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연, 종이더미와 미완의 마음들…우연과 필연 그리고 인연과 의연 [인터뷰]

기사등록 2026/11/06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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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EP '종이더미' 발매

"모든 감정을 다 해결하지 않아도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서울=뉴시스] 지수연. (사진 = 마운드 미디어 테잎스 제공) 2026.11.06.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지수연. (사진 = 마운드 미디어 테잎스 제공) 2026.11.06.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종이는 약하다. 쉽게 찢어지고, 물을 먹으면 금방 무거워진다. 그런데 약한 것이 꼭 무해한 것은 아니다. 얇은 모서리는 방심한 손끝을 벤다. 버리지 않으면 계속 쌓인다. 마음도 그렇다. 돌보지 못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쌓이며, 쌓인 마음은 둥글지 않다.

그룹 '위키미키' 출신 싱어송라이터 지수연이 4일 발매한 첫 미니앨범(EP) '종이더미'는 이 단순하고 정확한 관찰에서 시작한다. 이튿날 서울 중구 충무로에서 만난 그는 "매일 살아가면서 쌓이는, 제가 돌보지 못했던 마음들이 많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 마음들이 하나씩 쌓이면 결국 마음속에 더미가 되잖아요. 그런데 그 마음들이 마냥 둥글지 않고 뾰족해서 가끔은 저를 찌르고 다치게도 하더라고요. 그 이미지를 떠올리다 보니 종이가 생각났어요."

정리하지 않기로 한 마음

이 앨범은 마음을 정리하지 않는다. 소개글의 표현대로 "있는 그대로 펼쳐둔다". 정리하지 않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선택일 수 있다. 무언가를 정리한다는 것은 결국 어떤 마음은 남기고 어떤 마음은 버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지수연은 버리는 쪽 대신 바라보는 쪽을 골랐다.

그 선택에는 이유가 있었다. "고민이나 마음에 담아둔 게 있으면 좋은 방향이든 안 좋은 방향이든 결론을 내지 않으면 오랫동안 마음이 힘든 성향이에요. 지나간 일들이 밤마다 이불을 덮으면 바로 생각나서 잠을 못 들곤 했어요. 말 한마디 하면 끝나는 일인데도 남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혼자 생각만 했고요. 이제는 그러지 말아 보자, 모든 감정을 다 해결하려 하지 않아도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이번 앨범에 실린 다섯 곡은 하나같이 답을 내리지 않고 끝난다. 그는 "제 가사를 보면 항상 의문형이 많아요. 확답을 잘 안 하더라"며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그 성향을 다시 느꼈다고 했다. 해결하지 못한 감정은 해결하지 않은 채 "그냥 올려두자"는 것. 답이 없는 노래는 듣는 사람의 몫을 남긴다. 지난 4월 싱글 '블루스크린'이 듣는 이마다 다르게 해석되는 것을 보며, 그는 열린 채로 곡을 내는 일이 오히려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연과 필연, 그 사이의 '아니'

타이틀곡 '우연과 필연' 2절의 "아니, 난 믿고 싶었던 거야"는, 노래가 스스로를 정정한다. 운명이었다고 말하려던 화자가 말을 끊고, 운명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었다고 고쳐 말한다. 자기 말을 고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틀렸음을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아니'는 멜로디가 먼저 불러낸 말이었다. 늘 멜로디를 먼저 쓰고 가사를 붙인다는 그는 "2절 멜로디가 금방 나왔고, 웬만하면 한 번에 오케이를 하지 않는데 이건 그냥 오케이를 했다"며 "그런데 멜로디상 제가 저 자신한테 반박을 한번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돌아봤다.
[서울=뉴시스] 지수연. (사진 = 마운드 미디어 테잎스 제공) 2026.11.06.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지수연. (사진 = 마운드 미디어 테잎스 제공) 2026.11.06.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곡의 출발점은 이랬다. "살아가면서 모든 건 그냥 우연히 지나갈 수 있는 것들인데, 내가 굳이 한 번 더 들여다보고 한 번 더 붙잡아서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게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런 것들은 놓아줘도 괜찮겠다는 마음을 노래 중간에 다짐하면서, 약간의 후회도 담긴 가사예요."

우연에 의미를 붙이는 순간 우연은 필연이 된다. 그리고 필연이 된 것은 쉽게 놓을 수 없다. 슬픔은 종종 그렇게 스스로 키워진다. 이 곡은 슬픔을 이겨내는 노래가 아니라 슬픔을 더 키우지 않기로 하는 노래다. 둘은 다르다. 앞의 것이 승리라면, 뒤의 것은 절제다.

흥미롭게도 지수연은 이 곡을 작업하면서 자신의 첫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를 떠올렸다. 우연과 운명이 엇갈리는 이야기다. 마침 당시 함께 출연했던 배우들과 오가며 만나기도 했고, 뮤지컬 '카페인' 공연을 앞둔 그에게 연락을 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 곡이 '번지점프를 하다'와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것 또한 내가 너무 붙잡는 우연인가, 이걸 붙잡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붙잡고 있으면 필연이 되는 것 아니냐는 물음에 그는 "맞다, 너무 신기했다"며 웃었다. 우연을 놓아주자는 노래를 쓰는 동안에도 우연은 인연이 돼 그의 곁에 와 있었던 셈이다.

받침 하나의 거리

첫 트랙 '종이비행기'에서 그는 '사라지고 싶던 날'과 '살아지게 하는 너'를 나란히 놓는다. 두 말을 가르는 것은 받침 하나다. 그러나 그 작은 차이가 사라짐과 살아냄의 거리다. 그는 이 구절을 가이드 녹음을 만들 때부터 "무조건 써야 한다"며 박아두고 시작했다고 했다.

가사의 많은 부분은 가족에게서 왔다. "누구나 무너지고 싶고 쉬고 싶고 너무 힘들 때가 있지만, 가족의 사랑을 계속 받으면 결국 살아내야지라는 마음이 들잖아요." 이 곡의 화자가 사랑하면서도 사랑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사라지고 싶던 나를 살아지게 하는 대단한 사람이라서, 너무 소중해서, 더 사랑하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다.

마지막 대목에서 질문은 방향을 바꾼다. 그는 그것이 자기 자신을 향한 물음이었다고 했다. "나 진짜 사라지고 싶었나, 나 그냥 살고 싶었는데 이렇게 생각한 걸까. 다시 한번 저를 돌아본 거예요." 사라지고 싶다는 말의 바닥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을 발견하는 것. 슬픔을 정확하게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삶에 대한 욕망이 보일 때가 있다.

이런 낱말의 감각은 오래 공부한 결과다. 위키미키 활동 시절 직접 작사가들을 찾아가 수업 아닌 수업을 청했고, 이번 앨범에서는 프로듀서 구름(고형석)에게 "힌트라도 달라"고 하소연하며 발음에 대한 조언을 얻었다. '종이비행기' 가사는 몇 번을 고쳤는지 모를 정도로 뒤바뀌었다. 아이유, 윤마치, 한로로의 가사도 많이 읽었다. 다만 분석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분석을 하면 그 틀에 갇혀버릴까 봐요. 이분은 이런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구나, 이렇게 끝냈구나 하고 보는 정도로요."
[서울=뉴시스] 지수연. (사진 = 마운드 미디어 테잎스 제공) 2026.11.06.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지수연. (사진 = 마운드 미디어 테잎스 제공) 2026.11.06.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미완의 마음들

세 번째 트랙 '미완'을 그는 앨범에서 "제일 불안정한 곡"이라고 소개했다. 멜로디는 곡선이 많고, 노래는 고음과 저음을 오간다. 그 위에 혼자 타는 시소와 텅 빈 그네가 흔들린다. 잘 지내냐는 물음에 화자는 잘 지낸다는 걸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다고 답한다. "진짜 그냥 모르겠다는 게 제 마음속 답에서 제일 크다고 생각했어요."

'모르겠다'는 흔히 대답의 실패로 여겨진다. 그러나 어떤 질문 앞에서는 그것이 가장 정확한 대답이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보다, 모른다고 말하는 쪽이 자기 마음에 더 충실하다. '미완'은 완성되지 못한 노래가 아니라 미완이라는 상태를 정확하게 완성한 노래다.

인연, 곁에 없음으로 지키는 사랑

네 번째 트랙 '너란 책'은 지수연이 홀로 작사·작곡한 곡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너를 찾지 않겠다는 노래. 이 곡 역시 가족을 생각하며 썼다.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힘들어 보일 때가 많았어요. 그런데 저는 그 사람들의 어렸을 때나 과거의 모습을 모르잖아요. 그분들도 정말 사랑받고 행복한 꿈을 꾸던 때가 분명히 있었을 거고, 그때로 돌아가 거기에 머물러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그러면 지금의 자신을 만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맞다"고 했다. "그래도 이 사람이 사랑받는 모습을 바라는 것뿐이에요. 저를 못 만나더라도 따뜻하게 웃을 수 있었던 그때에 멈춰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실은 안 되는 일이지만, 저의 작은 소망이에요."

사랑에는 곁에 있으려는 사랑이 있고, 곁에 없음을 감수하는 사랑이 있다. 앞의 것이 소유의 언어로도 말해질 수 있다면, 뒤의 것은 오직 상대의 행복이라는 언어로만 말해진다. 인연을 지우는 상상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사랑. '너란 책'은 이 앨범의 가장 깊은 곳에 놓인 페이지다.

종이더미, 그리고 의연

[서울=뉴시스] 지수연. (사진 = 마운드 미디어 테잎스 제공) 2026.11.06.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지수연. (사진 = 마운드 미디어 테잎스 제공) 2026.11.06.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마지막 트랙 '종이더미'는 3년 전인 2023년, 위키미키 활동 중 사운드클라우드에 처음 올렸던 그의 첫 작업물이다. 팬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공연에서도 몇 번 불렀다. 그는 편곡을 새로 하지 않고 작업실에서 홈 레코딩으로 혼자 녹음했다. "그때의 서툴고, 어딘가 더 만져주고 싶은 아날로그의 날 것 느낌을 그대로 가져가고 싶었어요." 혼자 만든 것은 의도가 아니었지만, 이 곡을 마지막에 둔 것은 의도였다. 1~4번 트랙이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감정을 이야기한다면, '종이더미'는 그 감정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바라보며 콧노래를 부르는 노래다. R&B와 힙합 요소까지 오가던 다채로운 편곡은 마지막에 이르러 미니멀하게 가라앉는다.

여기서 '의연'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초연(超然)이 감정에서 멀어지는 일이라면, 의연(毅然)은 감정 곁에 머물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일이다. 지수연의 노래는 쌓인 마음을 털어내고 홀가분해지지 않는다. 대신 그 더미 앞에 앉아 있다. 덜어낼수록 채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도망가지 않는다. 그 담담한 버팀이 이 앨범의 태도다.

아이돌 이후, 그리고 무대

열네 살에 연습생을 시작한 그의 꿈은 원래 그저 K-팝 가수였다. 그러나 오래 연습생으로 지내며 우물 안에 갇힌 느낌을 받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예술고와 예술대 실용음악과로 진학했다. 화성학과 시창청음을 배웠고, 어릴 적부터 기존 반주(MR)에 멜로디를 붙여보던 취미는 미디를 다루는 친구들과의 작업으로 이어졌다.

'아이돌 출신 싱어송라이터'라는 수식어에 대해 그는 "뗄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타이틀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음악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돌 출신이라 반감을 갖고 어떤지 들어나 보자 했다가 오히려 좋아서 팬이 되실 수도 있잖아요. 결국 제가 잘하면 되는 부분이라 억지로 숨기거나 떼려고 하지 않아요."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1976 할란카운티', '카페인'의 무대도 그의 노래를 바꿨다. "제가 살아온 방식이 아닌 인물의 삶을 살다 보니, 같은 상황에서도 제가 느끼는 감정과 인물의 감정이 너무 다르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 감정도 하나로 묶어두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죠." 뮤지컬 넘버는 대사에 음을 붙인 것, 그러니까 노래가 아니라 말이라는 깨달음을 그는 이번 녹음에 옮겨 담았다. 타인의 슬픔을 살아본 사람은 자기 슬픔도 더 넓게 쓸 수 있게 된다.

마지막 곡의 화자는 내일도 한 장이 더 쌓일 것을 안다. 다음에 쌓일 종이에는 어떤 마음이 적혀 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다정함"이라고 답했다. "앨범이 나온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팬분들과 주변 분들이 좋다, 고생 많았다고 따뜻한 말을 해주셨어요.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이분들도 다정한 말을 더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어제 갑자기 들었어요."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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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연, 종이더미와 미완의 마음들…우연과 필연 그리고 인연과 의연 [인터뷰]

기사등록 2026/11/06 06:00:00 최초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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