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P “베트남 전쟁부터 9·11 이후까지 국가 안보의 핵심 인물”
공화당원이었지만 국수적인 트럼프 아닌 힐러리지지
김대중 정부 한반도 정책에 깊게 관여

【서울=뉴시스】 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이 2016년 3월 23일부터 24일까지 미국 하와이에서 열리는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산하 태평양포럼 연례 이사회에 참석했다. 사진은 연례이사회를 마치고 최신원 회장(오른쪽)이 리처드 아미티지 태평양포럼 공동의장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2025.04.15.(사진=SK네트웍스 제공)
[서울=뉴시스] 구자룡 기자 = 미국의 대표적인 지한파 관료이자 한반도 정책에도 깊이 관여한 리처츠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이 13일(현지 시간)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9세.
고인이 설립한 컨설팅 업체 ‘아미티지 인터내셔널’은 “무거운 마음으로 아미티지 전 부장관의 별세 소식을 전한다”며 “사인은 폐색전증”이라고 밝혔다. 그의 아내 로라도 폐색전증이 사망 원인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첫 임기 동안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부장관으로 미국 외교 정책을 이끌었다.
워싱턴 포스트(WP)는 “아미티지는 베트남 전쟁부터 2001년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까지 미국 국가 안보의 핵심 인물이었다”고 전했다.
아미티지는 2005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컨설팅 회사를 운영했고 동아시아를 자주 다니며 일본, 한국 등 동맹국의 정부 최고위층과 연락을 유지했다.
아미티지는 1967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아시아에서 군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남베트남 강 유역군의 고문을 포함해 3번의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1973년 군 복무를 마쳤지만, 국방부는 그에게 1975년 초 베트남으로 돌아와 미군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정부의 악화되는 상황을 보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공산 북베트남이 군함과 비행기를 포함한 미군 장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필요하다면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사이공 공항에서 공산측의 공습을 받은 뒤 남베트남 해군 함장과 협의하에 함선을 파괴하는 대신 남베트남 해군과 선원 및 가족들을 대피시켰다.
아미티지는 2018년 구술 역사에서 최대 31척의 선박과 2만 8000명에서 3만 명이 필리핀 수빅만 미 해군 기지로 항해했다고 말했다.
이런 작전은 미국 정부의 명시적인 허가없이 이뤄져 정부에서는 매우 화가 났었다는 그는 후에 회고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공화당 대통령 재임 시절, 아미티지는 국방 및 외교 고위직을 역임했다.
2001년, 조지 W 부시 대통령 당선 후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을 콜린 파원 국무장관의 부장관을 지냈다.
둘 모두 베트남 참전 용사 출신으로 2021년 파월 전 장관이 사망했을 때 아미티지는 장례식에서 첫 번째 초청 연설자로 나섰다.
국무부 2인자로서 그는 직설적인 대화가 필요한 긴박한 상황에서 종종 문제 해결사 역할을 했다고 WP는 전했다.
그는 2001년 4월 미 해군 전자 정찰기가 중국 전투기와 충돌해 중국 하이난섬에 불시착했을 때 24명의 미 공군 장병 석방 협상을 도왔다.
2001년 9월 알카에다가 미국을 공격한 후 아미티지 씨는 이슬람 무장세력을 은밀히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이 알고 있던 파키스탄으로 가서 최후통첩을 내렸다.
파키스탄은 알카에다, 탈레반 및 기타 폭력적인 극단주의자들과의 다가오는 싸움에서 어느 편에 설지 선택하도록 했다.
그가 파키스탄 관리들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폭격으로 “석기 시대로 돌아갈 위험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본인은 부인했다. 하지만 후에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이를 확인했다.
2002년 부시 대통령의 백악관이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일 때 파월과 아미티지는 부통령 딕 체니와 국방장관 도널드 H. 럼스펠드 등 매파에 밀려 정책 결정권의 핵심에서 점점 멀어졌다.
파월과 아미티지 모두 이라크 침공에 직접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대규모 국제연합을 결성하고 사담 후세인 축출 이후 발생할 수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비한 뒤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미티지는 1945년 4월 26일 매사추세츠주 웰즐리에서 태어났다. 애틀랜타에서 자랐고 1963년에 세인트 피우스 X 가톨릭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7년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아미티지 전 부장관은 재임 기간 내내 유망한 젊은 군인 및 외교관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데 주력했다.
국무부에서 아미티지와 파월 장관 밑에서 일했던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 윌리엄 J. 번스는 “그의 모범은 여러 세대의 공무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영감을 주었다. 나도 그중 한 명이라는 것이 큰 행운이었고, 그의 친구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아미티지는 평생 공화당원이었지만 세계에서 미국의 강력한 역할과 세계 동맹의 중요성에 대해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은 도널드 트럼프 시대에 점점 더 국수주의적이고 고립주의적으로 변한 공화당의 주변부에 머물게 했따.
그는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대신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다.
그는 국무부 부장관 시절인 2001년∼2004년 김대중 대통령 정부와 대북 문제 등 한반도 관련 사안에 깊이 관여했으나 김 대통령의 대북 ‘햇볕 정책’에 대해서는 지지하지 않았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중학생 2명이 사망한 '미선이·효순이 사건'으로 한국에서 반미 기류가 거세게 확산했을 당시엔 부시 대통령의 사과와 유감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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