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신 "韓 음악계, 기적 같은 '사례'보다 '두터운 벨트'가 중요"

기사등록 2026/04/30 13:11:56

CJ문화재단 설립 20주년 기념 '스토리업 컬처 토크' 현장

정원영·장기하·선우정아도 참여

"CJ문화재단 '튠업', 성장 가능성 살피는 프로그램"

[서울=뉴시스] 왼쪽부터 선우정아, 윤종신, 장기하, 정원영. (사진 = CJ문화재단 제공) 2026.04.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왼쪽부터 선우정아, 윤종신, 장기하, 정원영. (사진 = CJ문화재단 제공) 2026.04.3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참 이런 일도 있구나'라는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싱어송라이터 장기하는 몇 년 전 음원 차트를 휩쓴 가수 비비의 히트곡 '밤양갱'의 탄생 비화를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대단한 야심이나 자본의 치밀한 기획이 아니라, 자신이 과거에 만들어 놓은 뒤 그저 컴퓨터 속에서 '놀고 있던 곡'이 우연한 인연을 만나 발화했다는 것이다. '밤양갱'은 장기하가 작사·작곡·편곡을 도맡은 노래다. 돈을 벌겠다는 목적조차 없이 그저 만들어 뒀던 노래가 당도한 기묘한 성취. '싸구려 커피'로 유명해진 '장기하와 얼굴들' 역시 그가 상업성 목적 없이 즐기려고 시작한 밴드였다.

장기하를 비롯해 싱어송라이터 겸 키보디스트 정원영, 가수 겸 프로듀서 윤종신, 싱어송라이터 선우정아는 CJ문화재단이 설립 20주년을 맞아 지난 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CJ아지트에서 연 '스토리업 컬처 토크'에서 이처럼 계산되지 않은 우연과 무용한 즐거움이 어떻게 K-팝이라는 거대한 산업의 저변을 구원하는지 담담히 짚어냈다.

'서브 컬처를 주목하는 세대'를 주제로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가 모더레이터를 맡은 이날 행사에선 또 넓어진 K-팝의 영토와 K-팝의 진짜 정의를 묻는 근원적인 질문도 오갔다. K-팝은 현재 주로 '아이돌 댄스 음악'으로 통한다.

장기하는 "K팝 하면 떠오르는 것이 일단 아이돌이기 때문에 (그 외의 장르를 설명할 때는) 늘 부가 설명이 필요하다"며 아직은 좁은 K-팝의 외연을 짚었다. 그러면서도 "전혀 아이돌이 아닌 팀이 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는 일이 생기는 순간, 그 개념 자체도 달라질 것"이라며 장르적 전복이 일어날 과도기적 가능성을 열어뒀다.

실제로 경계는 이미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선우정아는 "저 스스로는 K-팝에 속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해외 팬들이 내 음악을 '이번 주 K-팝 차트'에 넣고 있더라"며 "해외에서는 오히려 장르 구분을 크게 하지 않고 '한국에서 온 훌륭한 음악'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윤종신은 K-팝의 정체성을 '언어의 고유성'에서 찾았다. "스페인어를 써야 라틴팝이듯, 우리 언어로 된 순수 히트곡이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면서 "아이돌 음악이 단순히 외국의 팝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정서와 톤으로 세계 시장에 자리 잡았다는 건 엄청난 의미"라고 평했다. 비주류의 변방에서 출발한 아이돌 음악이 이제는 세계의 주류가 돼 꽂아둔 그 깃발 너머로, 이제는 밴드와 싱어송라이터 등 또 다른 서브 컬처들이 다양한 장르로 뻗어 나가야 할 차례라는 의미다.

윤종신은 다만 "음악계 파이가 커지는 건 긍정적이지만, 세계 무대에서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압박감보다는 그저 놀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계룡산에서 복수를 위해 칼을 갈듯 비장하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좋아서 '하다 보니, 살다 보니' 음악이 직업이 되는 낭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울=뉴시스] 왼쪽부터 김윤하, 선우정아, 윤종신, 장기하, 정원영. (사진 = CJ문화재단 제공) 2026.04.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왼쪽부터 김윤하, 선우정아, 윤종신, 장기하, 정원영. (사진 = CJ문화재단 제공) 2026.04.3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K-팝 밴드 '루시', K팝 걸그룹 '빌리' 등이 속한 미스틱 스토리 대표 프로듀서도 맡고 있는 윤종신은 특히 몇몇 천재적인 기적을 시스템 전체의 승리로 착각하는 현상을 날카롭게 경계했다. "국가대표 야구팀 30명이 일본을 이긴다고 해서 우리 야구 저변이 넓은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는 "몇 개의 기적적인 사례를 가지고 K-팝 전체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단편적인 사례는 저변이 아니다"라며 "동네마다 음악을 잘하고 즐겁게 하는 사람들이 뭉쳐 노는 두터운 벨트가 필요하다"고 톺아봤다.

그렇다면 그 '두터운 벨트'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단기적인 화제성과 시청률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의 오디션 프로그램과 달리, CJ문화재단의 인디 뮤지션 지원 사업 '튠업(Tune Up)'이 걷는 궤적에서 그 해답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Z-세대 록스타'로 통하는 한로로를 비롯해 최유리, 윤마치 같은 현재 가장 주목 받는 싱어송라이터부터 '새소년' '웨이브 투 어스' 같은 해외에서 통하는 밴드들이 튠업 출신이다. 튠업은 최근 148대 1의 경쟁률을 뚫은 ▲리도어(Redoor) ▲신인류 ▲오이스터즈(OYSTERS) ▲주혜린 ▲캔트비블루(can'tbeblue) ▲피치트럭 하이재커스(Peach Truck Hijackers) 등 여섯 팀을 27기로 선정했다.

'튠업' 심사위원으로 오랜 시간 활약해 온 선우정아와 정원영은 '성장 가능성'이라는 단어에 짙은 신뢰를 보냈다.

선우정아는 "튠업은 당장 인기가 많고 사랑받을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며 "오늘 공연이 조금 아쉬웠더라도, 지금 힘을 실어주면 1년 안에 대단한 성장이 있겠다는 가능성을 제대로 살펴보는 프로그램"이라고 짚었다. CJ문화재단 이사이기도 한 정원영 역시 "튠업은 시스템이 잘 돼 있어 뮤지션들과 계속 만나며 조언하고, 신(scene)에서 더 오래 음악을 같이 할 수 있게 돕는다"고 덧붙였다.

누군가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 자체를 신뢰하고 기다려주는 것. 주류의 문법에 포획되지 않은 미완의 존재가 온전한 자신의 형태를 찾아가도록 기꺼이 곁을 내어주는 일은, 창작자를 향한 가장 정확하고 윤리적인 애정이다. 비주류가 주류를 맹목적으로 좇는 대신 자신만의 토양에 단단한 뿌리를 내릴 때, 비로소 K-팝이라는 거대한 숲은 메마르지 않고 오래도록 무성해질 수 있다는 걸 CJ문화재단과 이날 모인 뮤지션들이 보여주고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button by close ad
button by close ad

윤종신 "韓 음악계, 기적 같은 '사례'보다 '두터운 벨트'가 중요"

기사등록 2026/04/30 13:11:56 최초수정

이시간 뉴스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