기, 의병장 전덕원, 일제 강점기 민족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전형필 등도 정선 전씨다.
[email protected]
의성 김씨는 조선조에 석학이자 문장가였던 모재 김안국과 그의 동생 정국 등 96명의 문과 급재자를 냈다. 안국은 대사헌·대사간·예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서울 안국동은 안국이 살던 지역으로.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안국동이라고 이름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구한말 일제에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의성 김씨는 수많은 의병, 독립지사, 의사, 열사를 배출했다. 의성 김씨 소속의 독립운동가는 85명이나 된다.
"의성 김씨 앞에서는 독립운동을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유학자로서 반일투쟁의 선두에 섰던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매국오적청참소(賣國五賊請斬疏)'를 올려 이완용 등을 성토했다.
또 친일단체 '일진회'를 비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김창숙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 '한국독립청원서'를 작성, 중국 상해로 망명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를 우편으로 보냈다.
김 선생은 광복 후인 6·25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 경고문을 보내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기도 했다. 의로운 성품의 한 면이다.
또 이시영·김성수·조병옥 선생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발표하는 등 끊임없이 이승만 독재정권과 투쟁했다.
김창숙 선생 외에 을미사변 직후 단발령에 반대하며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김도화, 영덕 오십천 전투에서 순국한 김하락, 애국단체들의 통합체인 통의부를 조직해 총장을 지낸 일송 김동삼, 전봉준과 함께 갑오농민전쟁을 지휘한 김도삼 등도 모두 의성 김씨다.
전월선 여사의 가문인 정선 전씨는 백제 개국공신 10명중 한 명인 전섭을 도시조, 백제의 대광공주와 함께 신라로 와 정선군에 봉해진 전훤(전섭의 8세손)을 시조로 한다.
신라·고려시대를 통틀어 '군으'로 책봉된 사람이 35명이며, 조선시대에는 문과급제자 57명을 배출했다. 고려시대 2등공신이었던 전윤장과 형조판서를 역임한 전오륜, 조선시대 3등 호성공신이었던 전용 등이 유명하다.
구한 말 안창호 선생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해 항일활동을 했던 전덕기, 의병장 전덕원, 일제 강점기 민족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전형필 등도 정선 전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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