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 충격 그리고 카타르시스…인간의 양면성 드러낸 '핑크' [객석에서]

[서울=뉴시스] 최희정 기자 = 막이 오르자 남성들이 등장해 피 범벅이 된 벽과 바닥을 닦는다. 닦으면 닦을수록 그 자리는 분홍으로 물든다. 닦아낸 곳은 선홍의 흔적이 새겨진다. 로맨틱하고 부드러운 '핑크'가 공포로 변하는 순간이다.

김성훈 안무가의 '싱크 넥스트 25 Pink'가 지난 2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무대에 올랐다.

첫 장면의 섬뜩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무용수들이 폭력을 연상케 하는 춤을 추며 공포를 끌어올린다.

이윽고 두 남성이 서로를 향해 주먹을 날리며 격투를 벌인다. 싸움에서 이긴 남성은 기절한 상대를 무대위에서 질질 끌고 다닌다. 음악은 지지직 거리고, 남성은 나사가 풀린 듯한 표정으로 어슬렁 거린다.

폭력은 점차 고조되고 8명의 무용수들이 서로 때리고 맞는 장면이 끝없이 반복된다.

맞은 사람이 피해자가 되는 듯 싶더니, 그는 다시 다른 사람을 때린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는 것.

부드럽지만 홍(紅)을 품은 핑크의 양면성처럼, 폭력성이 내재된 인간 역시 양면성을 가진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이후 장면은 더 충격적이다. 흉기를 든 남성이 자해를 하고 타인을  찌를 태세다. 얼음을 들고 나온 남성은 격렬히 움직이다가 구토를 수없이 한다. 피 칠갑을 한 남성은 심지어 나체로 서성인다.

극도의 긴장이  풀리는 순간의 이상 행동. 언젠가 어느 뒷골목에서 마주쳤을 법한, 낯익은 인간 풍경이  겹친다.

막이 바뀌자 다른 남성들도 '나체 행렬'에 합류한다. 끈적한 흰색의 액체가 벽에서 쏟아지고 남성들은 벽을 향해 돌진한다. 옷을 다 벗어버리고 나체 상태로 춤을 춘다. 마치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

무용수들은 폭력성은 물론, 인간이 감추고 싶어하는 것들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며 묻는다. 이것이야말로 드러내고 싶지않은 당신, 인간의 모습이 아니냐고.

'핑크'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갈린다. 끔찍하고 잔혹하며 충격적이라는 평이 다수지만, 일부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한다.

공연이 끝난 뒤 '앙토냉 아르토의 잔혹연극론' 및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 박형섭 전 부산대 불문학과 교수는 "잔혹성이 아주 상징적으로 잘 표현된 것을 보고 카타르시스를 많이 느꼈다"며 "저 자신도 굉장히 어떤 시스템에 구속돼 있다고 늘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괴롭고 힘듦, 스트레스를 예술적 표현을 통해 감동이나 자극을 받는다면 예술 속에서 그 예술가들의 세계를 공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한 관객은 "잔혹극에 대한 것은 모르고 왔지만 그런 극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긴 하지만 굉장히 일회성인 것 같다. 이런 똑같은 극을 또 보러 올 것 같진 않다"고 했다.

김성훈의 '핑크'는 아르토 기법에서 영감을 받았다. 아르토 기법은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활동한 앙토냉 아르토가 창안한 '잔혹 연극' 이론으로, 깨달음과 감동을 주는 연극은 기만이며 육체 언어를 통해 현실의 삶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충격적인 장면이나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이 기법은 국내 연극계에서는 다양하게 연출됐지만 무용에선 보기 힘든 시도다.

관객들 대부분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구 국가에서도 잘 공연되지 않는 '잔혹극'을 이번에 국내 안무가가 '핑크'를 통해 보여준 것에 대해 박 교수는 의미를 부여했다.

김성훈 안무가는 이날 공연에 앞서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어떤 서사가 있거나 메시지를 전하는데 초점을 맞추기 보단 감각을 일깨워주기 위해 실험적으로 펼쳐진 작품"이라며 "관객들이 어느 선까지 허용할 것이며 어느 선까지 불쾌함을 느낄지 알고 싶었다"고 작품 의도를 설명한 바 있다.

 '핑크'는 19세 이상 관객만 관람할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 '싱크넥스트 25'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마련된 이 작품은 30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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