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하치, 그 헛바람 소리여…소음의 미학

기사등록 2011/05/14 09:21:00

최종수정 2016/12/27 22: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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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윤소희의 음악과 여행<48>   


 일본을 여행하다보면 정제되고 깔끔한 풍경에 숨어 있는 사무라이들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섬뜩하기도 하다. 성마다 적의 침입을 차단하고자 만들어진 해자에다 자객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자 자갈을 깔아두는 것이 성(城)의 구조다. 

 사무라이들이 살던 어떤 마을에 들어서니 왠지 시야가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마을로 들어서는 길을 가로 막는 건물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알고 보니 적이 침입하였을 때 곧바로 진입할 수 없도록 일부러 지어진 것이었다. 그 집을 돌아서 들어가도 골목을 꺾고 돌아야만 다음 블록을 갈 수 있었는데, 이는 적군이 마을에 침입하였을 때 일시에 마을에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란다. 

 교토의 어떤 궁중으로 들어서는 돌담, 무심코 보면 그냥 자연스러이 쌓아 올린 돌담이지만 유사시에 어떤 돌 하나만 밀면 그 담이 와르르 무너져서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도록 커다란 돌덩이에 작은 돌들을 절묘하게 걸쳐놓은 것이었다. 


 들어가서는 어떤가. 마루 위를 걸으니 유난히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일명 ‘새 소리 마루’인데, 마루판 아래에 용수철 비슷한 장치를 해 자객이 아무리 살금살금 걸어도 소리가 나도록 한 것이다. 삐걱거리는 마루를 지나서 방으로 들어서면 이제는 별장 뒤에 숨어있는 검객이 나그네의 숨소리까지 헤아리며 칼을 벼르고 있다. 아름다운 동양화로 장식된 벽장 뒤에는 경호 무사가 단칼에 자객을 벨 수 있도록 장검을 차고 숨어있으니 친견을 가장한 손님이 돌변해 장군의 목을 베려하더라도 막아낼 수 있다. 

 힘쓰는 사내들의 피비린내 나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는 여인과 술, 춤과 노래가 제격이다. 사무라이를 모시는 여인들은 머리에 비녀를 꽂을 수가 없었다. 행여 대장이 잠든 사이 애첩이 비녀로 그를 찌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란다. 그러므로 사무라이의 애첩을 그린 그림에는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갖은 장식을 한 것이 아니라 느슨히 흘러내리고 있다.

 사태가 이쯤 되다보니 악기도 비장의 무기가 됐다. 음률을 불던 악기가 휘두르면 무기가 되기도 하지만 대나무로 만든 관대 안에 칼을 넣어 다니는 무사들도 있었다. ‘고무소(虛無僧)’라고 불린 이들은 보화종(普化宗; 후케슈)의 승려로서 속세인과 승려의 중간적인 사람들이었다. 삿갓을 쓰고 사쿠하치를 불며 방랑하는 고무소가 점차 늘어나자 한때는 에도의 아사쿠사(淺草)에는 이들에게 사쿠하치를 가르치는 교습도가 생겨나기도 했다.  


 왜 고무소가 이토록 많이 생겨났을까? 인류의 역사에 있어 가장 수명이 짧은 것이 무력으로 얻은 세력이 아니던가. 칼날의 움직임에 따라 수시로 성주가 바뀌었으니 몰락한 사무라이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고무소가 된 것이다. 일본에는 고무소와 비슷하게 한탄스런 승려도 있었으니 ‘모소비와(盲人琵琶)’이다.   

 음악을 통해 법회를 열거나 유랑을 한다는 점에서는 고무소와 비슷하지만 맹인 승려인 이들은 세상에 대한 원망을 보다 체념이 빨랐기에 그 한탄스러움이 고무소보다는 덜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사쿠하치를 불며 관대를 휙 젖힐 때 새어 나오는 헛바람 소리는 고무소들의 한숨 소리 같기도 하다. 하여간 당시에 사쿠하치의 명인이 많이 배출됐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구로사와 킨코(黑澤琴古·1710~1771)다. 킨코는 본래 후쿠오카(福田)의 무사였는데 나중에는 방랑객이 되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쿠하치의 고곡(古曲)들을 모아 그 중 30여곡을 새로이 다듬어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후 그의 악곡을 배우고 연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이를 두고 긴코퓨(琴古流)라고 한다.       

 장구한 세월 동안 일본 사람들의 애환을 달래어 온 이 악기의 이름 사쿠하치(尺八)는 길이가 1척8촌(약 54.5㎝)인데서 비롯됐다. 오늘날 다양한 계통의 사쿠하치의 원형이 되는 이 악기는 쇼소인(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를 두고 가가쿠사쿠하치(雅樂八尺) 혹은 쇼소인사쿠하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의 전통악기들도 정악, 산조, 창작곡에 쓰이는 악기가 다르듯이 일본도 마찬가지다. 가가쿠사쿠하치는 한국의 정악 대금 정도로 비교할 수 있다.  

 사쿠하치는 대여섯 가지 이상의 악기 종류가 있는데, 가가쿠사쿠하치 이후에 생겨난 것을 간단히만 살펴보자. 무로마치시대에 생겨난 ‘히토요기리(一節切)’는 무사나 승려 사이에서 전승되는 계통과 민간에서 연주되는 것 두 가지가 있다. 그 중에 민간의 사쿠하치는 길이가 1척1촌1분(1尺1寸1分·34㎝)이며, 관의 중간에 마디(節)가 1개라고 하여 히토요기리사쿠하치(一節切八尺)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외에도 지공이 5개, 7개 혹은 9개까지 있는 ‘다코사쿠하치(多孔八尺)’가 있는가 하면, 플루트와 같이 키를 장착한 ‘오쿠라우로’도 있다.   

 일본 사람들은 악기 연주에서 관대에 숨을 불어 넣는 소리라든가, 현악기의 줄과 지판이 마찰하는 비음악적인 소음들을 좋아하는데, 사쿠하치를 휙 젖히면서 헛바람 소리를 내는 것은 사실은 소음을 즐기는 동양음악미학의 일반적 특징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음악이란 무질서한 진동 중에 정제된 고른음을 규합한 것인데 왜 맑은 소리 가운데 굳이 소음을 곁들이기를 좋아한 것일까? 그것은 인간은 근원적으로 우주와 자연 가운데 하나의 미물인지라 인위적으로 정제된 진동 속에서도 본연의 소리를 그리워하는 모태본성이 아닌가 싶다.  

 작곡가·음악인류학 박사 http://cafe.daum.net/ysh3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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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하치, 그 헛바람 소리여…소음의 미학

기사등록 2011/05/14 09:21:00 최초수정 2016/12/27 22: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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