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인제 가옥’의 안채. 유리창과 붉은 벽돌이 눈에 띈다. (사진=서울관광재단) *재판매 및 DB 금지
자연과 건축의 경계를 허무는 '차경'(借景)의 미학이 5월의 신록 속에서 더욱 빛난다.
서울관광재단(대표이사 길기연)이 일상의 소란을 걷어내고 쉼과 여유를 즐길 수 있게 하는 서울 시내 한옥 명소들을 소개한다.
서울의 역사적 정체성을 간직한 동시에 드라마·영화 등 K-콘텐츠의 배경이 된 고택들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한국의 전통 건축은 ‘자연을 빌려 내 정원으로 삼는다’는 철학을 기본 원칙으로 삼는다. 이는 웅장한 '고대광실'(高臺廣室) 기와집부터 소박한 초가집까지 모두를 관통하는 핵심 가치다.
하늘과 산, 물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한옥의 유연함은 현대 건축이 놓치기 쉬운 '자연과의 공존'이라는 화두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차경은 '물욕'(物欲)을 내려놓는 과정이기도 했다. 자연을 굳이 억지로 소유하려 들지 않고 잠시 빌려 즐기는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담장 너머 풍경을 내 마당처럼 품어내는 이 비움의 미학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한옥이 현대인에게 특별한 치유의 공간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서울관광재단은 한옥의 자태를 만끽하며 가치를 재발견하는 여정을 제안한다. '북촌한옥마을' 코스는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도보로 관광지들을 탐방한다.
‘운현궁’에서 시작해 ‘석정보름우물터’, ‘중앙중·고등학교’, ‘가회동성당’을 지나 ‘정독도서관’과 ‘백인제 가옥’까지 둘러본다.
‘서울도보관광’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다.
[서울=뉴시스]김정환 관광전문 기자 =
북촌 가장 깊은 곳서 만나는 근대 상류사회
전통 한옥의 틀 위에 일본식 건축 양식과 서구적 기능이 결합한 ‘근대 한옥’으로 일제강점기 서울 최상류층의 삶을 압도적인 규모로 보여준다.
1913년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이 압록강에서 흑송을 가져 지었다. 이후 언론인 최선익을 거쳐 1944년 백병원 설립자인 외과의사 백인제(1898~?)의 소유가 됐다.
그는 6·25전쟁 때 납북되는 비극을 겪었으나, 전쟁 후 가족들이 거주하며 원형을 보존해 2015년 역사가옥박물관으로 개관했다.
백인제 가옥은 전통 한옥의 전형성을 탈피해 근대적인 공간 배치와 기능 전환을 시도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안채와 사랑채를 복도로 연결한 점이다. 이를 통해 신발을 벗지 않고도 내부에서 가옥 전체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이는 남녀의 거주 공간을 엄격히 분리하던 유교적 관습에서 벗어나 생활 편의성을 높인 구조다.
수직적 공간 활용 역시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한옥으로는 드물게 사랑채 일부를 2층으로 건축했다. 이는 평면적인 전통 가옥의 틀을 넘어 수직적 공간 활용과 함께 건축물의 위용을 극대화하는 개념을 도입한 결과다.

‘백인제 가옥’의 복도. (사진=서울관광재단) *재판매 및 DB 금지
자재의 선택 역시 시대 변화를 투영한다.
창호지 대신 유리창을 설치해 채광과 조망 효율을 비약적으로 높였다. 석조 대신 붉은 벽돌과 시멘트를 혼용해 담장을 쌓아 올렸다.
이러한 설계와 자재의 변화는 백인제 가옥을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대표적인 근대 한옥으로 평가받게 한다.
백인제 가옥은 근대적인 분위기와 압도적인 규모, 뛰어난 보존 상태를 바탕으로 K-콘텐츠의 주요 촬영지로 활용되고 있다.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2022)에서 순양그룹 회장 ‘진양철’(이성민 분)의 저택, 영화 ‘암살’(2015)에서 친일파 ‘강인국’(이경영 분)의 저택으로 등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극 중 서사가 실제 공간과 맞물려 관람객에게 입체적인 몰입감을 제공한다는 점이 이곳이 K-콘텐츠 여행지로 주목받는 이유다.
관람은 서울시 공공서비스예약 시스템을 통한 사전 예약제로 운영된다. 해설사를 동반할 경우 평소 개방이 제한된 안채, 부엌, 사랑채 내부까지 진입할 수 있어 근대 최상류층의 생활상을 더욱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북촌동양문화박물관’의 2층 테라스 뷰. (사진=서울관광재단) *재판매 및 DB 금지
백인제 가옥을 나와 북동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북촌한옥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곳(해발 약 70m)에 도착한다. 서울 종로구 북촌로11길에 사립 박물관이자 전통 찻집인 ‘북촌동양문화박물관’이 자리한다.
이곳은 입장료는 있지만 전통차 1잔이 제공돼 관람과 휴식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
1층 전시실은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각국의 고가구, 다기, 문방사우를 아우르는 고미술품 상설 전시를 통해 동양 전통 생활양식의 미학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2층 테라스에서는 높은 고도 덕분에 북촌 한옥 기와지붕군에서 시작해 경복궁을 거쳐 광화문 일대의 현
대적 빌딩 숲으로 확장하는 서울만의 독특한 경관을 내려다볼 수 있다. 시선을 반대로 돌리면 북악산의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