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서 무대로 옮겨진 동독 도청실…연극 '타인의 삶'[이예슬의 쇼믈리에]

기사등록 2024/11/30 09:00:00

연극 '타인의 삶' 리뷰

[서울=뉴시스] 연극 '타인의 삶'. (사진=프로젝트그룹일다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연극 '타인의 삶'. (사진=프로젝트그룹일다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이예슬 기자 = "당신은 날 모르지만, 나는 당신을 알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5년 전. 동독의 국가보안부(슈타지)에서는 10만 명의 비밀경찰과 20만 명이 넘는 정보원이 활동했다. 이들의 감시 대상에 예술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밀경찰 '비즐러'는 극작가 '드라이만'과 배우 '크리스타' 커플을 도청 중이다. '당신(크리스타)은 날 모르지만 나(비즐러)는 당신을 아는' 이유다.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동명 영화를 손상규 연출이 각색한 연극 '타인의 삶'이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공연 중이다. 2006년 개봉된 영화는 2007년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등 각종 영화제를 휩쓴 화제작으로, 최근 국내에서 재개봉해 다시금 관심을 끌었다.

비밀경찰이라는 소임을 성실하고 유능하게 수행하던 비즐러는 타인의 삶에 개입하면서 점차 그들의 삶에 감화된다. 감시 대상의 행적을 낱낱이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는 비즐러는 급기야 조직을 배반하고 드라이만을 보호하고자 적극적으로 거짓말까지 하게 된다.

줄거리는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매체 예술이 무대 예술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달라진 점을 찾는 게 관람의 묘미다.

막이 오르기 전 배우들이 미리 나와 무대 양 끝단에 놓인 의자에 앉아 대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극의 중간에도 이 같은 대기는 계속되는데, 30개가 넘는 장면이 빠르게 전환되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한다.

손상규 연출은 "공연 시작 전 배우들과 관객이 한 공간에서 작품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함께 다른 시공간으로 나아가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접근했다"며 "관객들이 우리가 하는 것을 단순히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과 함께 있다는 감각을 무의식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간결한 무대는 특별한 효과 없이도 소품만으로 드라이만의 집, 비즐러의 도청실, 강의실, 술집 등 각각의 장소를 나타내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빈 무대를 활용하면서 구체적인 공간의 시각적 요소 없이도 인물 간 관계로 시공간을 표현하자는 게 연출 의도다.

[서울=뉴시스] 연극 '타인의 삶'. (사진=프로젝트그룹일다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연극 '타인의 삶'. (사진=프로젝트그룹일다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이 의도가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가 닿으려면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이 필수 요소다.

지난 27일 첫 공연에서 윤나무는 타인의 삶을 도청하다 자신의 삶이 뒤틀려 버리는 비즐러의 모습을 그라데이션으로 표현했다. 권력이 아무리 촘촘한 감시망을 구축해도 예술에의 목마름과 자유에 대한 의지, 인간애를 꺾을 수 없다는 점을 깨닫는 순간, 그는 그동안의 신념을 버리고 자신을 내던지면서까지 드라이만을 보호한다.

드라이만 역의 김준한은 연극 무대가 처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밸런스 좋은 연기를 선보였다.

1인 다역을 맡은 조연 배우들의 연기에도 박수를 보낼 만 하다. 김정호는 문화계 권력을 한 손에 쥔 햄프 장관과 당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연출가로서의 경력이 끊긴 예르스카를, 이호철은 출세에 목 맨 비즐러의 상관 그루비츠와 체제 비판적인 인물 하우저를 동시에 연기한다.

이들은 인물의 특징을 잘 캐치해 극 초반에는 동일 배우임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정 반대의 캐릭터를 잘 그려냈다. 특히 이호철이 하우저를 연기할 때 쭉 뺀 거북목에 승모근이 한껏 긴장된 모습이 인상 깊다.

1월19일까지 공연한다.

★공연 페어링 : 보드카와 코냑

[서울=뉴시스] 연극 '타인의 삶'. (사진=프로젝트그룹일다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연극 '타인의 삶'. (사진=프로젝트그룹일다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크리스타는 재능 있는 배우지만 권력자의 심기를 거스르면 다시는 무대 위에 서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을 성 노리개로 삼으려는 햄프 장관을 대차게 거절하지 못한다.

가지 말라는 드라이만을 뿌리치고 집을 나서는 크리스타. 엿듣는 자 비즐러와 감시당하는 자 크리스타는 그렇게 술집에서 마주친다. 비즐러는 보드카 더블샷, 크리스타는 코냑 더블샷을 들이킨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 주지 않는 것과 예술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는 크리스타에게 비즐러는 대뜸 팬심을 고백하며 용기를 북돋는다.

크리스타는 비즐러가 누구인지 아직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건네는 한 마디. "당신은 좋은 사람이네요."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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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에서 무대로 옮겨진 동독 도청실…연극 '타인의 삶'[이예슬의 쇼믈리에]

기사등록 2024/11/30 09:00:00 최초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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