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호루몽' 연출한 이일하 감독 인터뷰
자이니치 3세 인권운동가 신숙옥 삶 담아
"일본 유학 중 TV서 본 신숙옥에 반했다"
신숙옥의 DHC텔레비전과 법정 투쟁 담아
"신숙옥 통해 자이니치 역사 들여다 봤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비주류 그들이 영웅"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이일하(52) 감독은 2000년 일본으로 영화 유학을 갔다. 이 감독은 도쿄에 있는 타마미미술대학 연극영화과에서 공부했고, 니혼대학 대학원에서 영화예술을 전공했다. 타지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낮엔 공부하고 밤엔 새벽 1~2시까지 야끼니꾸 가게에서 일했다. "제가 살던 집이 다다미 4조반(약 2.4평)짜리 집이었어요." 보통 일본 원룸 크기는 6조반(약 3평)이다.
새벽까지 일한 뒤 깨어난 일요일 아침, 이 감독은 피로에 찌들어 TV를 틀었다. 토론프로그램이 방송 중이었다. 그날 그는 한 여성 출연자를 보고 완전히 반해버렸다. 극우 성향 남성 출연자의 억지 주장을 침착하고 우아하게 그러면서도 논리적으로 깨부수는 어떤 여자. 그 카리스마에 단번에 감화된 이 감독은 그 자리에서 자기도 모르게 팔을 들어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고 했다. "햇살이 좋은 날이었어요. 그 분 말이 제 삶에 힘이 솟아나게 해줬습니다."

이 감독의 새 다큐멘터리 영화 '호루몽'(11월11일 공개) 주인공이 바로 그 여성 출연자다. 신숙옥. 1959년생. 자이니치(在日) 3세. 가난한 집의 딸.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패션모델이 됐고 사업가로 크게 성공했으며 운명처럼 인권운동가가 된 여자다. 그를 더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비주류 중의 비주류. 이 감독은 "주류, 메이저리티, 일본에선 마조리티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나는 관심이 없다. 난 비주류가 좋다. 언더독이 좋다. 그들이 멋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감독은 신숙옥을 "나의 히어로, 나의 원더우먼"이라고 말했다.
'호루몽'은 신숙옥 전기 다큐멘터리이자 그가 DHC텔레비전과 벌인 약 6년에 걸친 법정 공방을 다룬다. '호루몽'이란 제목은 호루몬(ホルモン)이란 말로 만들었다. 현재 이 말은 돼지·소 등 내장을 뜻하는 말로 쓰이나 어원엔 '버리다'란 뜻의 '호루', 물건이란 뜻의 '몬'이 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일본인들은 내장을 먹지 않았고, 그 버려진 물건을 가져와 깨끗이 씻어 양념에 절인 뒤 구워 먹은 사람들이 바로 자이니치였다. 이 감독은 '몬'을 '꿈 몽'자로 바꿔 조어했다. "그 제목에 자이니치 문화와 역사를 담은 겁니다."
이 감독이 신숙옥을 만난 건 다큐멘터리 영화 '카운터스'(2018)를 만들 때였다. 이 작품은 혐한 등 혐오 시위를 벌이는 이들에 맞서 혐오 반대 시위를 벌이며 이른바 카운터스(counters)로 불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들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자연스럽게 신숙옥을 대면했다. 신숙옥은 카운터스의 대모(代母)였다. "모두가 신 선생을 따랐어요. 그 포용력과 카리스마가 대단했죠. 실제로 보니 제가 TV에서 느낀 그 멋짐의 몇 배가 더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화 촬영을 다 마친 후에 바로 그 법정 투쟁이 시작된 된 겁니다."

2017년 일본 지상파 채널 TOKYO MX엔 DHC텔레비전이 제작한 '뉴스여자'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중년 일본 남성 패널들이 젊은 여성 출연자에게 시사를 알려주는 형식으로, 인기가 많았고 영향력이 컸다. 2017년 1월2일 방송에서 신숙옥이 언급됐다. 극우 성향을 가진 남성 출연자들은 신숙옥의 출신 등을 언급하며 확인한 적 없는 내용, 가짜뉴스로 그를 일방 매도했다. 신숙옥은 당시 상황에 대해 "나쁜공기가 나를 휘감은 듯한 심한 모욕감에 진저리를 쳤다"고 했다. 이를 묵과할 수 없던 신숙옥은 DHC텔레비전이란 거대권력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제가 이 과정을 찍어보면 어떠냐고 여쭤봤을 때, 처음엔 신 선생께서 많이 망설이셨어요. 그렇잖아요, 카메라가 몇 년 간 자길 따라다니게 될텐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하지만 결국 마음을 돌리셨습니다. 창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하셨죠. 그러면서 '네가 찍는다면 이 한 몸 불사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이 감독은 신숙옥의 법정 투쟁은 단순한 소송전이 아니라고 봤다. 이건 신숙옥이란 사람의 역사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고, 나아가 자이니치 역사를 직시해야 온전히 알 수 있는 사건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이니치 여성의 이야기가 돼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그렇게 '호루몽'은 신숙옥 전기영화이자 신숙옥 모계 3대에 관한 영화이면서 자이니치 삶에 관한 영화가 됐다.

이렇게만 보면 '호루몽'은 심각하고 진지하기만 한 작품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다루고 있는 주제와 소재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 동시에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게 전진한다. 일본 공장에 팔려온 신숙옥의 할머니 이백란, 평생 일본 사회 폭력에 평생 시달리면서도 그토록 일본 국적을 얻고 싶어했던 어머니 케이코,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조센진'이라고 칭하는 신숙옥의 역사가 무용수 3명의 몸짓으로 표현돼 있고, 신숙옥 인터뷰와 내레이션 그리고 각종 자료 영상들이 교직하며 러닝타임 100분을 가득 채운다.
"사실 너무 방대하고 깊은 이야기이죠. 하지만 영화를 그렇게 만들 순 없었습니다. 제가 만드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너무 길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유불급이 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딱 100분에 끊어야 했죠. 베이스가 탄탄한 스토리텔링 위에 춤과 음악을 얹고, 반드시 필요한 정보를 꽉 채워넣고 싶었습니다. 아주 깔끔하게 포장돼 받는 사람이 기분 좋아지는 택배처럼 만들어 관객에게 보내고 싶었달까요."

'호루몽'은 당연하게도 일본 내 자이니치에 대한 차별의 역사와 함께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일본군 성노예에 대한 일본 극우파의 각종 망언, 최근 십수년 간 진행된 극렬한 혐한 시위를 다룬다. 이와 함께 신숙옥이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며 겪은 갖은 고초도 있다. 이 모든 걸 보고 있으면 한국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 다만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이런 휘발성 높은 소재를 두고도 관객을 말초적으로 자극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 뜨거운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려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 감독은 "이미 충분한 비판이 담겼다고 본다"며 "비판도 중요한데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게 자이니치 역사를 모르게 두지 않는 거다"고 말했다. "요즘 일본엔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을 위해 만들어진 추모비를 부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이니치에 대한 기억 자체를 없애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젊은이들, 한국 젊은이들 모두 자이니치에 관해 잘 몰라요. 거의 모르죠. 일본의 제국주의는 망하지 않았어요. 아직도 살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신숙옥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이 영화가 작게 나마 힘이 됐으면 합니다."

'호루몽'은 이 감독의 5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온통 다큐멘터리 영화로 채워져 있고, 모두 소수자를 다루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관심이 많았고, 학교에서 과제로 뮤직비디오 등을 만들어도 결국 자신도 모르게 사회문제를, 소수자를 다루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사회와 내가 교감하고 소통하는 방식이 이 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들여다보는 것이고, 그걸 영화로 만드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전 소수자가 아니죠. 주류일 겁니다. 전 남자이고 LGBTQ도 아니죠. 그런데 제 기분은 그렇지 않아요. 전 항상 마이너 같아요. 언더독 같죠. 아마도 제가 일본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마음이 가요. 그들이 좋아요. 그들이 멋있어요. 그렇게 차별을 하고 혐오를 해대는데도 그럼에도 살아가는 그 모습이 멋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히어로죠. 전 그들이 얼마나 멋있는지, 더 멋지게 담고 다듬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대학 때부터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으니 이 형식과 30년 가까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감독은 "다큐가 미워질 때도 있고 돈이 없어서 괴로울 땐 있지만 다큐가 지겨워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다큐가 징글징글할 때가 있긴 하죠. 매일 싸워야 하니까요. 하지만 이게 제 업입니다. 제 삶의 한 80%는 다큐라고 할 수 있어요. 꿈에서도 편집을 합니다. 사람들이 다큐를 많이 보지 않는다고요? 그런 불평을 하기 전에 제가 먼저 잘해야죠. 우리가 정신차리고 잘 만드는 게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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