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오년 말띠해…제주는 언제 어떻게 '말의 섬'이 됐을까

기사등록 2026/01/01 11:47:17

최종수정 2026/01/01 12:00:24

삼성신화와 유물·유적에 말 등장

고려·조선시대 중요 공물이자 전력 자산

말 문화는 제주 역사의 핵심적인 흐름

[제주=뉴시스] 우장호 기자 = 2026년 병오년은 붉은 말의 해다. 말은 강인한 생동감과 활력, 건강의 상징이다. 천연기념물 제347호 제주마(馬)는 중간 체구의 말로, 성격이 온순하고 체질이 건강하여 병에 대한 저항력과 생존력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제주마가 지난 19일 오전 제주시 노형동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 제주도축산생명연구원 방목지에서 아침 햇살을 맞으며 겨울을 나고 있다. 2025.12.31. woo1223@newsis.com
[제주=뉴시스] 우장호 기자 = 2026년 병오년은 붉은 말의 해다. 말은 강인한 생동감과 활력, 건강의 상징이다. 천연기념물 제347호 제주마(馬)는 중간 체구의 말로, 성격이 온순하고 체질이 건강하여 병에 대한 저항력과 생존력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제주마가 지난 19일 오전 제주시 노형동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 제주도축산생명연구원 방목지에서 아침 햇살을 맞으며 겨울을 나고 있다. 2025.12.31. [email protected]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병오년(丙午年) 말띠해가 밝았다.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로'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제주와 말(馬)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제주에서 말은 단순히 교통수단이나 관광용을 넘어서 이 섬의 자연과 권력, 그리고 사람의 삶을 재편해온 실체였다.

제주가 말의 섬이 된 이유는 기후와 자연환경 영향이 가장 크다고 본다. 온난한 기후와 많은 강수량, 그리고 한라산을 중심으로 한 완만한 지형은 연중 방목을 가능하게 했다. 풀은 해발이 낮은 곳에서부터 정상 방향으로 싹트고, 다시 해안 쪽으로 시들어 내려왔고 그 길을 따라 방목이 이뤄졌다. 한반도 내륙에 비해 풀이 상존하는 기간이 길어 자연 방목이 유리하다.

말은 계절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동했고 하천과 계곡은 인공 울타리 없이도 경계 역할을 했다. 말 사육을 위해 자연을 바꿀 필요가 없었던 곳, 섬 자체가 거대한 목장이었다.

개국신화, 고대 유적에 말 등장

언제부터 제주에서 말을 길렀을까.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아주 오래전인 것은 분명하다. 고려사, 영주지 등의 기록에 따르면 제주의 삼성(三姓)의 시조신화이자 탐라 개국신화인 삼성신화에 3명의 공주가 오곡씨앗, 망아지와 함께 제주에 왔다는 내용이 있다. 농경문화가 싹 트는 시기에 말 사육이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헌과 유적을 종합하면 제주의 말 사육은 통일신라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시 용담동 유적에서는 말이 그려진 토우(土偶)가 출토됐고, 곽지리 유적에서는 말뼈가 발견됐다. 초기에는 주거지 주변에서 길러지던 말이 점차 교역품이자 공물로 인식되면서 사육 공간이 한라산 산간까지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들어 말의 위상은 더욱 분명해진다. 고려사에는 탐라에서 생산된 말이 정기적으로 고려 조정에 공납됐고, 우수한 말은 왕족과 고위 관료들에게 하사됐다는 기록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특히 13세기 후반 삼별초 항쟁 이후 제주는 원나라의 직할령이 되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일본 원정을 준비하던 원에게 제주는 군마를 확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원나라 입장에서는 해외에 조성한 유일한 국마장이었다. 한라산 일대에는 대규모 목장이 조성됐고 몽골에서 건너온 말과 목자들이 제주에 정착했다.

이 시기 말 사육은 단순한 산업을 넘어 한라산의 경관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화입, 즉 불을 놓아 초지를 만드는 방식으로 중산간 숲이 대규모 초지로 전환됐다. 화분 분석 결과에 따르면 12~13세기 이후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서 초지 확장이 본격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중산간 초원의 상당 부분이 이 시기 말 사육과 맞물려 형성된 것이다.
[제주=뉴시스] 탐락순력도의 공마봉진. 1702년 (숙종 28) 진상에 필요한 말을 각 목장에서 징발하여 관덕정에서 제주목사가 입회한 가운데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 (사진=탐라순력도에서 캡처)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제주=뉴시스] 탐락순력도의 공마봉진. 1702년 (숙종 28) 진상에 필요한 말을 각 목장에서 징발하여 관덕정에서 제주목사가 입회한 가운데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 (사진=탐라순력도에서 캡처)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제주의 말, 중요 공물이자 전력 자산

조선시대에 들어 제주의 말은 국가 제도 속으로 완전히 편입된다. 조선은 제주를 국마장으로 규정하고, 한라산을 중심으로 섬 전역을 여러 개의 목장 구역으로 나눴다. 이른바 ‘10소장’ 체계다. 각 목장에는 마감, 군두, 목자 등을 배치했고, 말의 수와 상태를 기록한 우마적을 작성했다. 사람에게 호적이 있듯 말도 개체 단위로 관리했다. 태조 7년(1398년) 기준 제주에서 기록된 말은 4414마리였고, 이후 많을 때는 1만마리가 넘었다. 조선에 필요한 말의 50% 이상을 제주에서 조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말 관리가 국가 핵심 업무였던 만큼 통제도 엄격했다. 경국대전에는 말 점검에 오류가 있거나 낙인을 속인 경우 감목관과 목자를 중형에 처한다는 규정이 명시돼 있다. 말은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군사와 외교, 재정을 떠받치는 국가 자산이었다. 제주목사에게도 말 관리는 중요 업무였으며, 주요 진상품이었다. 말은 여전히 전쟁에서의 핵심 자산이자 이동 및 농경수단이었다.

그러나 국마장의 확대는 제주 주민들의 삶과 충돌했다. 말 방목을 이유로 중산간 경작이 제한됐고, 세종대에는 수백 호의 주민이 강제로 이주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한라산에 돌담을 쌓아 목장 경계를 명확히 하는 과정은 국가 소유 영역을 시각적으로 각인하는 일이었다. 자유롭게 오르내리던 산은 통제된 공간으로 바뀌었다.

근대에 들어 국마장 제도는 해체된다. 갑오개혁 이후 마정과 공마 제도가 폐지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국영 목장은 불하되거나 매각됐다. 대신 마을 단위의 공동목장이 등장했다. 국가 중심의 말 생산 체계가 지역 공동체 중심으로 전환된 것이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한라산 중턱에서 방목중인 제주마. (사진=뉴시스 DB) ijy788@newsis.com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한라산 중턱에서 방목중인 제주마. (사진=뉴시스 DB) [email protected]

오늘날 제주에서 말은 더 이상 교통수단도, 군사 자산도 아니지만 지금도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 이뤄지는 경마장의 경주마의 50% 이상이 제주에서 생산되고 있다. 레저용 승마는 물론이고 치유용으로도 쓰인다. 관광객들은 제주 곳곳에 있는 승마장에서 말을 직접 타는 경험도 한다.

이처럼 말이 남긴 흔적은 여전히 제주 곳곳에 남아 있다. 오름 사이를 잇는 길, 중산간의 초지, 돌담으로 나뉜 경계는 모두 말과 함께 형성된 공간이다. 제주에서 말은 달리는 역할을 넘어서 자연과 사람 사이를 오랫동안 이어준 존재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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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년 말띠해…제주는 언제 어떻게 '말의 섬'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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