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리오갤러리 서울서 신작 전시
출산 과정 환각 경험 7.2m 수묵채색으로 형상화

이은실, 에피듀럴 모먼트 Epidural Moment, 2025, Ink and color on paper, 244 x 720 cm (244 x 180 cm x 4 ea.)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여성 화가에게 출산은 찬가도, 비가도 아니다.
이은실(42)의 회화는 몸에 새겨진 파동을 자연의 풍경으로 옮겨 놓으며, 고통 이후에도 세계는 계속 움직인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명한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17일부터 여는 이은실 개인전 ‘파고’는 출산이라는 경험을 숭고함이나 비극으로 소비하지 않고, 신체에 남은 흔적을 자연의 언어로 번역한 회화 작업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이은실이 오래도록 숙고해 온 ‘출산’이라는 경험을 처음으로 전면에 드러내는 자리다. 동양화 기법을 기반으로 작업해 온 그는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규범이 충돌하는 지점의 감정들을 회화의 은유적 언어로 번역해 왔다.

이은실, 《파고》(아라리오갤러리 서울, 2025) 전시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1층 전시장에 선보이는 대형 회화 ‘에피듀럴 모먼트’는 폭 7.2미터에 이르는 대작이다. 수묵 채색으로 묘사된 화면에는 두터운 안개에 덮인 부감 시점의 산맥 위로 거대한 뱀 또는 용의 형상이 중첩된다. 네 개의 화폭을 휘감은 동물의 금빛 비늘 사이로는 해체된 뼈의 이미지가 드러난다.
이 작품은 출산 과정에서 산모의 통증 완화를 위해 투여되는 경막외 마취제가 신체에 주입되는 순간의 환각 경험을 소재로 삼았다. 극심한 진통 속에서 감각이 둔화되며 찾아오는 환상은, 출산이라는 행위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신체적·정서적 마취 상태를 상징적으로 환기한다.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16일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개인전을 연 이은실 작가가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2025.12.16. hyun@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1.newsis.com/2025/12/16/NISI20251216_0002019939_web.jpg?rnd=20251216163106)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16일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개인전을 연 이은실 작가가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2025.12.16.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이은실의 회화는 출산 과정에서 겪은 폭발적인 응집과 분열의 힘을 자연 현상에 비유하는 방식을 취한다. ‘멈추지 않는 협곡’은 신체 내부에서 끊임없이 분출하는 혈액을 거대한 협곡을 가로지르는 붉은 용암에 빗대어 묘사하고, ‘생사의 기로’는 그 용암이 대지 위로 혈관처럼 퍼져 나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살갗 위로 불거진 핏줄의 위태로움을 연상시키는 이 화면들은 새로운 탄생을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모체의 격렬한 투쟁을 드러낸다.

이은실, 고군분투 Struggle, 2025, Ink and color on paper, 130 x 162 cm *재판매 및 DB 금지
지하 1층 전시장에서는 출산의 순간에 신체에 가해지는 충격을 근접 화면으로 포착한 작품들이 이어진다.
‘고군분투’는 물리적 압력으로 인해 눈의 실핏줄이 터진 장면을 부분적으로 묘사하고, ‘절개’와 ‘흔적’은 복부 절개 부위의 수술 자국과 튼살의 흔적을 화면 위로 끌어올린다. ‘넘치는 마음과 그렇지 못한 태도’는 산후 유선염을 소재로 삼아, 모성의 의지와 따르지 않는 신체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이은실은 2006년 서울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한 뒤 인사미술공간 ‘신진 작가의 수첩’, 중앙미술대전,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 리움미술관 ‘아트스펙트럼’ 등을 거치며 일찍이 주목받는 작가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는 두 번의 출산 이후 신체적·정신적 충격과 육아로 인한 불가피한 공백을 겪었고, 작업실로 ‘돌아왔다’고 말할 수 있었던 시점을 2018년으로 회상한다. 아무도 충분히 설명해 주지 않았던 출산의 고통과 출혈, 공포와 혼란, 그리고 곧바로 적응을 요구받는 사회적 압박은 오랫동안 서랍 속에 밀어 넣어 두어야 했던 기억이었다.

이은실, 인생의 소용돌이 Whirling Vortex (True Labor), 2025, Ink and color on paper, 160 x 190 cm *재판매 및 DB 금지
전시 제목 ‘파고’는 개인의 삶에서 마주하는 변곡점을 파도의 높이에 비유한 것이다. 출산은 생성과 환희의 순간이면서 동시에 분열과 상실을 동반하는 사건이다.
이은실은 가장 개인적인 기억과 감각을 자연의 풍경 위에 중첩하며, 출산을 여성의 서사에 머무르지 않는 존재론적 경험으로 확장한다. 출산을 경유한 인간의 연약함은 거대한 자연의 이미지로 치환되며 순환과 회복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번 전시는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1층과 지하 1층에서 신작 10점을 선보이고, 3층과 4층에서는 2007년부터 2024년까지의 주요 작품을 함께 소개한다. 초기의 사회적 규범과 개인의 심리적 갈등을 다룬 작업부터 내면의 정서적 파동에 집중한 근작까지, 이은실 회화가 지나온 경로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전시는 2026년 1월 31일까지.

이은실, 《파고》(아라리오갤러리 서울, 2025) 지하1층 전시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