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조사서 동문로 아이들이 부르던 이름으로 등장
우석목·무석목·벅수머리 등 지역마다 달라…1971년 공식 명칭 채택
북방·육지전래 등 기원설 논쟁…제주 고유의 석조문화로 발전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지난 23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민속마을 정의현성 남문 앞에서 관광객들이 돌하르방을 배경으로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정의현성 돌하르방은 제주읍성에 비해 크기가 작고 갸름한 눈과 길쭉한 코가 특징이다. 2026.10.27. ijy788@newsis.com](https://img1.newsis.com/2026/10/26/NISI20261026_0002274368_web.jpg?rnd=20261026175126)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지난 23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민속마을 정의현성 남문 앞에서 관광객들이 돌하르방을 배경으로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정의현성 돌하르방은 제주읍성에 비해 크기가 작고 갸름한 눈과 길쭉한 코가 특징이다. 2026.10.27. [email protected]
제주는 오랫동안 '변방의 섬'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제주문화의 깊은 층위를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래전부터 한반도와 동아시아 해역을 잇던 해상교류의 거점이었으며 제주 사람들은 화산섬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돌과 바람, 불과 흙을 다루며 고유한 생활문화를 일궈왔다. 문헌과 유적, 생활문화와 구술, 자연환경과 생업의 흔적을 따라가며 제주가 지닌 독창성과 개방성을 살펴보고 문화콘텐츠로 확장될 가능성을 함께 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지난 23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민속마을 정의현성 남문 입구에서는 돌하르방을 배경으로 탐방객들의 기념사진 촬영이 한창이었다. 인상이 날카롭기는 하지만 아담한 크기에서 정겨움이 느껴진다.
이처럼 제주국제공항을 비롯해 관광지와 공공기관, 기념품점 등 제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돌하르방. 둥근 눈과 큼지막한 코, 벙거지 모자를 쓰고 배 위에 두 손을 올린 모습은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 작은 장식품과 생활용품부터 대형 조형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고 있다.
제주 사람들에게 친숙한 돌하르방이라는 이름을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조선시대 행정구역인 제주읍과 정의현, 대정현의 성문 앞에 세웠던 당시에도 돌하르방으로 불렀을까.
그 실마리는 1963년 제주대학교 현용준 교수의 조사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에는 지역마다 석상을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제주시에서는 우석목, 정의현에서는 벅수머리, 대정현에서는 돌영감 등의 명칭이 사용됐다. 오늘날 일반화된 돌하르방은 제주시 동문로 주변 아이들이 부르던 이름으로 조사됐다.
여러 명칭 가운데 돌하르방이 공식적인 이름으로 정해진 것은 1971년이다. 제주도문화재위원회가 그해 8월26일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하면서 채택했다.
아이들이 부르던 '돌하르방'…공식 명칭으로 정착
당시 확인한 이름은 돌하르방과 수호석, 수문장, 두룽머리, 동자석, 옹중석, 우석목 등 7가지였다.
현용준은 돌하르방을 "시내 동문통 소재 석상 주변 아이들의 명칭"으로 소개했다. '돌할아버지'라는 뜻의 제주어로, 아이들의 신조어 같다고 설명했다.
현용준이 제주시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이름으로 판단한 것은 우석목이었다. 그는 우석목을 제주 전통가옥의 출입구에 세우는 정주목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1968년에는 당시 제주대학교 김영돈 교수가 문화재관리국의 의뢰를 받아 석상과 석구를 조사했다. 현용준이 확인한 명칭 외에 벅수머리와 돌영감, 망주석, 무석목 등이 추가로 등장한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읍성 돌하르방. 2026.10.27. ijy788@newsis.com](https://img1.newsis.com/2026/10/26/NISI20261026_0002274369_web.jpg?rnd=20261026175237)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읍성 돌하르방. 2026.10.27. [email protected]
지역별로 우석목은 제주시에서, 벅수머리는 정의현에서 주로 사용됐다. 무석목 또는 무성목은 정의현과 대정현에서 모두 확인됐으며 대정현에서는 돌영감이라는 이름도 쓰였다.
이처럼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석상은 1971년 문화재 지정 과정에서 돌하르방이라는 하나의 공식 명칭을 갖게 됐다.
돌하르방의 역사적 명칭 가운데 문헌에서 주목되는 것은 옹중석(翁仲石)이다. 제주 출신 향토사학자 김석익이 1918년 펴낸 탐라기년에는 "1754년(영조 30) 김몽규 제주목사가 성문 밖에 옹중석을 세웠다(英祖三十年 牧使金夢奎 設翁仲石於城門外)"는 기록이 나온다.
돌하르방의 제작 시기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는 기록이지만 석상을 세웠다는 시점과 이에 대한 문헌기록 사이 간극이 160여년이다. 아직까지 이외 자료가 나오지 않아서 대부분 이를 바탕으로 돌하르방 등장을 설명하고 있다.
옹중이라는 명칭은 중국 진시황 때의 인물로 전해지는 완옹중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진시황은 흉노를 방어하는 데 공을 세운 완옹중이 죽자 그의 동상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이후 옹중은 사람의 형상을 만든 석상이나 동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됐다. 우리나라에서도 무덤 앞에 세운 석인상이나 길가의 장승 등에 옹중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례가 문헌에 등장한다.
옹중석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제주 돌하르방 석상 자체의 기원은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자 명칭이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사실만으로 석상의 제작기술이나 형태까지 중국에서 직접 전래됐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이름의 유래와 별개로 돌하르방 석상 자체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는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 대표적인 학설은 북방기원설과 남방기원설, 육지전래설, 제주자생설 등 네 가지다.
이처럼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석상은 1971년 문화재 지정 과정에서 돌하르방이라는 하나의 공식 명칭을 갖게 됐다.
문헌에는 옹중석으로 표기
돌하르방의 제작 시기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는 기록이지만 석상을 세웠다는 시점과 이에 대한 문헌기록 사이 간극이 160여년이다. 아직까지 이외 자료가 나오지 않아서 대부분 이를 바탕으로 돌하르방 등장을 설명하고 있다.
옹중이라는 명칭은 중국 진시황 때의 인물로 전해지는 완옹중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진시황은 흉노를 방어하는 데 공을 세운 완옹중이 죽자 그의 동상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이후 옹중은 사람의 형상을 만든 석상이나 동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됐다. 우리나라에서도 무덤 앞에 세운 석인상이나 길가의 장승 등에 옹중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례가 문헌에 등장한다.
옹중석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제주 돌하르방 석상 자체의 기원은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자 명칭이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사실만으로 석상의 제작기술이나 형태까지 중국에서 직접 전래됐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돌하르방 유래…북방설, 남방설, 육지전래설, 제주자생설 등 다양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정의현성 돌하르방. 2026.10.27. ijy788@newsis.com](https://img1.newsis.com/2026/10/26/NISI20261026_0002274371_web.jpg?rnd=20261026175341)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정의현성 돌하르방. 2026.10.27. [email protected]
북방기원설은 몽골을 비롯한 유라시아의 석인상 문화가 제주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다. 몽골의 제주 지배라는 역사적 배경과 동몽골 다리강가 지역의 석인상인 훈촐로와 돌하르방의 형태적 유사성을 주요 근거로 제시한다.
여기에 중국 요나라 시기의 석인상도 비교 대상으로 등장했다. 한 연구자는 중국 랴오닝성 건평박물관에 소장된 요나라 시기(10세기~12세기) 석인상과 돌하르방의 생김새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북방기원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제시했다.
대정현성 돌하르방 12기 가운데 4기가 몽골 간섭기인 13~14세기에 제작됐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제주읍성과 대정현성 석상의 조형적 차이 등을 분석해 제작 시기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견해가 나왔다.
남방기원설은 인도네시아 발리 등 동남아시아의 석상문화와 돌하르방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바닷길을 통한 문화교류 과정에서 석상문화가 제주로 전해졌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으로, 구체적인 전파 경로를 뒷받침할 자료는 부족한 실정이다.
육지전래설은 한반도 남부의 석장승 문화와 돌하르방의 관련성을 강조한다. 전남과 전북 지역의 석장승에서 볼 수 있는 벙거지 모자와 커다란 눈, 주먹코 등의 형태가 제주 석상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제주자생설은 외부 석상문화의 직접적인 전래보다 제주에서 형성된 고유한 석조문화와 지역적 특성에 무게를 둔다.
이들 학설은 역사적 교류 관계와 석상의 형태 등을 근거로 제시하지만, 제작 시기와 문화 전파 과정을 확인할 직접적인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돌하르방의 제작 시기에 대한 논란도 있다. 탐라기년에는 제주읍성 돌하르방이 1754년 세워졌다고 기록돼 있지만 대정현성과 정의현성의 석상은 이보다 앞서 제작됐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연구도 있다. 크기와 조각의 정교함 등 조형적 차이를 근거로 제주읍성 돌하르방이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이다.
돌하르방은 조선시대 제주읍성과 정의현, 대정현의 성문 앞에 세워졌다. 원래 48기가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현재 47기가 남아 있다.
여기에 중국 요나라 시기의 석인상도 비교 대상으로 등장했다. 한 연구자는 중국 랴오닝성 건평박물관에 소장된 요나라 시기(10세기~12세기) 석인상과 돌하르방의 생김새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북방기원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제시했다.
대정현성 돌하르방 12기 가운데 4기가 몽골 간섭기인 13~14세기에 제작됐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제주읍성과 대정현성 석상의 조형적 차이 등을 분석해 제작 시기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견해가 나왔다.
남방기원설은 인도네시아 발리 등 동남아시아의 석상문화와 돌하르방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바닷길을 통한 문화교류 과정에서 석상문화가 제주로 전해졌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으로, 구체적인 전파 경로를 뒷받침할 자료는 부족한 실정이다.
육지전래설은 한반도 남부의 석장승 문화와 돌하르방의 관련성을 강조한다. 전남과 전북 지역의 석장승에서 볼 수 있는 벙거지 모자와 커다란 눈, 주먹코 등의 형태가 제주 석상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제주자생설은 외부 석상문화의 직접적인 전래보다 제주에서 형성된 고유한 석조문화와 지역적 특성에 무게를 둔다.
이들 학설은 역사적 교류 관계와 석상의 형태 등을 근거로 제시하지만, 제작 시기와 문화 전파 과정을 확인할 직접적인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돌하르방의 제작 시기에 대한 논란도 있다. 탐라기년에는 제주읍성 돌하르방이 1754년 세워졌다고 기록돼 있지만 대정현성과 정의현성의 석상은 이보다 앞서 제작됐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연구도 있다. 크기와 조각의 정교함 등 조형적 차이를 근거로 제주읍성 돌하르방이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이다.
돌하르방, 제주 고유의 문화유산적 가치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대정현성 돌하르방. 2026.10.27. ijy788@newsis.com](https://img1.newsis.com/2026/10/26/NISI20261026_0002274372_web.jpg?rnd=20261026175420)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대정현성 돌하르방. 2026.10.27. [email protected]
제주읍성에 24기, 정의현성과 대정현성에 각각 12기가 세워졌는데 제주읍성의 1기는 사라졌다. 현존하는 석상 가운데 45기가 1971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됐으며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옮겨진 2기는 지정 대상에서 제외됐다.
지역마다 크기와 모습도 다르다. 제주읍성 돌하르방은 높이 157~238㎝로 가장 크고, 정의현성은 120~179㎝, 대정현성은 108~146㎝로 나타났다. 제주읍성 석상은 큼지막한 눈과 코를 강조해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정의현성과 대정현성은 크기가 작고 얼굴과 손동작의 표현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석상을 세운 목적은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과 외부의 나쁜 기운이나 질병을 막는 수호신,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 등으로 해석된다. 일부 돌하르방의 기단에서는 제주 전통가옥의 출입시설인 정낭을 걸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홈도 확인된다.
조형적 특징에서도 육지의 석장승과 차이를 보인다. 돌하르방은 두 손을 배 위에 올린 자세를 기본으로 하면서 팔과 손의 위치, 얼굴의 방향 등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제주의 현무암을 이용해 제작한 돌하르방은 지역의 자연환경과 석공들의 조각기술, 당시 주민들의 생활과 신앙을 함께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성문을 지키던 석상은 오늘날 관광상품과 각종 조형물로 활용되며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원래의 기능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졌지만 제주를 상징하는 문화적 가치는 더욱 넓어졌다.
현재 돌하르방은 제주도 민속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다. 역사성과 지역적 독창성,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고려하면 국가민속문화유산 지정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돌하르방 연구가인 황시권 박사는 "돌하르방은 제주 현무암을 이용해 독창적인 조형미를 구현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역사성과 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다"며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물인 만큼 원형 석상의 가치 정립, 체계적인 보존과 관리에도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지역마다 크기와 모습도 다르다. 제주읍성 돌하르방은 높이 157~238㎝로 가장 크고, 정의현성은 120~179㎝, 대정현성은 108~146㎝로 나타났다. 제주읍성 석상은 큼지막한 눈과 코를 강조해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정의현성과 대정현성은 크기가 작고 얼굴과 손동작의 표현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석상을 세운 목적은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과 외부의 나쁜 기운이나 질병을 막는 수호신,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 등으로 해석된다. 일부 돌하르방의 기단에서는 제주 전통가옥의 출입시설인 정낭을 걸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홈도 확인된다.
조형적 특징에서도 육지의 석장승과 차이를 보인다. 돌하르방은 두 손을 배 위에 올린 자세를 기본으로 하면서 팔과 손의 위치, 얼굴의 방향 등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제주의 현무암을 이용해 제작한 돌하르방은 지역의 자연환경과 석공들의 조각기술, 당시 주민들의 생활과 신앙을 함께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성문을 지키던 석상은 오늘날 관광상품과 각종 조형물로 활용되며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원래의 기능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졌지만 제주를 상징하는 문화적 가치는 더욱 넓어졌다.
현재 돌하르방은 제주도 민속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다. 역사성과 지역적 독창성,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고려하면 국가민속문화유산 지정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돌하르방 연구가인 황시권 박사는 "돌하르방은 제주 현무암을 이용해 독창적인 조형미를 구현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역사성과 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다"며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물인 만큼 원형 석상의 가치 정립, 체계적인 보존과 관리에도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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