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런 신작 '오디세이' 리뷰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새 영화 '오디세이'(8월5일 공개)는 사이즈와 스케일 모두 거대하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쪽에서 최고 수준이기도 하다. 충분히 고전적이면서 여지 없이 동시대적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전범(典範)이자 전복이다. 물론 '오디세이'를 최고의 영화라거나 놀런 감독 필모그래피 중 가장 빼어난 영화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다만 매번 제작비 수천억원을 쓰면서도 일관된 작품세계를 유지할 수 있는 영화예술가의 결과물을, 그것도 3년 주기로 만나볼 수 있다는 건 영화와 극장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제작비 약 2억5000만 달러(약 3675억원)를 투입한 '오디세이'는 우선 사이즈로 관객을 짓누른다. 러닝타임 172분을 70㎜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로 전부 촬영한 최초의 영화이고, 촬영기간 91일 동안 그리스·이탈리아·아이슬란드·스코틀랜드·미국 등을 오가며 찍은 필름 길이만 약 210만ft(약 640㎞)에 달한다. 트로이 목마를 10.7m 크기로 만든 건 물론 오디세우스의 배를 제작해 바다에 띄웠으며 트로이 성벽과 이타케의 성을 쌓아올렸다. 할리우드 기술력을 총동원한 이 호화로운 그림은 '오디세이'를 보는 데 들인 돈과 시간을 넉넉히 보상한다.
거대한 근육을 뽐내기만 할 뿐 소심한 영화가 판 치는 시대에 '오디세이'는 클 뿐 아니라 넓은 품과 두터운 켜를 아우르는 스케일을 가진 흔치 않은 작품이다. 20년이 걸려서야 고향에 돌아오게 된 한 남자를 그린 3000년 된 이야기를, 바다와 산과 동굴과 섬 등 온갖 자연을 통과해야 하는 이야기를, 인간과 신과 요정과 거인과 괴수가 뒤엉킨 이야기를, 전투와 전투 그리고 전쟁과 전쟁이 연이어진 이야기를, 게다가 완벽한 플롯을 가졌다는 그 이야기를, 거침 없이 각색해 스크린에 구현해낸 야심은 놀런 감독 영화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오디세이아>를 알든 모르든 '오디세이'는 일단 관객을 잡아끈다. 누군가는 폴리페모스와 라이스트리고네스와 키르케와 세이렌을 지나 스킬라·카리브디스 등을 통과하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에 매료될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목마가 트로이 성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감탄할지도 모른다. 또 어떤 이는 고향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가 벌이는 복수에 전율할 수도 있고, 텔레마코스의 성장과 페넬로페의 설움에 동화될 수도 있다. 그리고 원작과 완전히 뒤바뀐 결말을 두고 영화가 끝난 뒤 토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직관적으로 즐길거리가 넘쳐나는 영화인데, 놀런 감독 필모그래피 안에서 볼 때 '오디세이'는 더 특별해진다. 말하자면 <오디세이아>는 놀런 감독이 영화로 만들지 않을 수 없는 텍스트였다는 것. 이 고전은 놀런의 캐릭터와 놀런의 이야기를 집약한다. 약 30년 간 그가 만든 영화 12편은 귀향하려는 사람들, 성공으로서 실패이자 실패로서 성공, 자기 신화의 완성과 동시에 시작된 파국, 그리고 시간과 기억을 다뤘고, 이것들을 비선형 플롯에 담아왔다. <오디세이아>는 비선형 플롯의 원형과도 같은 작품이며 놀런 감독의 그 모든 서사를 한꺼번에 담은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오디세이'엔 놀런 감독 전작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 즐비하다. 시논이 트로이 목마와 함께 해변에 있는 첫 번째 시퀀스를 포함해 목마 안 병사들의 모습은 '덩케르크'의 몇 장면과 곧바로 연결된다. 오디세우스의 결정이 담긴 마지막 신(scene)은 당연히 '다크 나이트'의 마지막 시퀀스를 생각나게 한다. 죽은 줄 알았던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오는 건 죽은 줄 알았던 브루스 웨인이 고담으로 돌아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파편화된 기억을 짜맞추는 남자는 '메멘토'에 있었고, 오디세우스의 자책과 오펜하이머의 자책은 동일하다.

다만 놀런 감독은 <오디세이아>를 현대 기술로 복원·상영하는 덴 관심이 없다. 다시 말해 '오디세이'는 놀런의 '오디세이'다. 그저 유명 슈퍼히어로 중 하나로 보였던 배트맨을 말 그대로 다크 나이트로 승화하고,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단순화된 오펜하이머를 심연에서 길어올려 창조자이자 파괴자로 구체화한 것처럼 '오디세이'는 오디세우스를 재정립한다. 놀런의 오디세우스는 신 같은 지혜를 가졌으나 교만하고 오만한 가부장적 영웅이 아니라 자신의 오판과 패착과 거짓과 방관을 자책하고 번뇌하며 곱씹고 또 곱씹어 다시 태어난 인간적 영웅이다.
오디세우스를 다시 세우기 위해 '오디세이'는 <오디세이아> 신들을 사실상 제거한다. 신이 사라진 곳에서 오디세우스의 방랑은 분노한 신의 방해로 말미암은 일이 아니라 전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남자의 자발적 유폐가 된다. '오디세이'는 그렇게 남성 영웅담을 해체하고, 영웅이 사라진 곳에서 가부장제마저 무너뜨린다. <오디세이아>의 오디세우스가 자신을 재증명한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왕인 것과 달리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믿고 사랑해준 여인의 남자로만 남아 세계에서 사라져버리니 이는 신의 부재라는 설정에 정합한다.
그렇다면 헬레나를 흑인 배우 루피타 뇽오에게, 시논을 트랜스젠더 배우 엘리엇 페이지에게 맡긴 건 단순한 PC(정치적 올바름)가 아니다. '오디세이'는 원작이 정상(正常)을 전제한 자리에 원작이 배제한 몸을 세운다. '오디세이'는 20년에 걸친 오디세우스의 표류에 새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 이 모든 사태를 촉발한 헬레나를 원작과 상반되게 표현하는 건 전복되고 해체된 <오디세이아>를 상징한다. 오디세우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인 트로이 목마 작전이 사실상 문명 파괴 행위였다는 걸 주장하며 시논이 오디세우스에 의해 희생된 병사 중 한 명이라고 얘기할 때, 그 역할을 페이지에게 준 건 캐스팅으로 원작을 반박하는 것과 다름 없다.

놀런 감독 필모그래피를 꾸준히 따라온 관객이라면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에게서 결국 '오펜하이머'의 오펜하이머를 보게 될 것이다. 세계의 질서(Zeus' Law)를 허물어버린 오디세우스의 트로이 목마는 오펜하이머의 원자폭탄. 오디세우스가 눈물 흘리며 지난 세월을 고백할 때, 오펜하이머가 내뱉은 한 마디를 떠올리게 된다. "내 손에 피가 묻은 느낌이다." 오디세우스가 청동기 문명을 무너뜨릴 "바다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얘기할 때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고 했던 오펜하이머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건 '오디세이'의 한계이기도 하다. 신을 지우고 영웅을 해체하고 가부장을 무너뜨린 각색은 분명 놀런 감독의 것이지만 그 모든 과정을 거쳐 끝내 도달하는 자리, 그러니까 창조자이자 파괴자가 후회와 자책으로 심연을 곱씹는 그 자리는 이미 3년 전 '오펜하이머'가 먼저 도달했던 곳이다. 물론 두 번째 여정이 보여준 풍경 또한 여전히 압도적이나 처음 느낀 그 아득함을 되돌릴 수는 없다. 누군가는 그게 바로 놀런 감독의 작품 세계이고 바로 지금 놀런이 하고 싶은 얘기라고 하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동어 반복을 주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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