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만큼 얇은 자석 실존했다"…73년 물리학 난제 푼 한국의 ‘집념’

기사등록 2026/04/22 00:00:00

최종수정 2026/04/22 00:04:23

서울대 박제근 교수 연구팀, 원자 한 층 두께 ‘2차원 자성’ 세계 최초 입증

1943년 첫 제기된 온사거 이론…박 교수 팀이 73년 만에 실험으로 입증

물리학계 '바이블' RMP 학술지 게재…차세대 반도체·양자컴퓨팅 혁명 기대

2차원 자성 반데르발스 연구 분야의 정체성과 학문적 도약을 한눈에 보여주는 개념도. 전체적인 이미지는 3D 프린팅으로 정교하게 제작된 구조물 형상을 띠고 있으며, 대표적인 2차원 물질인 '그래핀(Graphene)'과 유사한 벌집 모양(Honeycomb)의 2차원 골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진=과기정통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차원 자성 반데르발스 연구 분야의 정체성과 학문적 도약을 한눈에 보여주는 개념도. 전체적인 이미지는 3D 프린팅으로 정교하게 제작된 구조물 형상을 띠고 있으며, 대표적인 2차원 물질인 '그래핀(Graphene)'과 유사한 벌집 모양(Honeycomb)의 2차원 골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진=과기정통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윤현성 기자 = 원자 한 층 두께, 즉 종이보다 수백만배 더 얇은 '세상에서 가장 얇은 자석'을 만드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물리학계에서 70여년 동안 풀지 못한 난제에 답하기 위해 15년을 바친 국내 연구진의 집념이 마침내 전 세계 물리학계의 '표준 지침서'로 완성됐다. 한국 물리학 80년 역사에 획을 긋는 기념비적 순간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박제근 교수 연구팀이 '2차원 자성 반데르발스(van der Waals)' 분야의 연구 성과와 향후 전망을 집대성한 논문을 물리학계 최고 권위지인 '리뷰스 오브 모던 피직스(RMP)'에 게재했다고 22일 밝혔다. 이날 자정(한국시간)을 기해 전 세계에 공개된 이 논문은 박 교수가 교신저자로 주도했으며, 한국과 미국의 핵심 연구자 7명이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박제근 교수 연구팀, 73년 물리학계 난제 해결…‘2차원 자석' 최고 권위자 공인

이번 성과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RMP는 미국물리학회(APS)가 발행하는 학술지로, 단순히 뛰어난 논문을 싣는 곳이 아니다. 수십년간 해당 분야를 개척하고 이끈 극소수의 권위자에게만 '초청 집필'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1929년 창간 이래 한국인이 1저자나 교신저자로 참여한 사례는 한자리에 그칠 정도다.

세계적 학자로 알려진 한국인 물리학자 고(故) 이휘소 교수가 학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 것도 RMP에 게이지 이론(Gauge Theory) 관련 논문을 주저자로 게재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를 고려하면 박 교수가 개척한 '2차원 자성 반데르발스' 분야 연구가 세계적 주류 학문으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박 교수도 해당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국제적 공인을 받게 됐다.

박 교수가 정리한 88페이지 분량의 논문은 사실상 '2차원 자석의 교과서'다. 단행본으로 치면 250페이지가 넘는 이 방대한 기록에는 2010년부터 시작된 박 교수의 끈질긴 연구의 성과가 고스란히 담겼다.
2차원 반데르발스(vdW) 자성체가 제공하는 ‘물리적 현상의 종합 플랫폼'을 직관적인 하나의 다이어그램으로 요약한 자료. (사진=과기정통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차원 반데르발스(vdW) 자성체가 제공하는 ‘물리적 현상의 종합 플랫폼'을 직관적인 하나의 다이어그램으로 요약한 자료. (사진=과기정통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자석은 부피를 가진 3차원 형태로, 원자가 입체적으로 쌓여있어 자기적 성질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반면 원자 한층 두께에 불과한 2차원 평면 상태에서도 자석의 성질을 발현하고 유지할 수 있는지는 물리학계의 오랜 난제였다.

1943년 노르웨이의 물리학자 라르스 온사거는 원자 한 층 수준의 얇은 평면에서도 자석의 성질이 유지될 수 있다는 이론적 가능성을 제시했다. 하지만 원자가 입체적으로 쌓인 3차원 자석과 달리, 얇은 막 형태의 2차원 상태에서 자기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겨졌다.

온사거 이후 70여년간 전세계 누구도 실제로 증명하지 못했던 이 가설을 현실로 불러낸 이가 바로 박 교수다. 박 교수 연구팀은 2016년 삼황화린철(FePS3)을 박리해 영하 118도 이하에서 자성 원자층을 추출하는 데 성공하며 온사거의 이론을 세계 최초로 실험을 통해 입증해냈다.

박 교수는 연구성과 브리핑을 통해 “지난 2010년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어두운 방에 '세상에서 가장 얇은 자석이 가능한가'라는 질문 하나만 들고 홀로 걸어 들어갔다"고 회상했다. 당시 학계 일부에서는 외국에서 유행하는 연구를 따라가지 않는다며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기도 했지만, 박 교수는 "남의 문제를 대신 풀어주는 추격자를 넘어 우리만의 독창적인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소명감으로 버텼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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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번 성과는 학술적 가치를 넘어 산업적 응용 가능성까지 제시하고 있다. 반데르발스 자성체 내 스핀 기반 양자 현상 제어 기술은 차세대 스핀트로닉스 및 양자소자 기술의 핵심 기반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른바 ‘원자 자석’이 인류의 산업 생태계 자체를 바꿀 수도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기대다.

1㎚(나노미터)도 되지 않는 두께에서 자성을 제어할 수 있게 되면 기존 반도체의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전력 소모는 획기적으로 줄이고 처리 속도는 수백배 빠른 초소형 컴퓨터나 AI 칩을 만들 수 있다.

국제 학계의 반응도 뜨겁다. 박 교수가 세계 최초로 개척한 2차원 자성 반데르발스 분야는 현재 매년 1000편 이상의 논문이 쏟아지는 글로벌 주류 학문으로 성장했다. 특히 지난해 서울대에 유치한 '독일 막스플랑크 양자물질 국제협력센터'는 한국이 양자 물질 분야의 세계적 허브로 도약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박 교수는 이번 성과가 개인의 영광을 넘어 한국 과학계의 질문이 바뀌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그는 "이제는 '어떤 저널에 실렸고 인용지수가 얼마나 되는가'보다 '당신은 어떤 새로운 분야를 세계 최초로 개척했는가'를 묻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며 “신진 과학자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파괴적 혁신을 위해 자신만의 깜깜한 방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도록 국가의 지원 시스템과 과학 생태계가 완벽한 방패가 되어 주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과기정통부 역시 리더급 연구자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김성수 연구개발정책실장은 "기초연구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당장 얻기 어려운 무한도전과 실패의 영역이지만, 연구의 과정과 결과는 상상하지 못한 파급력을 가져올 수 있다”며 “앞으로도 새로운 분야를 발굴하고 심화시켜 나가는 리더급 연구자들이 기초과학의 패러다임을 주도할 수 있도록 안정적이고 전폭적인 지원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15년 전 한 과학자의 무모한 호기심으로 켜진 작은 불빛이 이제는 전 세계 물리학계가 나아가야 할 길을 비추는 거대한 등대가 됐다. 한국 물리학사 80년 만에 일궈낸 이 '표준 지침서'는 대한민국이 추격자의 그늘에서 벗어나 세계 과학의 규칙을 설계하는 주인공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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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만큼 얇은 자석 실존했다"…73년 물리학 난제 푼 한국의 ‘집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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