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서 기원으로…방탄소년단·블랙핑크, K-팝이 재구축한 韓 미학의 영토

기사등록 2026/02/18 12:00:31

공간과 복식의 경계 허물며 K-팝으로 글로벌 문화적 자산 재구축

힙트래디션…전통은 '박제된 유물' 아닌 가장 '힙한' 문화적 코드

[서울=뉴시스] 방탄소년단 경복궁 근정전 공연. (사진 = 빅히트 뮤직 제공) 2026.02.18.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방탄소년단 경복궁 근정전 공연. (사진 = 빅히트 뮤직 제공) 2026.02.18.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어떤 기록은 기억의 영토를 물리적으로 확장한다. 서구의 트렌드를 추격하던 K-팝은 이제 스스로 '기원'의 자리에 서서, 낡은 것으로 치부되던 전통을 가장 세련된 문화적 자산으로 재구축하고 있다.

특히 이 거대한 흐름의 중심에는 '전통'을 단순한 콘셉트가 아닌 자신의 '정체성'으로 승화시킨 두 K-팝 거물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가 있다.

방탄소년단, '아리랑'으로 잇는 600년의 시간

방탄소년단에게 이제 전통은 글로벌 팬덤 '아미(ARMY)'와 연결되는 '회복과 소통'의 언어다. 오는 3월21일 100년 만에 복구된 광화문 월대(月臺) 위에서 펼쳐질 정규 5집 '아리랑(ARIRANG)' 컴백 무대는 K-팝 사(史)의 역사적 이행을 상징한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경복궁 근정전과 경회루 공연이 '한국적 미학의 전파'였다면, 왕과 백성이 소통하던 월대에서의 공연은 단절(군 복무) 이후 팬들과 다시 마주하는 인문학적 깊이를 더한다.

방탄소년단은 앞서 '아이돌(IDOL)'과 멤버 슈가의 솔로곡 '대취타(Daechwita)'에서 한복을 입고 국악 장단을 믹스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특히 아리랑을 통해 민족의 원형적 슬픔인 '한(恨)'을 방탄소년단은 '그리움'이라는 보편적 정서로 치환한다. 아미들은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KOTPA) 유튜브 채널에 들어오는 등 앨범의 모티브를 공부하며 아리랑의 유네스코 등재 의미까지 파고드는 자발적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방탄소년단 멤버 정국이 유행시킨 생활한복과 영국 밴드 '콜드플레이'에게 선물한 개량한복은 전통 복식이 박제된 유물이 아닌, 전 세계 MZ세대가 열광하는 '패션 아이템'임을 증명했다.

블랙핑크, 박물관의 담장을 허문 '문화 안내자'

블랙핑크는 음악을 넘어 '문화유산의 대중화'를 이끄는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오는 27일 발매하는 미니 3집 '데드라인(DEADLINE)' 발매를 기념해 진행되는 '국중박 X 블랙핑크' 프로젝트는 그 정점이다.

K-팝 아티스트 최초로 국립중앙박물관(국중박)과 전개하는 이번 협업에서 블랙핑크 멤버들은 광개토대왕릉비 앞에서 리스닝 세션을 열고, 직접 오디오 도슨트로 참여해 우리 유물의 가치를 알린다.
[서울=뉴시스] 블랙핑크 '코첼라 2023' 공연 모습. (사진 = YG엔터테인먼트 제공) 2026.02.18.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블랙핑크 '코첼라 2023' 공연 모습. (사진 = YG엔터테인먼트 제공) 2026.02.18.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2023년 미국 대형 음악 페스티벌 '코첼라 밸리 뮤직&아트 페스티벌' 무대에서 보여준 기와지붕 세트와 부채춤, 조선시대 무관의 의복인 '철릭(帖裏)'에서 영감받은 한복 의상은 CNN이 "한국 유산에 대한 경의"라고 조명할 만큼 강렬한 미학적 선언이었다.

대표곡 '하우 유 라이크 댓(How You Like That)' 뮤직비디오에선 한복 저고리를 크롭 티처럼 리폼한 의상을 입고 등장해, 전 세계적으로 'K-한복'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들의 행보는 박물관이라는 정적인 공간에 블랙핑크의 음악이라는 동적인 에너지를 주입함으로써, 전통문화가 젊은 층과 글로벌 팬들에게 '경험하고 싶은 문화'로 자리 잡게 할 것으로 예상된다.

블랙핑크 멤버 제니는 지난해 말 '멜론 뮤직 어워드(MMA) 2025'에서 반가사유상과 석가탑의 미학을 드레스에 녹여내 한국적 요소가 아티스트의 정체성을 얼마나 우아하게 완성하는지 보여줬다. 가집 '청구영언'의 내용을 새긴 베일을 통해 내면의 정체성을 시각화하며 한국적 미학의 정점을 찍었다.

확장되는 영토…무속에서 팝 아트까지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외에도 K-팝의 전통문화 확장은 'K-팝 생태계 전반'으로 전이되고 있다.

글로벌 신드롬을 일으킨 넷플릭스 K-팝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는 무당과 저승사자를 모티브로 한 서사로 K-팝 첫 '그래미 어워즈' 수상 기록('베스트 송 리튼 포 비주얼 미디어')를 받는 등 가장 로컬한 이야기가 세계 주류가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그룹 '에이티즈(ATEEZ)'는 K-팝 보이그룹 첫 코첼라 무대에서 봉산탈춤의 사자춤과 사신(四神) 깃발을 활용해 '한국의 매운맛'을 제대로 증명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방탄소년단 '아리랑' 사이에 나온 JYP엔터테인먼트 자회사 이닛엔터테인먼트의 신인 듀오 '도드리(dodree)'는 판소리와 K-팝을 결합한 '크로스오버 팝'을 내세웠다. 팀명부터 국악 장단에서 따온 이들은 전통이 콘셉트가 아닌 정체성임을 분명히 한다.

최근 이런 흐름은 '힙트래디션(Hip Tradition)' 맥락에 놓여 있다. 이 용어는 '힙(Hip)'과 '전통(Tradition)'의 합성어로, 우리 전통문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 쿨하게 즐기는 현상을 가리킨다. 과거에는 전통이 '지루하고 낡은 것'으로 여겨졌다면, 지금의 Z세대에게는 '가장 새롭고 독보적인 개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서울=뉴시스] 조성우 기자 = 국립박물관 문화상품 매출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가운데 23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기념품점에서 관람객이 박물관 문화상품 '뮷즈(MU:DS)'를 살펴보고 있다.국립박물관문화재단에 따르면 2025년 '뮷즈'의 연간 매출액은 413억 3700만원으로, 2021년(65억9100만원) 보다 6배 이상 증가했다. 2026.01.23. xconfind@newsis.com
[서울=뉴시스] 조성우 기자 = 국립박물관 문화상품 매출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가운데 23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기념품점에서 관람객이 박물관 문화상품 '뮷즈(MU:DS)'를 살펴보고 있다.국립박물관문화재단에 따르면 2025년 '뮷즈'의 연간 매출액은 413억 3700만원으로, 2021년(65억9100만원) 보다 6배 이상 증가했다. 2026.01.23. [email protected]
뮷즈(MU:DS)(뮤지엄+굿즈의 줄임말)가 대표적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취객선비 술잔이나 고려청자 무선 이어폰 케이스 등이 젠지 사이에서 큰 인기다. '약과'와 '티케팅'의 합성어 '약케팅', 경복궁 별빛야행 등 고궁 체험 프로그램 예약인 '궁케팅'이 아이돌 콘서트 티켓 예매만큼 치열해진 현상이다.

K-팝계에서도 이런 현상이 도드라졌다. 방탄소년단 멤버 RM이 국립중앙박물관의 '반가사유상 미니어처'를 소장한 것이 알려지며 해당 굿즈가 품절 대란을 일으켰다. '뉴진스'는 경복궁 근정전에서 한복을 입고 무대를 선보였고, 디자인에 한국적 요소를 담은 굿즈들을 통해 힙한 전통 이미지를 구축했다. '레드벨벳'은 대표곡 '칠 킬(Chill Kill)' 활동에서 자개 장식, 댕기, 호랑이 민화 등 한국적 요소를 '잔혹 동화' 콘셉트와 섞어 기묘하고 세련된 미장센을 보여줬다.

전통과 전통음악에 대해서 꾸준히 글을 써온 성혜인 음악평론가(한국대중음악상(한대음) 선정위원)는 "흔히 글로벌 음악 시장에서의 상업적 성공은 미국과 유럽, 특히 미국 시장에서의 성공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서구의 트렌드를 빠르게 읽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전략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비교적 가까운 과거만 하더라도 '로컬한 것', 즉 한국적인 요소는 세련되지 못하거나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곤 했다"고 짚었다.

그러나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를 비롯해 '케이팝'이라는 고유한 문화적 범주가 세계적 파급력을 갖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면서 "이제 케이팝은 서구 음악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승인받아야 하는 위치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흐름과 트렌드를 만들어 가는 주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톺아봤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한국적인 요소는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해석해야 하는 차별화의 자산으로 기능하게 됐다는 게 성 평론가의 판단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각 아티스트의 방식으로 세련되게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능력이 중요한 경쟁력이 됐다. 나아가 케이팝 아티스트들은 단순한 상업적 성공을 넘어 한 시대와 국가의 문화적 상징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사회적 환원, 공공성에 대한 책임까지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부연했다.

다만 K-팝과 전통문화의 협업 흐름은 문화관광산업에 새로운 활로가 될 수 있겠으나, 이러한 시도가 일시적 관심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더불어 K-팝을 문화 외교의 도구로 지나치게 소비하지 않도록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글로벌 음악 시장에서 활약하는 K-팝 아티스트들이 '한국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표방하면서 국내에서 전통문화를 바라보는 인식이 크게 바뀔 것으로 보인다.

성 평론가는 "적어도 인식이 과거로 돌아가진 않을 것 같다. 과거에는 낡거나 주변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던 전통문화가 동시대적 감각 속에서 재해석되며 자부심을 가질 만한 문화적 코드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커졌다"면서 "결과적으로 해외에서 '한국' 하면 떠오르는 문화적 상징이 있을 텐데, 이러한 시도를 통해 전통문화 전문가나 관련 기관이 설정하고 주도해 온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문화적 상징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또 정의되리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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