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무너트린 고르바초프…러시아선 가장 미움받은 인물

기사등록 2022/08/31 11:24:29

최종수정 2022/08/31 12:13:43

"미국이 러를 힘잃은 약자 취급하면서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개탄

미국에 배신감 느낀다 인터뷰 하기도

[모스크바=AP/뉴시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향년 91세의 나이로 모스크바 중앙임상병원에서 별세했다고 러시아 언론들이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사진은 2004년 12월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이 독일에서 기자회견을 시작하면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 2022.08.31.
[모스크바=AP/뉴시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향년 91세의 나이로 모스크바 중앙임상병원에서 별세했다고 러시아 언론들이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사진은 2004년 12월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이 독일에서 기자회견을 시작하면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 2022.08.31.
[서울=뉴시스] 강영진 기자 =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주도한 글라스노스트(개방)과 페레스트로이카(개혁)는 공산권 국가의 붕괴와 독일 통일, 소련의 붕괴 등을 촉발해 2차 대전 이후 반세기 동안 이어진 동서 냉전 질서를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고르바초프만큼 살아 생전에 큰 시대적 변화를 촉발한 인물은 인류역사에 많지 않다. 불과 6년여 동안 재임하면서 고르바초프는 철의 장막을 걷어내고 세계 질서를 바꿨다.

그는 심각한 경제난에 처한 러시아 사회를 개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공산주의 사회의 폐쇄성을 해체하고 개방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소련이 무너졌다. 10년 동안 이어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군대를 철수했다. 1989년 5개월 사이에 발트해부터 발칸반도까지 공산국가들이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만 봤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는 소련의 해체를 우려하는 강경 공산주의자들은 물론 개혁의 지연을 우려한 자유주의자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국내에서 재앙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소련의 붕괴를 "금세기 최악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련의 붕괴라는 모멸과 패배를 회복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고르바초프 본인은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직접 언급한 적이 없다. 다만 고르바초프와 가까운 언론인 알렉세이 베네딕토프가 지난달 고르바초프가 전쟁이 "자신의 업적"을 훼손할 것으로 생각해 "실망했다"고 전했다.

공산당 실세로서 집권한 고르바초프는 1984년 "이런 식으로는 더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측근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에게 말한 뒤 이후 5년 동안 철옹성이던 공산당을 변혁했다.

그는 70년의 공산당 통치를 돌아보면서 부패와 노동 생산성 저하, 질낮은 물품 생산, 생필품 부족의 해결책을 모색했다. 당시 미국과 세계를 양분하던 소련은 경제난으로 갈수록 약해지고 있었다. 당시 소련의 많은 지식인들이 더이상 소련이 서방과 경쟁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정치와 사회 개조에 나섰으나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민들의 삶을 책임진다는 공산당 방식에 익숙한 세력과 더 빠르고 강력한 개혁을 촉구하는 세력이 충돌하면서 빚어진 혼란 속에서 개혁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결국 자신이 임명한 강경파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가 재임중에 이뤄낸 업적도 적지 않다. 미국과 최초로 모든 핵무기 폐기에 합의했고 동유럽에 배치한 전술핵무기를 철수했다. 아프가니스탄 9년 전쟁을 끝내고 군대를 철수했고,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건을 공개 조사하도록 했다. 다당제 선거를 도입하는 민주주의 개혁을 시작했고, 이는 모든 동유럽 공산국들로 확대됐다. 부패한 공산당 지도부와 고위관료 다수를 축출했으며 소련 수소 폭탄 개발에 큰 역할을 했으나 박해를 받던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를 석방했다. 언론에 대한 검열을 철폐하고 공식 국교이던 러시아 정교를 국교 지정에서 해제하고 바티칸과 수교함으로써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확대했다.

그의 개혁은 그러나 경제 안정으로 빠르게 이어지지 못하면서 국내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그의 오른팔이던 셰바르드나제 외교장관이 1990년 물러나면서 공산당 독재와 반동이 복귀할 것을 경고했다.
 
고르바초프는 1931년 3월2일 코카서스 지방 스타프로폴 지역의 농촌 마을 프리볼노예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부였던 부모들은 충실한 공산주의자였으나 고르바초프가 갓난 아기였을 때 소련에서 집단농장화가 진행되면서 대기근이 발생했다. 마을 초등학교를 졸업한 고르바초프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공산당 하부 조직인 청년동맹에 가입했다. 아버지가 2차대전에 참전했을 당시 직접 콤바인을 몰고 농사를 도왔다. 2차대전이 끝난 뒤 고르바초프는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19살이던 1950년 모스크바 국립대 법학부에 진학해 정치사상을 공부했다. 마키아벨리, 홉스, 헤겔, 루소를 공부한 그는 뒤에 미국식 대통령제에 관심을 보이고 민주주의의 "견제와 균형" 원리를 탐구했다. 그는 매우 활발한 활동가였으며 동급생을 밀어내고 청년동맹 위원장이 됐다. 공산당원으로서 그는 겉으로는 충실한 당원으로 처신했으나 사적으로는 스탈린에 대해 유보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 것으로 스스로 밝혔었다. 1953년 세련된 도시 교양인 라이사 막시모브나 티타렌코와 결혼했다.

1955년 가족과 함께 농촌으로 이주한 고르바초프는 스타브로폴 지역 청년동맹 서기장이 됐다. 이후 22년 동안 스타브로폴에 머물면서 착실히 승진한 끝에 1970년 스타브로폴 지역 공산당 서기장에 올랐다. 이후 개인의 토지 소유와 보너스를 지급하는 방식의 개혁을 통해 생산성을 크게 끌어올리기도 했다.

1956년 니키타 흐루시초프 공산당 서기장이 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스탈린 공포정치를 비판한 "비밀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흐루시초프의 반(反) 부패, 반 관료주의 개혁에 매료됐다. 고르바초프와 동년배들은 "20차 전당대회 세대"로 불렸다.

공산당 고위 정치인들이 휴양지로 자주 찾는 스타브로폴 지역 공산당 서기장으로서 고르바초프는 중앙당 정치국원 등 고위 관료들과 접촉이 잦았고 이 과정에서 병든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서기장 측근들을 대신할 신진 세대로 주목을 받았다. 브레즈네프의 후임자로 유력시되던 표도르 쿨라코프 농업담당 정치국원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장례식에서 행한 고르바초프의 연설이 처음 전국에 TV 중계되면서 전국적 인물로 부상했다.

브레즈네프에 의해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 담당위원으로 임명돼 1978년 모스크바로 진출한 고르바초프는 당시 심각했던 부패를 철폐하려는 유리 안드로포프 총리에 의해 50살이 되던 해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면서 핵심 권력 구도의 일원이 됐다. 나이든 엘리트들 사이에서 젊고 튼튼했던 고르바초프는 1980년 정치국 정위원이 됐다.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1982년 사망하고 후임자 안드로포는 강력한 노동개혁을 추진했다. 고르바초프에게 더 많이 의지했다. 경제와 공산당 이념을 담당하는 정치국원 겸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로서 그는 권력서열 2인자가 됐다.

안드로포프가 1984년 사망한 뒤 고르바초프가 아닌 체르넨코가 서기장에 선출됐으나 고르바초프는 최고연방의회 연설자로 지명돼 후계자 지위를 굳히고 1년 뒤 서기장에 올랐다.

고르바초프와 세련된 부인은 여러차례 서방을 방문한 자리에서 상당한 매력을 발휘했고 1984년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가 "그와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에게 고르바초프와 협력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1985년 3월10일 체르넨코 서기장이 사망하면서 고르바초프는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굳히면서 서기장에 올랐다. 그는 국영 언론 등을 통한 우상화를 중단하고 부패한 고위 간부들을 공격했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가 고르바초프 시대의 슬로건으로 부상했다. 이때 숙청한 간부의 후임으로 1985년 보리스 옐친을 지명해 협력관계를 이어갔다.

1985년 5월 당 공식연구소인 스몰니연구소를 개혁의 전위로 설정한 그는 연구소를 불시 방문해 "노동자, 장관, 중앙위원회 서기, 정부 지도자 모두 태도를 바꿔야 한다"며 "세계 시장 기준에 맞춰" 더 열심히 일해야 하며 품질을 높여야 한다고 역설한 뒤 개혁에 방해되는 사람들은 "꺼져라"라고 선언했다. 이 연설이 3일 뒤 TV 중계됐고 온 국민들이 매료됐다.

서기장이 된 지 7개월만에 거의 모든 정치국원을 교체한 고르바초프는 이듬해 공산당 27차 전당대회 투표권자의 41%를 교체하고 군수뇌부와 수천명의 관료들을 해임했다.
[서울=뉴시스]
[서울=뉴시스]
고르바초프의 인기는 높았지만 그가 추진한 개혁은 인기가 없었다. 무엇보다 취임 직후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한 음주 금지 캠페인이 불만을 키웠다. 금주조치로 인해 1987년 세입이 1000억달러나 감소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공업용 알콜로 만든 보드카를 마시고 숨졌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1988년 금주 조치를 완화해야 했다.

공산당 중심의 개혁을 추진하던 고르바초프는 더이상 공산당이 소련 사회를 지배해선 안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1800만명의 공산당 당원들의 반발로 개혁에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1990년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고르바초프를 첫 소련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시장개혁을 본격화했다. 국영기업 민영화, 보조금 삭감, 시장에 의한 가격 및 화폐 가치 결정 등의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개혁의 성과가 가시화되지 못하면서 1990년 노동절에 그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자 개혁의 고삐를 늦췄다.

개혁을 지속하기 위해 평화가 필요한 고르바초프는 미국과 무기 통제 합의를 했고 아프가니스탄에서 군대를 철수시킴으로써 국방예산을 감축해 국내문제 해결에 투입했다. 그러나 당시 레이건 미 대통령은 미사일 방어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국방비를 크게 증가시켜 소련의 파산을 유도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레이건 대통령 후임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소련에 최혜국대우를 부여하는 무역협정을 체결하는 등 경제 개혁을 지원했다.

고르바초프는 전임자들과 달리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 정부가 실패해도 방치하는 정책을 폄으로써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를 촉진했고 1989년 10월7일 동베를린을 방문해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자국민들을 상대로 무력을 사용하지 말도록 경고했다. 이후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대탈출 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시위가 격화된 끝에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해 한해 동안 알바니아를 제외한 모든 동유럽 공산국가 정부가 붕괴했으며 알바니아도 이듬해 붕괴했다.

소련의 여러 공화국들에서도 소요사태가 이어졌다. 1990년 1월20일 고르바초프가 아제르바이잔에 파병해 분리주의 민병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소련군 30명을 포함해 140명이 사망했고 이는 소련군이 자국민을 상대로 무력을 행사했다는 비판으로 이어지면서 징집병들이 대거 탈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철군을 명령했다.

이후 소련 공화국들의 분리 움직임이 격화된 끝에 속속 독립을 선언했고 고르바초프는 제재를 가하는 등으로 이를 억제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991년 8월18일 크름반도에서 휴양하던 고르바초프는 15개 소련 공화국들에 상당한 권한 이양을 하는 내용의 연설을 준비중이었다. 그때 KGB와 군의 강경파들이 그의 별장에 나타나 그의 전화를 차단하고 비상사태 선포와 사임을 요구했다.

다음날 아침 6시 타스 통신이 고르바초프가 "건강상 이유로" 축출됐다고 보도했고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이 국가비상위원장으로 취임했다.

1시간 뒤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포고령이 발표되고 고르바초프의 위치가 밝혀지지 않자 당시 소련의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이던 보리스 옐친이 쿠데타가 발생했다고 언급했다. 오전 11시 군대가 크레믈린궁을 포위하자 오후가 돼 시위대들의 탱크를 에워쌌다.

시위를 주도한 옐친이 탱크에 올라 총파업을 촉구하고 러시아연방공화국 국방장관이 군대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소요사태가 전국으로 확산했다. 결국 3일 뒤인 21일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들이 도주하고 고르바초프는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쿠데타는 고르바초프에게 큰 정치적 타격을 안겼다. 옐친이 고르바초프를 대신하는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부상했고 고르바초프는 8월24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직을 사임하고 중앙위원회를 해산했다. 12월25일 고르바초프가 사임하면서 소련사회주의 공화국이 소멸했다.

이후 고르바초프는 해외 여행을 자주하면서 연구와 외교활동에 주력했다. 쿠데타 당시 뇌졸중이 걸린 부인 라이사 고르바초프는 1999년 백혈병으로 서거했다.

2009년 아나톨리 추바이스 러시아 부총리는 "고르바초프는 러시아에서 가장 미움 받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등 고르바초프의 러시아내 인기는 갈수록 추락했다.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의 부인 곁에 안장될 것이라고 러시아 국영매체가 보도했다.

다음은 미 뉴욕타임스(NYT)의 2016년 고르바초프 인터뷰 기사 요약이다. 고르바초프는 "러시아의 민주주의가 더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당시 러시아에서 고르바초프에 대한 비난이 극에 달했었다. 소련 제국을 붕괴시켜 소련 국민들을 2등 시민으로 추락시켰다며 그를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왔고 한 의원은 그를 "제5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표현의 자유가 있다"며 개의치 않은 것은 물론 여전히 "러시아에 민주주의가 더 강화돼야 한다고 말해왔다"고 강조했다.

그는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면, 국민들이 주기적으로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고르바초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거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외국 첩자"로 지정될 것이 두렵다고 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당사자로서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서방, 특히 미국으로부터 배신당했다고 느낀다고 했다. 미국이 승리자 연하며 러시아를 힘잃은 약자로 취급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연합(EU)을 국경까지 팽창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미국인들이 냉전 종식을 맞아 승리에 도취된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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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무너트린 고르바초프…러시아선 가장 미움받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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